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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당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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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과 『노자』’ 주석
1) 이 글은 네 편의 글을, 글을 쓴 순서의 역순으로 편집한 것이다. 맨 처음 글인 ‘이경숙과 『노자』’는 에코넷과 구름타운에서 이경숙의 근황을 파악하고 쓴 글이다. 그 외의 글은 2004년 출간된 이씨의 책 『완역 이경숙 도덕경』에 대한 비판이다. 이 글은 올린지 수일 만에 2500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2) ‘구름~~’은 이경숙의 인터넷상의 닉네임이고, ‘도깨비’는 이씨의 남편인 김관흥의 닉네임이다 ‘구름은 깨비다.’라는 말은 이씨의 사이트며 공동체인 ‘구름타운’의 회원들이 오프 모임에서 이씨와 김씨를 직접 만나보고 그들의 역할에 대해 의혹을 품은 데서 시작되었다.
이씨는 의혹을 제기하고, 검증하고자 하는 회원들을 구름타운에서 강퇴시켜 말문을 막았으나, 구름이 논객으로 초빙되었다 취소한 신생 웹진인 에코넷의 에코넷 뒷마당에 강퇴된 회원들이 대거 모여 이씨와 김씨 부부를 성토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금전 차용 등의 문제까지 공개, 비판되자 부부는 고소, 고발을 남발하여 결국 지금은 쌍방 고소, 고발하여 경찰과 검찰의 조사가 진행 중이다.
3) ‘거의 100% 틀렸다’라는 표현은 상당히 자제한 것이다. 혹자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노자』에 대한 이씨의 해석은 ‘다르다’는 차원을 넘었다. 즉 ‘해석의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씨의 『노자』는 『노자』가 아니다. 내 글을 읽고도 이씨 말이 맞다는 분은 항의해도 좋다. 단, 말이 돼야 한다. jaseng54@naver.com
4) 나도 학벌보다 실력이 중요하다는 정도는 안다. 그러나 이경숙식 한문 해석이 정규 교육 과정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단적인 예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이씨는 학벌은 부족하나 실력있는 사람들을 욕 먹이는 것이다. 학벌은 실력보다 객관성에서 우위에 있다. 실력은 그 실력을 발휘하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미리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가 실력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실력에 대한 타당한 검증이 가능한가? 학벌이냐, 실력이냐는 이분될 수 없지만, 사회 운영상의 효율성이라는 면에서 선후(先後)가 있을 수 있다.
나는 이과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노자』에 대해서는 학벌이 없다. 그러나 노장사상 공부에 거의 30년 간 전공자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 그 결과 『노자』에 대해서는 전공자의 연구도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30년의 시간이 나의 『노자』이해가 옳다는 것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나는 내 자신이 ‘도가(道家)’라고 생각하고 ‘도가’로서 살려고 한다. 노장 연구자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노자』를 그냥 전공이니까 붙잡고 있는 것이다.
5) 이런 기자들의 대표가 중앙일보의 배영대 기자다. 이경숙은 배영대가 발굴한 것이다. 배영대 기자는 이씨의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이 나오자 ‘도올 김용옥이 임자를 만났다’며 서평을 크게 싣고, 이씨가 사는 창원까지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이씨에게 한문 해석에 대한 전면 칼럼을 6회나 쓰게 했다. 이 내용은 거의 다 틀린 것이다. 그 외에도 「월간중앙」에서의 인터뷰, 기고문 등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2004년 『완역 이경숙 도덕경』이 나왔을 때도 배씨는 ‘도올 저격수가 돌아 왔다’며 호의적인 서평과 인터뷰를 했다. 결과적으로 이씨는 내가 보기엔 쓰레기 같은 책들을, 뻥으로 생각되지만 30만권 정도 팔았다고 말한다. 배영대 기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그런데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을 만났다는 이씨의 말이 맞다면 배기자는 조직의 희생자다.
6) 사이비 종교 사업이라는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공동체를 구성하여 교주로 생각되는 사람을 무비판적으로 존경하고, 돈 문제를 표면화 하면 대부분 사이비 종교 사업이라고 규정한다. 한마디로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재정이 불투명한 조직은 어떤 규모이건 간에 사이비 종교 사업이다.
7) 『완역 이경숙 도덕경』의 『노자』원문 전체와 상권인 『도경』의 내용을 주로 비판하였다. 이 글을 시간상 하권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작성했어도 결정적인 착오는 없다. 이 주석은 하권인『덕경』까지 대체로 살펴보고 작성한 것이라 비판할 것이 늘었다.
8) 배영대 기자를 말한 것이다. 이번에 검색해 보니 배기자는 1999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道(도)와 均衡(균형) : 老莊哲學(노장철학)의 養生(양생)을 중심으로」이다. 그래서 나는 배기자에 대해 더욱 화가 난다. 노장철학을 공부한 사람에게 이씨의 책 같은 것이 책으로 보인단 말인가? 다음은 배기자가 이씨를 평가한 말인데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도올 김용옥이 임자를 만났다.’
‘곳곳에서 통찰력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책은 2천5백년의 해석사를 뒤집어버리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거리다.’
