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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너머의 식물을 찾아다니며 남긴 이야기
김용식 / 조경학과
나는 평소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미선나무(Abeliophyllum distichum)나 구상나무(Abies koreana)처럼 분포역(distribution range)이 매우 제한된 우리나라 고유종(endemic species) 보전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식물을 자세히 살펴보다 보면 대부분 중국, 일본, 몽고, 북한 및 러시아 지역과 반드시 견주어야 했다. 1990년대 초까지는 공산국가와의 학술교류는 물론 문헌의 탐색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거기에 당시 전국 의 관련 대학 도서관도 매우 열악한 형편이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93년에 영국의 레딩대학 식물학부와 왕립큐우식물원의 Living Collections Department(LCD) 내 Conservation Planning Development Unit (CPDU)에서 정기적인 방문 연구를 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CPDU는 미선나무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멸종위기식물의 보전을 연구하던 부서였다. 1993년 2월의 어느 날 CPDU의 바로 옆 건물인 Descanso House에 있는 Botanic Gardens Conservation International (BGCI)의 총무로 현재 미국 미주리식물원 총재인 Peter Wyse-Jackson 박사의 쪽지를 받았다. 그 쪽지는 BGCI 총재인 레딩대학 식물학부 Vernon Heywood 교수의 저녁 식사 초대이다. 참석자로는 Vernon Heywood 교수 부부, Peter 및 또 한 사람의 초대 인사로 처음 만나는 모스크바중앙식물원의 Igor Smirnov 박사 등이다.
저녁 식사는 환담까지 포함하여 거의 3시간 정도 즐겼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Igor 박사나 나나 지독한 골초였다는 점이다. 담배값이 매우 비싼 영국이라 들었기에 1년 동안 마음놓고 피울 담배 약 400갑을 경산에서 사가지고 갔을 정도다. Vernon 교수댁의 실내에서는 흡연하기가 거시기하여 몇 차례 정원에 나와 흡연을 즐기면서 Igor 박사와 가까워졌다. 그 짧은 시간에 내 연구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언제 기회가 되면 극동지역의 식물상을 관찰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주 운이 좋았는지 그해 여름에 미국 미시간대학의 Matthaei Botanical Gardens & Nichols Arboretum과 이제는 California Botanic Garden으로 이름을 바꾼 LA의 Rancho Santa Ana Botanic Garden이 참가하는 극동지역의 식물채집에 동참을 약속하였다.
Postdoc 연수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여 곧바로 극동지역의 채집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모스크바의 중앙식물원과 교신하였다. 1993년 8월 4일부터 23일간 일정의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첫 식물채집 여행이다. 이 일정에는 모스크바중앙식물원과 레닌그라드식물원 방문을 위한 3박 4일도 포함되었다.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왕복 항공편은 Aeroplot로 하고, 오가는 길에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일정이었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니 공산국가에 간다는 생각에 내심으로는 겁이 나기도 했다. 승객은 반도 안 찼으며, 한국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내의 승객좌석은 사용하지 않을 때는 군용처럼 완전히 뒤로 젖혀 놓은 매우 특이한 구조였다. 당시 나도 골초였지만, 남자나 여자나 의자에 앉자마자 모두 담배를 피워댔다. 논산훈련소에서 야외훈련 때에 잠시 쉬면서 “담배 1발 장전”하면 전우들이 모두 동시에 피워대 꼭 시골 마을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매우 장관(?)이었다.
모스크바공항에 내려 마중 나온 Igor 박사의 안내로 아파트 모양인 시내의 러시아과학원 숙소에 거처를 잡았다. 다음 날 아침에 모스크바중앙식물원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군모를 쓴 정장 차림의 매우 무뚝뚝한 KGB 요원이 현관에서 외부 출입자를 일일이 체크하였다. 2층의 원장실로 올라가는데, 나무 바닥재가 모두 들떠서 걸을 때마다 싸각싸각 소리가 나서 신경이 쓰였다. 외관이 매우 아름다운 온실은 유리창이 다 깨졌으나 수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직원들은 10시나 11시쯤 출근하여 잡담 후 점심을 먹으면 일은 하는 둥 마는 둥 오후 서너시에 퇴근한다. 당시 식물원 직원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는 듯 느꼈다. 이는 세인트피터스버그식물원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에서 발행하는 “산림과학”에 있는 몇 논문의 복사를 도서관 사서에게 부탁하였다. 극동지방의 채집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아직 윗선의 결재를 다 받지 못해서 복사를 못했다 한다. 그러면서 모아놓은 잡지를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귀국하여 이를 복사판으로 제작하기 위하여 거래하던 복사판 제작업자에게 넘겼는데, 뜻하지 않게 책 모두를 분실하였다.
야간 열차편으로 세인트피터스버그역에 도착하여 식물원과 여름궁전 및 시내를 안내한 남극식물 전문가인 Sergey박사가 자기 집에 점심을 초대하였다. Sergey 박사 집에 가기 전에 들른 슈퍼는 매대가 텅텅 비어있어 살만한 것이 없었다. Sergey 박사와 대화하면서 가만히 보니 부인은 이 집에서 버터, 저 집에서 감자를 얻어와 점심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어린 딸이 있다기에 과자와 음료수만 잔뜩 샀는데, 일부를 후식으로 내놓는다. 꽤 유명한 식물학자임에도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머물던 모스크바의 러시아과학원 숙소는 불편함은 없었지만, 구내식당에 가면 서비스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은 듯 하나같이 곰처럼 무뚝뚝하였다. 모든 음식은 앉은뱅이 저울로 무게를 달아 값을 매겨서 팔았다. 아무리 비싼 음식을 선택해도 모두 합해봐야 당시 우리 돈으로 150~200원 정도였다. 모스크바로 돌아와 과학원 숙소에 머물 때의 일이다. 하루는 몇 분 늦게 구내식당에 갔는데, 시간이 지났다고 먹을 수 없다 하여 그대로 굶었다. 생각할수록 매우 야속한 직원이었다. 하루는 혼자 시내의 공원에 가고 싶다 하니 소개하여 주었다. 숙소에서 지하철로 약 20여 개 역을 지나는 거리이다. 혼자서 타보는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큰 모험이었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고 모든 역 이름이 러시아로만 되어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목적지에 가는 동안 온통 신경을 곤두세워 진땀이 날 정도였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으나 평양의 지하철도 깊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아주 깊어서 인상적이었다.
