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하면 말이 되었다.
하얀 말과 검은 말이 밥상 위로 지나갔다.
밥과 나물이 말라 갔다. 엄마의 무릎에 식은땀이 맺혔다.
아버지는 했던 말들을 다시 시작했다.
또다시 말이 지나갔다. 하얀 말과 검은 말이 천장에 쌓였다.
검은 구름이 생겼다. 소나기가 내렸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이별을 반복했다.
손에 쥔 숟가락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젓가락은 밥상 위에 질문을 만들었다.
질문은 궁금증이 되었다.
큰 말과 작은 말은 진흙탕이 되었다.
진흙 속으로 푹푹 빠졌다.
말은 빙글빙글 돌았다.
말은 말로 그물을 만들었다.
마른 말과 축축한 말이 이불 위로 지나갔다.
엄마는 솜이불을 탁탁 때리면서 말들을 잡았다.
바늘에 실을 꿰어 한 뼘씩 쑥쑥 잡아당겼다.
입을 닫은 것처럼 단단하게 이불을 붙잡았다.
초록색 이불 위로 엄마의 손은 나비가 되었다.
촘촘하게 날아다니면서 말을 가위로 잘랐다.
말은 크게 소리를 낼 때 힘이 생겼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어갔다.
아버지는 말로 엄마를 쿡쿡 찔렀다.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린처럼 목이 길어졌다.
밥상에서 귀를 닫고 보았다.
하얀 말과 검은 말이 겹쳐진 얼룩말이 뛰어다녔다.
시사사 봄호 2023 신인추천작품상
심사평
김혜정의 시는 오랜 공력이 느껴지는 수사와 세심한 정서의 결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시인은 무엇보다 언어에 민감해야 한다. 김혜정은 일상의 말과 상징의 말을 중첩시켜 뛰어다니는 말의 이미지로 치환한다. <얼룩말은 가정의 일상적 폭력에 노출된 말의 소용을 다양한 삶의 세목을 통해 변주하고 있다> ."하얀 말"과 "검은 말", "큰 말"과 "작은 말", "마른 말"과 "축축한 말은 우리의 시쳇말이면서 또한 폭력의 상징어이기도 하다. 말들이 일으키는 감정의 파장을 뛰어다니는 말의 역동성을 통해 형상화하고 이를 얼룩말의 이미지로 결합시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전개이다.
술/ 이인철
나는 아부지를 마신다
어릴 적, 내게 들이댄 면도칼
등을 내리치던 가죽혁대
마시고 죽으라고 건네준 파리약 병
나는 그 아부지를 마신다
잔 속에서도
번득이는 살기
덜그럭거리는 독사의 이빨
술을 마실 때마다
술이 나를 마실 때마다
지금도, 나는 아부지를 조금씩 마신다
입안에 남은 쓴 파리약 냄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병 밑바닥의
아부지를 마신다
시집 r회색 병동J (작가세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