“가공할 한학 실력과 동양고전 해석 역량으로 도올 김용옥씨를 매섭게 몰아부처 우리 지식사회를 놀라게 했던 ‘노자를 웃긴 남자'의 ‘얼굴없는 저자’”
“‘도올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아줌마 논객’ 이경숙씨가 돌아왔다.”
“전공자가 아닌 이씨가 도덕경 81장을 풀어가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
그런데 2001년 2월 24일 중앙일보에는 ‘도덕경은 전체가 하나의 문장’이라는 이경숙의 기고문과 배영대와의 인터뷰기사가 실렸다. 이씨는 이 날의 기사에 대해 자랑삼아 자기 카페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시에 중앙일보가 나한테 왜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의 여행』이란 나의 전작(前作)을 읽어보신 홍석현 회장님의 관심과 배려가 있었다는 사실은 훗날에 홍회장님께 저녁을 얻어 먹으면서 알게되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배기자는 희생자다. 그러나 누구의 지시였던 간에 이씨의 책을 띄워준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배영대는 기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씨의 책을 사본 수많은 사람들의 『노자』에 대한 오해,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한 부작용이 지금도 구름타운과 안티구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9) 영감(靈感)을 강조하는 것이 사이비의 특징이다. 증명 가능한 것도 자기가 증명할 능력이 없으면 영감을 들먹이고, 그것을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을 때 사이비 종교의 가능성이 생긴다.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어린 딸에게 쓴 편지에서 ‘믿음의 좋은 이유’로 증거(evidence)를, ‘믿음의 나쁜 이유’로 전통(tradition), 권위(authority)와 계시(revelation)을 얘기해 준다. 이 중 계시에 대해 쓴 부분을 인용한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계시와 이씨의 영감을 같은 종류라고 본다.
“믿음의 나쁜 이유 중 세 번째는 ‘계시’라는 거야. 네가 1950년에 교황에게 마리아의 몸이 천국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면, 그는 아마도 ‘계시를 받았다’고 말 했을거야. 그는 방에 틀어 박혀서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지. 그는 홀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고, 점점 더 내면의 확신을 얻었어. 종교인들은 참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지만 뭔가가 참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면, 자신의 감정을 ‘계시’라고 부르지.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교황들만은 아니야. 많은 종교인들이 그렇게 하지. 그들이 믿는 것들을 믿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야. 하지만 그것이 과연 좋은 이유일까? ...
사람들은 때로 깊은 내면의 감정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곤 해. 그렇지 않으면 ‘아내는 나를 사랑해’ 같은 것들을 결코 확신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것은 좋지 않은 논리야. 누군가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이 있어. 너를 사랑하는 누군가와 온종일 있어보면, 사소한 증거들을 많이 보고 들을 것이고, 그것들은 모두 한데 모이게 되지. 그것은 성직자들이 계시라고 부르는 감정 같은, 순수한 내면의 감정이 아니야. 그 내면의 감정을 뒷받침하는 바깥의 것들이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 사소한 호의와 다정함. 그런 것들이 모두 진짜 증거야.
때로 사람들은 어떤 증거도 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강한 내면의 감정을 갖는데, 그런 감정은 전혀 들어맞지 않을 때가 많아. 유명한 영화배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강한 내면의 감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 실제 영화배우는 그들을 만난 적도 없는데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정신이 병든거야. 내면의 감정은 증거의 뒷받침을 받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어.” 『악마의 사도』(바다출판사 p447)
10) 이씨는 ‘옥편 하나면 한문을 해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존의 도덕경 해석은 80% 이상 엉터리’며, ‘사서삼경을 비롯, 동양 고전의 대부분이 순 엉터리 황당무계 그 자체’라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씨가 말하는 그 옥편이 바로 그 황당무계하고, 엉터리인 동양학자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이씨는 자기 책 『완역 이경숙 도덕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과대망상의 극치지만 이씨는 이런 말들로 사람들을 모았다.
“전세계 동양학계에 충격과 경악과 탄식을 주게 될 책입니다. 동양학자들 전부 사표쓰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모든 고전에 대해 재번역 작업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도록 촉구할 생각입니다.” (구름카페 2003.8.20)
“이번 책은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준 독자에게 보답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썼다. 앞으로 도덕경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완역 이경숙 도덕경』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앙일보 인터뷰 2004.1.19)
11) 이씨는 하권에 ‘『도덕경』의 판본(板本)에 대해서’(「덕경」 p30)라는 장문의 글을 실어 놓았다. 그래도 이씨가 판본이 뭔지 모른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씨의 글을 보자.
“사마천의 『사기』와 같이 저자가 분명하고 저자가 직접 저술한 것이 확실한 책도 있지만 고전의 대부분은 본인의 저술이 아니라 제자 또는 제자의 제자가 썼거나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어록을 후대 사람이 집대성한 것이 많다. 그래서 하나의 고전은 여러 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성서도 마찬가지다. 예수에 대한 마가나 누가, 마태의 기술은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약간씩 상이한 점도 있다. 이건 불경도 마찬가지다.” (이)
“성서를 읽을 때 마가, 누가, 마태의 세 복음서 중 어느 것을 읽어도 전체적인 메시지는 동일하다. 『도덕경』역시 어느 판본을 택하더라도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판본의 연구는 성서 판본학에 의해 크게 발달했다. 그런데 이씨는 판본 얘기를 하면서 서로 다른 책인 마가, 누가, 마태를 비교한다. 성서의 판본은 마가의 판본들 끼리, 누가의 판본들 끼리, 마태의 판본들 끼리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이씨가 말하는 것은 판본이 아니라 원본(原本)의 문제이다. 이씨는 사마천의『사기』가 지은이가 확실하여 판본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지은이가 확실해도 판본의 문제는 존재한다.
