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속 설화 (韓國民俗 說話) : 개운포~처용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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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9.13. 02:33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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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포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외황룡강 하구에 있는, <처용설화>의 배경이 되는 개운포(開雲浦)와 관련된 전설.
역사
13세기 말에 지어진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랑망해사 조에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 지명은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에 있었던 일에서 연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줄거리
신라 제49대 임금인 헌강왕 때에는 서울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지고 초가라고는 없었다.
길에는 음악과 노래가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 날 임금이 학성(鶴城, 울산시의 옛 지명)의 서남쪽에 있는 포구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하여 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고 말았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 주어 그 마음을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옆에 있던 신하들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걷혔다.
그래서 이 포구의 이름을 개운포라고 하게 되었다.
동해의 용이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 그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그중 한 아들을 서울로 보내 임금의 정사를 돕게 했는데 그가 바로 처용(處容)이다.
분석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처용설화>의 앞부분이다.
<처용설화>는 전체적으로는 문신(門神)인 처용신의 신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이 대목은 개운포의 지명유래전설에 해당한다.
동해 용의 조화로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은 헌강왕이 근처에 절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더니 그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걷혔기 때문에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에서 ‘개운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의
이 대목은 전형적인 지명유래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지명유래전설은 간단한 설명만으로 된 것도 있는데 이 전설은 자체로도 하나의 서사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개운포라는 지명은 신라 헌강왕 때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전형적인 지명유래전설로 <처용설화>와 함께 오늘날에도 지역민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고 있다. 자신들이 사는 곳이 오랜 역사적 유래가 있다는 데 사람들은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이 전설은 <처용설화>를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활용하는 데 장소적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처용설화
신라의 헌강왕(875-886) 시절에는 서울과 지방의 모든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고 초가가 없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또한 사시사철 음악과 노래가 끊이지 않고 바람과 비는 순조로워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태평성대를 누리던 어느 날 대왕이 개운포(開雲浦:지금의 울산)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슨 조화인지 갑자기 들이닥친 구름과 안개 때문에 일행이 모두 길을 잃게 되었다.
여러 관리들이 동분서주 하며 원인을 찾으러 애쓸 때, 날씨를 관장하는 한 관리가 대왕앞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아뢰기를 “소인의 좁은 소견으로 보건대,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용왕을 위로해 주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심이 의심스러웠지만 구름과 안개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형편을 해결하고자 일을 맡은 관원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이곳에 용을 위하여 절을 짓게 하라”고 말을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개와 구름이 눈깜짝 할 사이에 걷히게 되었다.
이후 그곳을 개운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동해의 용은 기뻐하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흥겹게 춤을 추고 연주를 하였다.
용왕은 그 가운데 한 아들을 서울로 보내 정사를 돕게 하였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었다.
대왕은 용왕의 아들이 서울에 오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며 처용의 마음을 잡아두려고 미녀를 아내로 삼게 해 주고, 급간(級干)이라는 벼슬도 주어 서울에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
처용의 아내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한 역신(疫神)이 처용 아내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처용의 집에 가서 처용의 아내와 몰래 잠을 자게 되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분명히 처용의 아내였으나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용은 그것을 보고 춤을 추면서 이 노래만을 부르고 사라졌다.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래 나의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요?”
역신은 처용이 돌아온 것을 알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역신은 처용이 노래와 춤만 추고 화를 내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모습을 나타내어 처용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당신 아내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여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대는 화내지 않으니 그 마음에 감동하였습니다.
맹세코 앞으로는 당신의 얼굴이 있는 그림만 보아도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역신은 조용히 물러났다.
이 일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나쁜 악기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대왕은 서울로 돌아와 바로 영취산(지금의 울산에 있는 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고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는데 대왕이 개운포에서 겪은 일로 용을 위해서 세우게 된 것이다.
[출처] 16. 한국민속 설화 (韓國民俗 說話) : 개운포~처용설화|작성자 조아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