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7 페이지에 이르는 묵직한 책자다.
《모던 타임스》 《창조자들》 《르네상스》 등으로 국내에도 친숙한 영국의 역사가 폴 존슨이 2천 년 기독교의 전체 역사를 특유의 객관적이고도 명석한 필치로 그려낸 책 《기독교의 역사》가 포이에마에서 출간되었다. 지난 2005년 살림출판사에서 '2천 년 동안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세 권으로 분책해 냈던 것을, 같은 번역을 사용해 편집과 교정을 보완하여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폴 존슨의 《기독교의 역사》는 방대한 자료를 아우르는 20여 년의 연구 끝에 나온 저작으로, 기독교의 역사를 다룬 단권 저작으로서는 가장 냉철하면서도 포괄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책으로 손꼽힌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역사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원서가 출간된 지 30년이 지나도록 기독교인을 넘어 역사학도와 고급 인문 독자들에게도 널리 사랑받는 걸작이다.
# 기독교는 인류에게 무엇이었나? 인류 문화사의 맥락에서 본 기독교
기존의 기독교사 혹은 교회사 책은 신학자의 저술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것도 특정 종파, 교파의 입장에서 교회 제도나 신학, 교리사의 흐름을 기술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역사》는 복잡다단한 기독교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인류 문화사의 맥락에서 접근해 서술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인류 역사의 장면 하나하나에서 기독교가 인류와 어떤 만남을 가졌는지를 추적한다. 저자 자신은 가톨릭 교인이지만, 가톨릭에 편향됨 없이 관점과 내용에서 공정함을 견지하면서 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르는 폭넓은 서술의 묘를 보여준다. 때문에 독자는 기독교의 출현에서부터 이단과 이교 틈바구니에서의 투쟁, 그리고 유럽의 주류 종교가 되고 인류 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준 세계 종교로 자리하기까지의 과정 전반을 고지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기독교 없는 인류는 생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가 만들어낸 문화의 기세가 주춤해진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제공했던 역동성으로부터 대학살과 고문, 편협성과 파괴적 교만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역동성이 없었다면 지난 2천여 년의 역사가 훨씬 더 무시무시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기독교가 인류를 안전하거나 행복하게 혹은 위엄 있게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무엇보다 기독교는 인류에게 ‘희망’을 주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문명화하는 동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실질적인 자유를 엿보게 하고 합리적인 존재를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845쪽).
# 편견 없이, 역사가의 엄정한 시선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이 책의 미덕은 진실만을 추구하려는 저자의 노력이다. 오랜 세월을 비판적 저널리스트로 활약한 인물답게 폴 존슨은 외부의 평가나 검열을 의식하지 않고 기독교의 공과를 자유롭게 서술한다. 이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진리 위에 선 종교로서, 기독교인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다른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저자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기독교의 실패와 단점, 그리고 기독교 제도의 왜곡된 점들을 포함해, 종래의 교회사 책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을 풍부하게 담을 수 있었다. 결론부의 서술에서와 같이 이 책은 기독교가 지닌 잠재력과 역동성, 그리고 서양 세계의 형성에 끼친 긍정적 영향을 보여주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유럽 사회는 본질적으로 기독교가 창조해낸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바로 이처럼 영성과 역동성이 탁월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유럽의 독특한 힘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는 형이상학적 문제로 씨름하던 사색가나 신비가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주었으며, 동시에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종교이자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종교이기도 했다. 기독교가 가진 또 하나의 힘은 스스로 교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데 있었다. …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는 … 성장, 생명력, 이해를 추구했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유럽 사회에 지식과 도덕의 바탕을 제공해주었기에, 유럽은 경제적?기술적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843쪽).
#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 종교가 되었는가? 그리고 미래는?
발생 초기,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지던 기독교는 어떻게 해서 세계의 종교가 되었을까? 역사가로서 저자는 기독교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고 분석하면서, 기독교가 유럽 사회의 구석에까지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당시 눈부신 성장을 구가하던 지중해 문명의 지식인들은 지역 신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삶의 공포로부터 위로와 보호를 약속할 수 있는 유일신앙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이때 전능한 유일신을 믿으며 내세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기독교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성격을 띠고 출발했고,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범세계적 구조로 개편하여 모든 민족의 종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이후 오리게네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작업을 거쳐 유럽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삶의 모든 측면에 파고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급속한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점차 축소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그리고 미래의 기독교는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한때 그토록 강력하고 포괄적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공적 기독교 관념은 기독교를 굳건히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그 생명을 다한 것 같다. 대신 오늘날의 기독교는 사적인 기독교적 지성을 강조하는 에라스무스적 관념과 개별 기독교인이 도덕적 변화를 이루는 능력에 대한 펠라기우스적 강조에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이와 아울러 새로운 사회들이 기독교 세계에 침투하고 있다. 기독교가 서구화라는 껍질을 벗고 신선한 정체성을 형성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844-845쪽).
이 같은 진단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상당히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수용과 발전 과정이 서양과는 사뭇 다른 한국 사회에서조차, 전일적인 기독교 사회를 구성하려는 이념은 퇴조하고, 기독교인 각각의 영적?도덕적 변화와 시민적 책임의 수행이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치며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기독교계의 움직임이 늘고 있는 이즈음, 기독교인은 물론 기독교가 만들어낸 문명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에게 이 책은 놀라운 통찰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