또 이씨는 『노자』의 판본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현재 『노자』에 대한 이해가 전문가들 사이에는 90% 정도 일치한다고 본다. 문제는 나머지 10% 정도다. 여기에서는 한자 한 글자의 차이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판본이 중요해 지는 것이다. 이씨 처럼 영감으로 고전 한문을 읽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안 되지만...
12) 『노자』11장 처음에 이런 문장이 있다.
‘三十輻共一?, 當其無, 有車之用;’ 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지만, 그 비어 있음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일반적 번역)
‘서른 개의 바퀴살을 하나의 살통으로 모은다. 그 없음으로 해서 수레의 쓰임이 있다.’ (이경숙 번역)
위의 두 가지 번역은 큰 차이가 없다. 문제는 ‘당기무 (當其無)’의 ‘그 기(其)’자다. 이 ‘그’가 무엇을 가리키느냐 때문에 내가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내가 4월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씨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씨는 비어 있는 곳이 바퀴살과 바퀴살 사이의 공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공간의 발명이 ‘불과 문자 그리고 화약의 발명 못지않게 인류의 문명을 개화시킨 기폭제였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둥근 바퀴(바퀴 륜輪) 자체의 발명이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다. 나는 ‘그’가 바퀴통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바퀴에서 중요한 것은 둥근 바퀴와 축이 지나가는 바퀴통 중간의 구멍이다. 이 구멍을 너무 뻑뻑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잘 깍는 것이 당시에는 마차 제작자의 최고 기술이었다. 『장자』「천도」편에 나오는 환공 윤편 문답(桓公輪扁問答)을 참고.
나는 10여 년 전에 고대의 마차 바퀴 유물을 찾아보기 위해서 국립도서관에서 중국박물관들의 도록을 모두 살펴보았다. 위 글이 ‘허(虛)’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만, ‘삼십폭’의 한 달을 의미하는 ‘30’이라는 숫자가 마음에 걸려서 였다. 고대 중국과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마차의 말의 수나 장식이 신분에 따라 규정되어 있었다. ‘삼심폭’의 바퀴가 신분에 맞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시황제 병마총에서 발견된 황제 마차의 바퀴살이 삼십개다. 나는 ‘삼십폭’의 마차가 최고급 마차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노자가 11장에서 ‘허’의 의미와, 사치(奢侈)에 대한 경계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3) 왕필(王弼 226-249)은 한(漢)나라가 망한 후, 삼국 시대의 극심한 혼란이 약간 진정된 AD 200년대 전반기의 위(魏)나라에서 살았다. 왕필은 20세 이전에 『노자 왕필주』를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이 송나라 이후에 가장 많이 보급되어, 현행본 『노자』는 대부분 『노자 왕필주』에서 왕필의 ‘주’를 뺀 나머지 부분을 원문으로 한다. 왕필의 ‘주’는 주로 노자 사상의 철학적 의미를 설명하였다. 왕필 시대의 지식인들은 『노자』, 『장자』, 『주역』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이때의 사상을 삼현학(三玄學) 또는 위진현학(魏晉玄學)이라고 부른다.
마왕퇴 백서 『노자』는 2가지가 호남성 장사에 한나라 초기(BC 168)에 매장된 귀족의 무덤에서 1973년 발굴되었다. 빠른 시기(BC 20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을 갑본(甲本), 후기(BC 180년 이전)의 것을 을본(乙本)이라고 한다. 『마왕퇴의 귀부인』(일빛)에 발굴 과정과 유물, 백서 『노자』에 대해 상세히 나와 있다. 2007년 5월 23일부터 8월 26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중국국보전’이 열리고 있다. 여기에 마왕퇴 진품 유물 7점이 전시되어 있다.
곽점 초간 『노자』는 1993년 호북성 곽점촌의 전국시대 초(楚)나라 무덤(BC 300년 이전)에서 발굴되었다. 크기가 다른 3조(組)의 죽간에 현행본 『노자』의 2/5 정도 분량이 실려 있다.
마왕퇴 백서 『노자』와 곽점 초간 『노자』로 인해 현행본 『노자』에서 의문이었던 많은 부분이 해결되었으나, 아직도 노자와 『노자』책의 성립에 대한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이씨는 책에서 백서 『노자』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 이씨는 백서 『노자』를 보지 못했다.
14) 이씨 사기 수법의 예는 이외에도 많다. 여기서 이씨의 수법이 예술적 경지에 이른 예를 보자. 다음 부분은『노자』4장의 끝 부분이다.
‘吾不知誰之者, 象帝之先.’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나는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상제象帝보다는 먼저 일 것이다. (이경숙 번역)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다. 최고신보다도 앞서 있는 것 같다. (일반적 번역)
번역은 비슷하다. 여기서 먼저 이씨의 말을 들어 보자.
