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마태오 14:30-31 |
신앙과 믿음의 차이
신앙과 믿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앙이라는 의미의 영어는 faith 로 원래 ‘신뢰’라는 뜻이다. 신앙이란 어떤 사람이나 이상적인 삶에 대한 신뢰이자 충성이다. 그리고 자신이 약속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그것을 지조 있게 지키는 행위가 바로 신앙이다. 신앙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자기성찰과 수양의 과정으로 종교에서는 종종 전례, 의례와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것을 통해서 성장된다.
신앙은 인간의 삶에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이다.
믿음이란 단어는 라틴어로는 credo라고 하는데, 원래 의미는 ‘심장’을 뜻하는 ‘cor’와 ‘우주의 질서에 맞게 배치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dare’의 합성어이다. 크레도는 ‘나는 믿는다’라고 번역되는데, 그 의미를 직역하면 ‘우주의 질서에 맞게 자신의 심장(생각과 정성)을 배치하다’ 라는 뜻이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이 문장은 초월적인 신을 맹목적으로 신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주의 질서를 만든 절대자, 우주의 창조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찾고 내 삶을 그분의 뜻에 따라 배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삶에 대한 신비와 경외심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부단히 설득하고 거기에 맞춘다. ’ 는 뜻이 있는 것이다.
11 세기 철학자였고 신학자였던 켄터베리의 주교 안셀무스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의미는 ‘나는 온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하고 내 삶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다’라는 뜻이다.
안셀무스는 종교의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굉장한 주장들을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라고 허망하게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단순히 ‘내가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렇게 산다면 언젠가 하느님을 이해할 것입니다’ 라고 기도했다. |
현대인의 신앙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어린아이는 태어나면서 생존을 위해 ‘엄마’라는 존재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이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 역시 단순히 지적인 활동으로 한순간에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전하고 완벽한 종교 생활을 지향하고 그 종교의 신화와 의례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대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종교에 대해서 그것은 비과학적이다, 비이성적이라고 말하면서 교리에 담긴 내용을 과학적인 내용,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예를 들면, 기원전 13 세기 경 모세는 당시 이집트에서 떠돌이 생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주 노동자, 히브리인들과 함께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험난한 여행을 시작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치니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이 드러났다고 전한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증명할 수 없다고,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것을 지금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서술이 아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창조 이야기와 아담과 하와 이야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 등이 그렇다.
성경은 ‘신화’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등장하는 이야기와 하느님이 바닷물을 갈라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새로운 민족을 탄생시키려는 통과의례에 관한 이야기다.
혼돈으로 상징되는 물을 바람으로 걷어내 마른 땅이 드러나는 주제는 ‘창세기’의 우주 창조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과월절, 파스카 축제 때의 전례인 ‘세데르’를 통해 이 이집트 탈출의 신화 이야기를 자신들의 삶으로 끌어들여 그 삶에 적용시키려 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이야기를 기록한 책 ‘하가다’에 의하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탈출해 갈대 바다를 건넌 고대 히브리인의 하나로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탈출기 이야기를 의례화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오늘날 그 이야기를 듣는 나 자신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아는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저 위에 혹은 저 아래 누가 아직 존재하는가? 우리는 무한한 허무 안에서 길을 헤매고 있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에 그들은 삶의 의미도 없고, 아우슈비츠, 르완다, 보스니아, 코소보, 우크라이나, 러시아, 미얀마와 같은 우리 시대의 니힐리즘은 신앙을 상실하고 신성함과 거룩함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을 때 생길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불신앙의 시대에 복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
복음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새로운 황제의 시작을 알리는 소식을 ‘복음’이라 불렀다. ‘좋은 소식’이라는 뜻의 복음은 전령을 통해 제국의 땅 끝까지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새로운 황제를 맞았다. 그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시저다. 너의 삶을 고치고 무릎을 꿇어라’라고 전했다.
