임진왜란 3 대첩
한산도대첩
임진년(1592) 7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선을 전멸시켜(60척 침몰)
왜의 수군에 큰 타격을 주어 제해권을 잡았다.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전라 순찰사 권율이
서울 수복을 위해 북상하다가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쳐부수어 승리한 싸움
이때 동원된 부녀자들이 긴 치마로
돌을 날라 석전(石戰)을 벌인 것이 유명합니다.
진주대첩
진주대첩은 1차 혈전은 1592년 10월, 3만의 왜군 연합부대가 공격해 왔으나 진주 목사 김시민이 끝까지 이를 고수하였으며, 이때 의병 곽재우가 합세하여 화약물과 돌로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2차 혈전은 1593년 6월, 1차전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대군으로 공격, 의병인 고종후·강희열등이
참가하여 항전하다 전원이 전사하였습니다.
김시민(金時敏) 진주대첩
선조대 조선통신사 부사 학봉 김성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년 ~ 1593년 경북 안동)
임진왜란 당시 유일무이한 초유사 김성일은 당시 경상도 전역에서 봉기한 의병을 일원적으로 지휘·통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 초기 관찰사 등의 부재 시에는 직접 관군을 지휘하여 방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성일은 진주성 고수를 통한 호남 방어를 주장하는 한편, 목사(牧使)김시민(金時敏)을 적극 지원하여 1592년(선조 25) 10월에 거둔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에 크게 기여 하였다(『선조실록』 25년 12월 5일)
● 임진왜란 2년전 우송당 황윤길과 학봉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
二十四年春三月, 通信使黃允吉等回自日本, 倭使平調信等偕来, 允吉馳啓情形, 以爲必有兵禍. 既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一曰, 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張皇論奏, 搖動人心, 甚乖事宜. 上問秀吉何狀, 允吉言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誠一曰, 其目如鼠, 不足畏也. 盖誠一憤允吉到彼恇㤼失體, 故言言相左如此.
『國朝寶鑑』卷30, 宣祖 24年
선조 24년(1591) 봄 3월,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왜국의 사신 평조신(平調信, 다이라 시게노부) 등도 함께 왔다. 황윤길이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馳啓)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불러 하문하니, 황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는데 김성일(金誠一)이 아뢰기를,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일의 마땅함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황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김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아서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하였다. 이는 김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한 것이었다.
『국조보감』권30, 선조 24년
이 사료는 황윤길(黃允吉, 1536~?)과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1590년(선조 23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591년(선조 24년)에 귀국하면서 일본의 사정에 대해 보고한 내용이다. 황윤길은 1561년(명종 16년) 문과에 급제, 정언을 비롯해 황주 목사와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김성일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며 이황(李滉, 1501~1570)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비롯해 홍문관 수찬, 나주 목사, 경상좌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등장하여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하고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전국 시대의 오랜 전투 과정에서 얻은 다이묘(大名)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함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정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대륙 침략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 소 요시시게)를 시켜서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호 관계를 맺도록 하였는데,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 있었다. 대마도주는 가신(家臣) 귤강광(橘康廣, 다치바나 야스히로) 등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에 보내 통호(通好)할 것을 청하였다.
일본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으며, 조정 대신의 반대도 완강하였다.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수차례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암시를 받은 조선 조정은 통신사 파견의 가부(可否)를 논의하였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선조 23년) 3월 서울을 출발해 이듬해 3월 서울에 돌아왔다. 정사는 서인 황윤길이었으며 부사는 동인 김성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보고가 서로 달랐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 보고하였다. 또한 도요토미는 안광(眼光)이 빛나고 담략(膽略)이 있어 보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할 낌새는 전혀 없었으며, 도요토미의 사람됨도 쥐와 같이 생겨서 전혀 두려워 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상반된 보고를 받은 조정 대신 가운데는 정사 황윤길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으며 부사 김성일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는 등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런데 요행을 바라던 조선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 결국 후자의 의견에 머물렀고, 따라서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하고 말았다.
그 후 종의조가 부산포에 와서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를 명(明)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회답이 없었다. 이에 그는 그대로 돌아가고, 왜관에 머물던 일본인들도 본국으로 소환되자 조선은 그제야 일본의 침입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비책을 강구했으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