“여기서 노자가 말한 ‘상제象帝’의 의미는 그 해석이 분분한데,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이유는 ‘제帝’라는 글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제帝’는 ‘임금 제’, ‘하느님 제’라는 뜻의 글자다. 천제天帝나 상제上帝는 바로 하느님과 비슷한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가 이 상제象帝를 그와 비슷한 의미로 파악하여왔다. 그러나 신이라는 의미와 ‘코끼리 상象’자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이 또한 많은 노장학자의 고민이기도 했다. 나도 이 말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노자가 ‘상象’이란 글자를 신이나 하느님의 의미로 사용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노자는 글을 애매하거나 불명확하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만약 이 ‘상象’자가 어떤 신의 이름이라면 노자는 그것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다음 구절을 반드시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힌트는 도덕경 전체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단어일까? 내가 내린 결론은 노자는 이 ‘상象’자를 ‘코끼리 상’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형상形象’이라 할 때의 ‘상象’으로 쓴 것이다. 이때의 자의字意는 ‘꼴’ 혹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뒤의 ‘제帝’는 어떤 뜻인가? 신이다. 그러니깐 ‘상제象帝’는 ‘물신物神’인 것이다. 즉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의 근원’을 말한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현상계現象界와 그것을 유지하는 법칙,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물리적인 법칙 또는 세계를 ‘상제象帝’라 한 것이다. 그래서 노자의 말뜻을 ‘도라는 것은 현상계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다’고 이해하면 거의 정확할 것이다.” (이)
‘상제(象帝)’라고 붙여 읽는 이씨의 설명은 유치한 코메디와 사기가 혼합된 무지의 결정판이다. ‘상제(象帝)’라는 말 때문에 고민한 노장학자는 아무도 없고, 여기의 ‘상(象)’자가 코끼리를 가리킨다고 생각한 사람도 없다. 게다가 이씨는 ‘상제(象帝)’가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물리적인 법칙 또는 세계’라며 뭔가 아는 척을 한다. 그러나 다 틀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帝)’는 중국 고대의 최고신, ‘상(象)’은 ‘~인 것 같다, ~으로 보인다’는 뜻으로 푼다. ‘상(象)’은 동사다. ‘제(帝)’는 원래 상(商)나라의 부족신이었으나, 상나라가 천하를 지배하게 되자 최고신이 된 것이다.
‘상(象)’자는 보통 ’코끼리 상, 모양 상‘이라고 훈을 단다. ‘상(象)’자는 코끼리의 뼈다귀 화석 모양이다. ‘象’자를 왼쪽으로 90도 돌려 보면 코끼리의 뼈 화석이 보인다. 이것에서 살아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짐작한 데서 ‘모양 상’이라는 뜻이 생긴 것이다. 여기서는 ‘상(象)’자가 동사로 품사 활용되어 ‘같을 사(似), 같을 여(如), 같을 약(若)‘자의 뜻으로 쓴 것이다. 노자는 ‘도(道)’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최고 신’보다 우선한다고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여간 이런 이씨의 수준은 한문 읽는 사람에게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한문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이 되는 것 같겠지만...
15) 2000년 이상 지난 현대 중국어에서도 ‘可以(커이)’는 ‘~할 수 있다’, ‘~해도 좋다’는 뜻으로 쓴다.
16) 『노자』 50장 처음에 ‘출생입사 出生入死’라는 문장이 있다. 보통 ‘사람은 나오면 살고, 들어가면 죽는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어디에서 나오고, 어디로 들어간다는 것인가? 『장자 』「지북유」편에 이런 말이 있다.
‘生也死之徒, 死也生之始. 孰知其紀.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 故萬物一也... 故曰, 通天下一氣耳, 聖人故貴一.’
생야사지도, 사야생지시. 숙지기기. 인지생, 기지취야. 취즉위생, 산즉위사. 약사생위도, 오우하환. 고만물일야... 고왈, 통천하일기이, 성인고귀일.
‘삶은 죽음과 같은 무리이고, 죽음은 삶이 시작되는 곳이지만 누가 그 법칙을 알겠는가? 우리의 삶은 기가 모인 것이다. 기가 모이면 살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 죽음과 삶을 같은 무리로 여긴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만물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통틀어 하나의 기일 뿐이고, 성인은 하나를 귀히 여긴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대어로도 ‘출생出生’은 태어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많은 한자어가 『노자』에 근거를 두고 있다.
17) 『노자』 70장에 이런 말이 있다.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오언심이지, 심이행; 천하막능지, 막능행.
‘나의 말은 매우 알아듣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도, 천하가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잘 행하지도 못한다.‘ (이경숙 번역)
‘天下莫能知(천하막능지)’의 이씨 번역은 좀 어색해도 뜻은 맞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구절이 ‘天下莫能臣也(천하막능신야)’와 같은 구조인데 이씨의 번역은 생판 다르다는 것이다. (어조사 ‘야’자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18) 『노자』 20장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20장 전체의 뜻과 무관하므로 일부만 인용한다.
‘荒兮, 其未央哉! 황혜, 기미앙재!’