당시 황제 숭배 사상이 퍼지면서 로마 황제는 ‘구원자’ 또는 ‘주’로 불렸고 정의와 평화, 번영과 축복을 가져온다는 의미로 ‘폰티펙스 맥시무스 Pontifex Maximu’ 즉 ‘대제사장’이라 불렸다. 또한 로마인들은 황제가 사후에 신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전령은 황제의 즉위 소식과 함께 ‘특별 사면장’을 가져갔고, 사면을 기대하지 않았던 죄수들에게 갑작스러운 석방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선포한 내용이 바로 로마시대의 사면장과 같은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촌 세례자 요한이 헤롯에 의해 사형을 당하자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 예수님이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이며, 메시아라 생각하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몰려오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식민지 생활의 절망적인 삶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찾으려는 이 불쌍한 사람들의 눈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목자 없이 길을 헤매는 양과 같은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참수당한 세례자 요한이 생각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들려 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고 계속 곁에 머물며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가 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달려와, 여기는 먹을 것이 없으니,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거의 2만 명 가까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먹일 식량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제자들은 나름대로 먹을 것을 구했지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군중을 자리에 앉히시고 이것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부를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다시 이것을 무리에게 주었습니다. 성경은 그날 있었던 일을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빵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라고 전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가들의 해석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오리게네스라는 인물은 초대 교부이고 신 플라톤주의자였는데 그는 성경은 세 단계 해석을 통해 그 깊은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는 축자적 해석,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둘째는 도덕적 해석, 그리고 마지막이 영적인 해석입니다.
첫째, 축자적 해석은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특히 기적 이야기를 축자 적으로 믿는 것인데 이것은 이단의 해석 방법이라고 폄하했습니다. 둘째, 도덕적 해석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를 염두에 둔 해석입니다. 도덕적 해석은 초보 그리스도인들의 성경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영적인 해석은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해석입니다.
축자적 해석의 예는, 예수님이 축복한 빵을 제자들이 떼어내자 그 빵이 기적적으로 불어나 2만 명을 모두 먹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축자 적으로 믿는 것이 신앙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리게네스의 해석에 의하면 이들은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도덕적 해석의 예는 물고기와 빵을 가져온 사람이 그 음식을 혼자 먹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누었더니 기적이 일어난다는 초보 신앙인들의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행동 강령을 알려주는 도덕적 교훈의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상황에서 가진 자들이 자신의 소유를 타인과 나눌 때 그 사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세 번째 영적인 해석의 예는, 이 이야기가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영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를 스스로 깊이 묵상하라는 요구의 해석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러한 삶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해석은 하느님과의 부단한 대화를 통해 서서히 삶에 내재되는 수련을 통해 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오리게네스는 도덕적 해석을 은유적인 해석이라고 하고 이 은유적 해석은 영적인 해석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정확히 알아내려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각자의 삶 안에서 그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구절의 축자적인 의미를 ‘믿는다’고 단순히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백한 내용을 일상에서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이다.
군중들은 예수님께 더 많은 기적을 요구하였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자 예수님을 제자들을 재촉해 배워 태어 먼저 호수를 건너가게 했다. 제자들도 군중들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돌려보낸 후 다시 기도하시기 위해서 홀로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홀로 산에 올라가 묵상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이 이미 육지에게 꽤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라고 소리를 칩니다.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오리게네스 같으면 글자 그대로 이 문장을 해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를 은유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물이나 바다는 항상 혼돈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혼돈의 세상인 물에 빠지지 말라는 뜻으로, 살아가면서 유혹에 빠지지 말고 도덕적으로 살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유령으로 착각한 제자들에게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 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니,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하고 외쳤다. 파도를 보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베드로를 바다에 빠지게 한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고는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꾸짖으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하느님의 손에 의해서 질서 있게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욕심과 죄로 인해서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혼돈의 세상, 혼란의 세상에서 그 어둠의 혼돈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은 믿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 문장의 의미는 ‘당신은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한 적이 있습니까?’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라고 물으시는 것이고, 그것을 묵상하고 찾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