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의 혼을 불러 / 백봉기
하루해가 지려면 아직도 2~3시간은 있어야할 무렵에 금강하구둑에 도착했다. 입춘이 지났지만 소매 속으로 파고드는 바닷바람은 초겨울만큼이나 차가웠다. 금강하구둑은 금강과 서해가 만나고 전라도와 충청도 사람이 만나는 장소로, 군산시가 근처를 개발하여 백릉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곳에 채만식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채만식문학관을 세웠다. 이곳에 문학관을 세운 이유는 소설 ‘탁류’의 배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금강이고, 금강을 끼고 자리 잡은 군산이기 때문이다. 도착하자마자 갯벌이 속살까지 드러낸, 에두르고 휘돌아 강이 다다른 곳 황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설 속의 금강은 예나 지금이나 탁했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방향은 서서남으로 빗밋이 충청, 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까지 휩쓸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 너비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는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이렇게 시작하는 ‘탁류’는 1937년 12월부터 5개월간 조선일보에 연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소설은 초봉이라는 여인의 삶을 통해 거칠고 탁한 일제강점기에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인간사를 통하여 사회현실을 비판한 소설이다.
내가 처음 탁류를 만난 것은 1998년 초여름이었다.「특별기획 2부작 - 채만식의 탁류, 그 흐름의 근원을 찾아서」라는 방송을 기획하면서였다. 내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채만식의 생가와 무덤이 있는 군산시 임피면. 생가는 이곳이 채만식의 생가라는 안내판이 있었을 뿐 다른 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채로 비집고 들어갔더니 농촌에서는 보기 드문 한옥에 제법 큰 정원이 있고, 입구 쪽으로 깊은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니 대단한 부잣집이었던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조장이었지만 지금은 신 씨 가족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취산리 계남마을! 선생님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솔숲에서는 한가로이 산새들이 울고 있었다. 산지기를 따라 올라간 산등성이, 역시 선생님이 좋아하셨던 이름 모를 들꽃들이 군데군데 피어있고,
소나무들로 아담하게 둘려 쌓인 양지바른 터에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작가 백릉 채만식 선생의 묘” 문득 선생님의 유언이 생각났다. “내가 죽거들랑 보통 상여를 쓰지 말고, 화장을 하되 널 위에 누이고, 그 위에 들꽃을 가득 덮은 후 활활 태워다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한마디가 60년 세월 저 편에서 되살아나는 듯 다가왔다.
경건한 마음으로 무덤을 둘러보고 되돌아서려는 순간, 비석아래 돌멩이 밑으로 보일 듯 말듯하게 숨겨져 있는 메모지, 수첩에서 아무렇게나 뜯어낸 종이에 적힌 글이 우리 취재진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경북 안동에서 선생님 뵙고 싶어. 이렇게 달려왔는데,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 그만 우세요. 이제 안동으로 돌아갑니다. 김은숙 드림」
멀리 안동에서 채만식 선생의 문학 혼을 만나러온 어느 문학도가 남기고 간 글이 빛바랜 체 돌멩이 밑에 눌러있었다. 그때 나는 ‘선생님! 그만 우세요!’ 라고 쓴 글귀가 주는 의미가 궁금했었다. 사실 채만식 선생님의 묘비는 훼손되고 무덤은 두 번이나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었다.
선생님을 뵙고 난 다음날 우리는 선생의 가족이 살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로 갔다. 칠순의 아들 채계열 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다녀왔다는데도 선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평생 질병과 싸워야했던 고독했던 아버지였다고, 그리고 남아있는 유품과 앞으로의 계획, 가족들의 생활고 등을 솔직히 말해 주었다. 아버지의 유품을 기증해 달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길 내 곧 문학관이 건립될 터니 잘 보관하라는 것과 저작권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들을 만난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채만식 선생의 딸을 만나러 안산으로 갔다. 사실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비구니가 된 채만식의 외동딸이었다. 솔직히 무슨 사연이 있었길 내 사찰로 들어갔는지 궁금했었다. 산 밑에 자리 잡은 조그만 암자, 세상을 등지고 절로 들어간 딸은 아픔이 많은 여인이었다. 두 번을 찾아갔지만 결국 카메라에 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다만 단둘이 잠깐 나눈 대화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힘겹게 살아왔던 과거사와 지금 두 오빠들(둘째부인의 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에 한 오빠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뇌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다른 오빠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채만식 선생의 며느리와 손자가족들을 군산으로 초대하여 군산지역 문인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는 빠른 시일에 문학관을 지어야 한다는 것과 선생님 서거 50주년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리고 다음날 월명공원에 세워진 문학비를 둘러보고 도선장에서 객선을 타고 당시 청년 채만식이 온 몸으로 느꼈던 그 탁류! 금강의 탁류를 거슬러 장항까지 다녀왔다.
12년 전, 취재 속에서 만난 채만식 선생을 문학관에서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취재 당시는 문학관이 없었음) 그의 길지 않은 생애, 가난과 고독, 질병과 싸우며 참으로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간 채만식 선생님, 목숨 줄을 이어주던 약 한 병보다 원고용지 한 권에 더 집착하고 매달렸던 선생님!
운명하실 때까지 사과궤짝 위에서 붓을 놓지 못했던 솟아오르는 그의 예술혼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이 땅에 거듭거듭 태어나리라. 12년 만에 만난 선생님! 백릉 채만식의 탁류의 혼을 다시 부르기 위해 멀리 경기도며 서울로 헤맸던 나의 젊은 시절의 열정을 당신은 알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