(하지만 나는) 혼란하여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경숙 번역)
황량함이 끝이 없구나! (일반적 번역)
이씨 번역과 일반적 번역의 차이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한문의 상식에 관한 것이다. ‘앙(央)’자는 보통 ‘가운데 앙’으로 훈을 달지만, 동사로서 ‘다하다, 끝나다’라는 뜻이 있다. ‘다할 진(盡)’과 같은 뜻이다. 이것은 이씨가 좋아하는 옥편만 잘 살펴도 알 수 있다. ‘미앙(未央)’은 부정사인 ‘아니 미(未)’자가 있으므로 ‘다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다’라는 뜻이 된다. ‘미앙未央’이라는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에 한문 읽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인데 이씨만 모른다. 그런데다 이씨는 ‘荒兮, 其未央哉! (황혜, 기미앙재!)’ 라는 말이 노자가 ‘버릴지라, 쓸데없는 구별일 뿐이니!’라고 독백한 것이란다. 좋은 말이기는 한데 『노자』는 불경이 아니다. 게다가 이 말이 위의 이씨 번역과 같은 뜻 이기나 한가?
‘미앙(未央)’하면 잠깐 사이에 생각나는 것만도 몇 가지는 된다.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천하 통일 후 장락궁(長樂宮)과 미앙궁(未央宮)을 지었다. 중국 서안(西安)에 가면 지금도 미앙구(未央區)가 있다. ‘장락미앙(長樂未央)’이라고 쓰여 있는 한대 화상전(畵像塼; 건축에 쓰인 그림그린 벽돌) 유물도 많이 남아 있다. ‘장락미앙(長樂未央)’은 ‘오랜 즐거움이 끝나지 말아라.’는 뜻이다.
『미앙생(未央生)』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명대 이어(李漁)가 쓴 『육포단(肉蒲團)』을 번역한 것이다. ‘옥포단(玉蒲團)’이라는 홍콩 영화로도 만들어 졌다. 국내판 제목은 ‘옥보단’인데 ‘옥보’라는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미앙생은 『금병매(金甁梅)』의 서문경과 맞먹는 호색한이다. 미앙생이라는 이름의 뜻은 ‘색욕이 끝없는 사내’라는 뜻이다. 원래 ‘미앙’은 유교 경전인『시경(詩經)』「소아(小雅) ? 정료(庭燎)」에 나오는 ‘야미앙(夜未央)’에서 따온 고상한(?) 이름이다. 『시경』은 중국 고대 가요집 정도로 생각 된다.
‘夜如何其? 夜未央.’ 야여하기? 야미앙.
밤이 얼마나 되었나? 밤이 아직도 다하지 않았구나!
위 구절은 ‘얼음 위에 댓닢 자리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둔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는 고려 가요 ‘만전춘(滿殿春)’의 구절과 같은 감정의 표현일 것이다.
영화 얘기를 하니 얼마 전에 상영된 공리, 주윤발이 주연한 ‘황후화(皇后花)’가 생각난다. 영화에서 태자로 나오는 대만 가수 주걸륜(周杰倫)이 부른 ‘국화대(菊花臺)’가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데, 이 노래의 후렴 부분에 ‘야미앙(夜未央)’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北風亂夜未央 ?的影子剪不斷’ b?i f?ng lu?n y? w?i y?ng n? de y?ng z? ji?n b? du?n
‘북풍은 어지럽게 불고,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당신의 그림자는 잊을 수 없어요.’
‘徒留我孤單在湖面成雙’ t? li? w? g? d?n z?i h? mi?n ch?ng shu?ng
‘다만 나 홀로 남아 호수 수면위에서 쌍을 이루죠.’
삼국시대 조조(曹操)의 아들로, 위(魏)나라 2대 황제에 오른 조비(曹丕 187~226)가 지은 유명한 칠언시(七言詩)인 ‘연가행(燕歌行)’에도 ‘야미앙(夜未央)’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明月皎皎照我床, 星漢西流夜未央.’ 명월교교조아상, 성한서류야미앙.
‘밝은 달은 교교히 내 침상을 비추고, 은하수 서녘으로 흐르니 밤은 아직 다하지 않았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내가 이런 걸 다 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다. ‘미앙(未央)’이라는 말이 이렇게 구구절절이 설명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뻔한 것도 모르면서 제 맘대로 『노자』를 창작하는 이씨가 한심하다.
19) 고대 중국에서 금(金)은 대체로 청동기를 의미했다. 상(商)나라, 주(周)나라의 청동기 제작 수준은 오늘날 사람들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됐다. 청동(푸른 구리)이라는 말은 그 유물이 녹슨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실제 사용했을 때는 안성 유기와 같이 황금색으로 반짝거렸을 것이다.
20) 마왕퇴 백서 『노자』에는 ‘윤(允)자, 또는 ’태(兌)자로 추정되는 글자로 쓰여 있다.
21) 이씨는 「덕경」 35페이지에서 ‘왕필본은 송나라 이후에 목판으로 인쇄된 극히 조잡한 것만이 남아 전해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조잡한 판본에서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원문이 나올 수 있는가?
22) 이 81장에서도 이씨의 무지와 사기가 심하게 드러난다. 후반부를 보자.
‘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천지도, 이이불해; 성인지도, 위이부쟁.
천지의 도는 이와 같아서 결코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 성인의 도는 언제나 다투지 않는 것에 있다. (이경숙 번역)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해주지만 해를 주지 않는다. 성인의 도는 해주면서도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일반적 번역)
여기서도 이씨는 사기 수법을 발휘한다. 앞 문자의 ‘이(利)’자와 뒤 문장의 ‘위(爲)’자의 번역을 일부러 빼먹은 것이다. 이유가 있다. 이씨는 『노자』에 나오는 ‘위(爲)’자가 대부분 일관성있게 해석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씨는 여기서 그 ‘위(爲)’자 해석의 일관성을 도저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아예 번역에서 빼버린 것이다. ‘위(爲)’자에 대한 이씨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위爲’라는 글자를 주로 ‘꾸민다’는 말로 번역을 하는데, ‘꾸민다’는 말은 비단 속인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일을 꾸미는 것’, ‘도모하는 것’, ‘꾀하는 것’ 등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위爲’ 라는 한자의 의미를 우리말로 옮길 때에 ‘꾸민다’ 이상의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였다.” (「덕경」 p334)
『노자』에서 ‘위(爲)’자는 대부분 ‘할 위, 될 위’라는 일반적 의미로 쓰고, 『노자』 고유의 의미로 쓰기도 하는 것이다. 『노자』3장, 63장에 나오는 ‘위무위(爲無爲)는 ‘무위(無爲)’를 ‘위(爲)’한다는 말이다. ‘무위(無爲)’의 ‘위’가 『노자』 고유의 뜻이고, 앞의 ‘위(爲)’는 일반적인 뜻이다. 성인(聖人)도 ‘무위(無爲)’를 ‘위(爲)’한다.『노자』에서는 같은 한자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쓰이는 경우가 많다.
23) 『노자』에서는 같은 글자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반대의 뜻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노자』55장의 후반부를 보자.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익생왈상, 심사기왈강.
생명에 이로운 것을 상祥이라하고, 마음으로 기를 다스리는 것을 강强이라 한다. (이경숙 번역)
삶에 더 보태는 것을 요상하다 하고, 생각이 기를 부리는 것을 굳었다고 한다. (일반적 번역)
위의 두가지 번역을 비교해 보면 서로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心使氣曰强(심사기왈강)’의 부분만 비교해 보자. 이씨는 ‘마음으로 기를 다스리는 것’을 잘 하는 것이라고 한다. 『노자』52장에 ‘守柔曰强(수유왈강)’이라는 말이 있다. 이씨의 말을 들어 보자. 틀린 이유지만 이씨에게도 이유는 있다.
“앞의 제 52장에서는 ‘수유守柔’를 ‘강强’이라 하고 ‘견소見小’를 ‘명明’이라 했으나, 이 장에서는 ‘심사기心使氣’를 ‘강强’이라 하고 ‘지상’을 ‘명明’이라 부르고 있다. 연결지어 풀어보면 ‘상常을 아는 것’은 ‘작은 것을 보며 사는 삶’과 동격이고, ‘마음으로 기를 부리는 것(心使氣)’은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守柔)’과 같은 말이다.” (이)
이씨는 ‘강(强)’자를 무조건 좋은 의미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런 걸 글자의 동일성과 의미의 동일성을 혼동했다고 하는 것이다. ‘守柔曰强(수유왈강)’의 ‘강’자는 당연히 ‘강하다, 굳세다’라는 좋은 의미이다. ‘수유(守柔)’는 『노자』에서 중요한, 긍정적 덕목이다. 그런데 『노자』에서 ‘부드러울 유(柔)’자의 상대어로서의 ‘강(强)’자는 ‘굳었다, 뻣뻣하다’는 좋지 않은 의미이다. 이것이 ‘心使氣曰强(심사기왈강)’의 ‘강’의 의미이다. 『노자』에서 한자 ‘심(心)’의 뜻은 여러 가지지만, 마음 또는 생각이 ‘기(氣)’를 부리는 것을 도가(道家)에서는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로 ‘심(心)’은 인위에, ‘기(氣)’는 자연(스스로 그러함)에 가깝기 때문이다. 『노자』3장의 ‘허기심, 실기복 (虛其心, 實其腹 ;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워라)’는 말이 그 단적인 예다.
24) 아래 글은 노자 71장의 전문(全文)이다.
‘知不知, 上; 不知知, 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지부지, 상; 부지지,병. 부유병병, 시이불병. 성인불병. 이기병병, 시이불병.
‘아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은 좋은 일인데,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 이런 병은 워낙 흔하기 때문에 병인 줄을 모른다. 성인은 그런 병이 없다. 그것이 병인 줄 알기 때문에 병이 없는 것이다.’ (이경숙 번역)
‘알면서도 아는 것 같지 않은 것이 좋은 것이다.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이 병이다. 무릇 오로지 병을 병으로 알면 병이 되지 않는다. 성인은 병이 없다. 병을 병으로 알므로 병이 없는 것이다.’ (일반적 번역)
이씨는 앞 구절의 ‘병병(病病)’과 뒤 구절의 ‘병병(病病)’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다. 그러면서 앞 구절의 ‘병병’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경숙식 카드 번역법의 결정판이다.
“노자가 ‘병병病病’ 처럼 어떤 글자를 두 개 겹쳐서 써 놓은 것은 뜻으로 읽으려 들지 말고 그림카드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병병’은 병이 흔하고 많다는 것의 노자식 표현이다. 즉 이런 병은 워낙 흔해서 병으로 쳐주지 않는다 혹은 사람들이 병인 줄을 모른다는 말이다. 노자의 고도한 시각 문학적 그림카드 표현술을 알아보지 못하고 저렇게 억지스러운 오역을 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뒤의 ‘성인(聖人)’ 이하 구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똑같은 ‘병병 病病’이지만 이 구절에는 ‘이以’라는 어조사가 있으므로 아의 ‘병’과 뒤의 ‘병’이 문법적으로 연결된다. 앞 구절에서의 두 개의 ‘병’은 문법적으로 선후나 종속의 연결 관계가 없이 두 개가 동격이다. 그러니까 ‘병’이라는 명사 두 개를 겹쳐서 ‘흔한 병’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以’라는 관계사가 두 개의 병을 문법적으로 구속하기 때문에 ‘병을 병이라고 생각하다’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
다 틀린 말이다. 앞 구절의 ‘夫唯病病, 是以不病 (부유병병, 시이불병)’은 잘못 필사되었거나, 후대의 ‘주’가 잘못 삽입된 것이다. 마왕퇴 백서 『노자』에는 이 문장이 아래와 같이 되어있다. 앞 구절에 ‘병병(病病)’이 없는 것이다. 마왕퇴 백서 『노자』가 발굴되기 전에도 『노자』에 여러 번 나오는 ‘夫唯(부유)’의 용법이 여기만 달라서 이런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다.
‘知不知尙矣 不知知病矣 是以不病. 聖人不病也 以其病病也 是以不病’
지부지상의 부지지병의 시이불병 성인불병야 이기병병야 시이불병
마왕퇴 백서 『노자』도 잘못 돼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말하는 이씨는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 이씨는 마왕퇴 『노자』가 어쩌니 하고 말은 해도, 읽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한편 마왕퇴의 백서본이 출현하기 전까지 도덕경의 판본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왕필본과 하상공본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왕퇴의 백서본 출현으로 이 판본 시비는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마왕퇴의 백서본은 왕필과 하상공의 그것보다 거의 4백 년을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덕경」 p35)
25)자기만 ‘노자의 참뜻을 안다’는 이씨의 코메디를 감상해 보자. 다음은 『노자』 67장의 끝 구절이다.
‘天將救之, 以慈衛之.’ 천장구지, 이자위지.
‘자애가 그를 싸고 있으니, 천장이 그를 지킨다.’ (이경숙 번역)
하늘이 사람을 구하려 한다면 자애로움으로 지켜 주는 것이다. (일반적 번역)
아래에 인용한 이씨의 말이 맞다면 정말 이씨는 노자의 환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없다. 아래 글은 이씨 무지의 산물인 코메디다.
“‘천장구지天將救之’를 흔히 ‘하늘이 장차 이를 지켜준다’로 해석하는 책들이 많은데, 여기서 ‘장將’은 ‘장차’라는 뜻으로 쓰인 글자가 아니고 ‘장수 장’이다. 즉 ‘천장天將’은 ‘하늘의 장수’인 것이다. 하늘이 장군과 군대를 보내어 그를 지켜준다는 말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안전할 것이다’는 이야기다. 왜 하늘이 그를 지키고 돕느냐 하면 그 이유는 바로 다음 구절이다. 자애가 둘러싸고 호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장神將들이 둘러싸서 수호하는 자비로운 보살도菩薩道’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자비심이 없는 용기는 죽음을 자초하는 만용이지만, 자애는 하늘이 그를 지켜주므로 세상의 그 어떤 용기보다 더 강력하고 든든하다는 노자의 가르침이다.” (이)
『노자』는 중국 고대의 인격신적 종교관을 극복한 자연주의적 사상이다. 『노자』에 ‘하늘’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대체로 ‘자연(nature)’이라는 뜻이고, ‘하늘이 무엇을 한다’는 등의 표현은 당시 사람의 인식수준에 맞는 일반적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씨는 글에서 미묘한 사기술을 구사한다. 이씨는 “‘천장구지天將救之’를 흔히 ‘하늘이 장차 이를 지켜준다’로 해석하는 책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런 책은 없다. 이씨 글의 ‘하늘이 장차 이를 지켜준다’라는 단순 긍정형 문장과 원 뜻인 ‘하늘이 장차 이를 지켜주려면’이라는 미래형 조건문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이씨의 글에 ‘장차’라는 말이 있지만, 조건문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뒷 문장과 연결이 안 되는 점을 노린 것이다.
‘자애로움’이라는 뜻의 ‘자(慈)’자에 이의가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자(慈)’자가 ‘하늘의 자애’라고 본다. 그 의미는 세상이 혹독한 사회적, 자연적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멀지 않아 다시 균형과 안정으로 되돌아가는 ‘천지(天地)’의 ‘스스로 그러한(自然)’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노자』 23장을 보자.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표풍부종조, 취우부종일. 숙위차자? 천지!
‘강풍은 아침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폭우도 하루 종일 가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하는 것인가? 천지다!’
‘장(將)’자는 노자에 23회나 나오는데 31장의 ‘편장군(偏將軍)’, ‘상장군(上將軍)’외에는 모두 ‘장차 ~하려면’ 또는 ‘~하려 할 경우’와 같은 조동사이다. “‘천장天將’은 ‘하늘의 장수’라는 이씨의 말은 도교(religious Taoism)에서나 가능하다.
26) 이씨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2001.2.24)에서도 ‘시지불견(視之不見)’의 해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이다.
“제일 고심한 부분이다. 기실 이 구절은 동양철학의 핵심을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시가 동사고 불견을 목적어로 보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풀었다.” (이)
27) 이경숙은 2001년 중앙일보에 ‘동양학 읽기’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이때는 이씨가 도가가 무언지, 도교가 무언지 구별을 못했다. 그래서 이씨는 『노자』 대신 선도와 도교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때 칼럼의 일부다.
‘세 개의 철학이란 유불선(儒佛仙)의 삼교(三敎)요... 이 삼교(三敎)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보면 불교는 ’해탈성불(解脫成佛)‘이요, 유교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고, 도교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다. 목표의 지향점으로 볼 때 유교는 현세지향적이고, 불교는 내세지향적이고, 도교는 탈인간지향적 교설이다.’ (중앙일보 2001.3.11)
그런데 이씨는 3년 쯤 지나 『완역 이경숙 도덕경』을 쓸 때는 도교와 도가의 구분은 할 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구별이 너무 지나쳐서 ‘노자의 가르침은 수련, 수행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말까지 한다.
“노자의 말은 오늘날 도교道敎라고 할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선도수련 仙道修鍊’이나 ‘양생법’ 등과는 전혀 관계없는 정치 철학이고 처세론이다. 그런데 이것이 훗날 도교의 경전이 되고, 노자가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서 도교의 조사인 동시에 신격화된 존재로 자리잡음에 따라 도덕경의 해석이 그런 방향으로 비틀어진 탓에 우리가 잘못 배우게 된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은 수련, 수행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인생에서 겪게 되는 우환과 재난, 위험 등은 대부분 정치 사회적인 환경에서 오는 것이며, 섭생적이고 위생적인 질병은 부차적인 것일 수 있다.” (「덕경」 p161)
이씨가 노자의 말이 정치 철학이라고 한 부분은 맞지만, 처세술이라고 한 부분은 틀리다. 이것은 해석의 차이랄 수도 있으므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씨는 다른 데서는 『노자』가 정치철학이라고 한 말은 잊고, 노자가 ‘세상의 변화에 눈을 감고, 집의 문을 닫아걸고, 마음을 오로지 자기 한 몸과 주변 일에나 쏟고 살라’고 했다고 말한다. 이씨는 자기 머릿속 정리부터 해야 한다.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변화를 막아버리면 그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주변의 사소한 일들뿐이다. 천하의 일, 세상의 돌아가는 소식들과 같은 크고 가치롭고 거창한 일들이 아니라 닫아버린 문 안에서 일어나는 극히 일상적이고 주변적이고 개인적인 잡사들만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작은 일들이나 보는 것이 ‘견소見小’이고, 그것이 즉 ‘명明’이다. 그리고 그러한 ‘명’으로 돌아가는 데 빛을 쓰라는 소리다. 여기서의 빛은 모든 문을 닫아건 집 안을 밝히는 빛이고, 사소한 주변 일을 살피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세상의 변화에 눈을 감고, 집의 문을 닫아걸고, 마음을 오로지 자기 한 몸과 주변 일에나 쏟고 산다면 비로소 몸에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덕경」p164)
“천하를 알려고 하기 전에 자신을 알아야 하고, 천하를 얻기보다는 자기를 얻어야 하며, 천하보다 자기를 위하여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노자는 ‘자기 제일주의자’다.” (「덕경」p383)
노자는 ‘자기 제일주의자’가 아니다. 『노자』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의 목적은 ‘천하(天下)’라는 한마디에 있다. 그렇지만 『노자』에는 수련과 수행, 즉 양생(養生)과 관계된 부분도 있다.
28) 내 말은 이경숙의 글로도 증명할 수 있다. 『노자』 43장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희급지.
‘말 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이로움은 천하에 이것에 미칠 만한 것이 없다.’ (이경숙 번역)
‘말없음의 가르침과 함이 없음의 이익됨은 세상 어느 것도 미치지 못한다.’ (일반적 번역)
이씨의 번역과 일반적 번역의 의미는 같다. 그러나 이씨에게는 문제가 있다. 이씨는 이 43장의 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는 도경의 제2장에서 나왔던 말이다. 그리고 ‘무위’ 역시 도경 전편을 통하여 계속 설명해온 것이다. 때문에 이 구절의 주가 거듭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이)
위의 글이 이씨의 해설의 전부이다. 이씨는 『노자』 2장에서 ‘행지교’니 ‘처지사’니 하며 여기와는 완전히 다른 해설을 했다. 그래서 2장과 다르게 해석한 여기서는 더욱 이씨의 ‘주(해설)’가 필요하다. 이씨는 설명하기 곤란하니까 은근슬쩍 넘어간 것이다. /끝
2007.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