미국 식물원팀과 합류하여 안내 목적인 모스크바중앙식물원의 여직원 2명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이 길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인 극동지역의 식물채집이라 생각한다. 공항에 도착하니 러시아과학원 식물화학연구소 블라디보스톡지부의 Peter Gorovoy 교수가 마중을 나왔다. 블라디보스톡의 첫 인상은 울창한 숲속의 도시이나 매연이 아주 심하고, 돌아다니는 승용차의 대부분이 일본어 표기가 대부분이었다. “일본회사들이 벌써 이렇게 많이 진출했는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일본에서 대부분의 중고차를 수입한 것이었다. 몇 년 후에 방문하였던 캄차카반도에서는 서울역에서 수유리 가는 시내버스도 보았다. Gorovoy 교수는 주 전공이 식물의 성분분석이나 현장에서는 걸어 다니는 식물 사전이었다. 이듬해에 영남대학에 초청하여 며칠 묵는 동안 가야산국립공원의 방문과 함께 조경학과에서 특강을 하였다.
러시아에 오기 전에 날짜와 시간 별로 작성한 러시아에서의 식물채집계획서를 받았다. 그러나 채집 첫날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아침 8시 정각에 호텔 로비에서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온다는 차는 소식이 없다. 연락할 수 있는 수단도 없다. 약 3시간 후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주 명랑하고 태연한 얼굴로 기사가 차를 몰고 왔다. 채집 여행 중에 보니 시간약속만 잘 지키지 않았지 항상 긍정적이었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내내 매우 시끄럽기는 하였지만, 주변의 상황은 전혀 고려함이 없이 아주 높은 볼륨으로 러시아 음악을 틀어 놓았다. 옛 소련 시절 러시아 록 음악의 전설이었던 Victor Choi의 음악도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더할 수 없이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푸틴 대통령이 외국의 원수를 접대 시 상습적(?)으로 지각한다고 하는데, 이는 푸틴 만이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깊은 산속에서 하는 식물채집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엽총을 들고 앞장서던 엽사만 아니라면 이렇게 자연스럽고 평화스러운 모습은 없을 것이다. 어쩌다 만나는 이곳저곳의 푸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남, 선녀들이었다. 자연성이 고이 간직되어 있는 극동 러시아의 숲은 우리에게는 생태적 잣대와 같은 곳이다. 몇 년 전에 가리왕산에 동계올림픽 스키장 건설이 큰 사회 또는 환경 이슈였을 때에 산림청 주관의 “스키장 부지 선정 위원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어느 날 평창군 대화에서 산림청 소속 헬리콥터 2대에 나누어 타고 가리왕산 상공을 돌아보았다. 눈 아래 보이는 가리왕산의 숲은 수종은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 극동지역의 원시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매우 인상적인 숲이었다. 이런 곳에 겨우 한번 사용할 동계올림픽 스키장을 만든다니 아무리 설득해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곳을 끝으로 우리나라에서 괜찮은 숲을 보는 것은 마지막이라 여겼다. 며칠 전에 우연히 다큐 필름을 보는 중에 한 유명한 연예인이 가리왕산의 가치는 염두에 두지 않고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 보는 석양이 정말 아름다웠다라는 말을 듣고, 자연의 몰이해에 가슴이 아팠다.
신갈나무가 우점인 채집지의 숲은 오랫동안 쌓인 낙엽에 발목 깊숙이 빠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왠지 징그럽기 그지없는 크나큰 뱀들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채집하는 동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크기의 호랑이 발자국은 여러 차례 보았다. 인적이 없고 때 묻지 않은 대자연 속에서 이 식물 저 식물을 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행복한 때도 없었지만, 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댓가를 치러야 했다. 해가 뜨면서부터 질 때까지 쉼 없이 지칠 줄 모르고 귀찮게 하는 날파리와 모기와의 싸움도 잊을 수 없다. 야외에서 점심 식사하면서 완전히 타의로 알게 모르게 이들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모기에 물린 상처는 처음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만, 지참한 모기 퇴치제는 뿌려도 곧 약효가 떨어지기에 결국에는 모기에게 내 몸을 헌납한 체 이내 체념상태에 빠진다. 다만 우리 주변의 개울가나 습지에 흔한 양귀비과에 속하는 애기똥풀(Chelidonium majus var. asiaticum)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애기똥풀 줄기에서 분비하는 노랑 즙을 모기 물린 상처에 바르면 이내 통증이 없이 쉽게 치유된다. 산속에서 지내다 보면 모기와 날파리뿐만 아니라, 피부 속까지 뚫고 들어오는 진드기는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야외 채집 전에 블라디보스톡의 한 병원에서 예방주사를 맞기는 하였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따라서 진드기 관리(?)는 숲에서 나오면 항상 철저히 점검해야 하는 일상사였다. 한밤중에 허리 부분이 가려워서 불을 켜고 보면 기어다니는 진드기가 있어 잡아내기도 했다. 어느 날 밤중에는 일행의 귀에 나방이 들어가 꺼내지 못하여 시골병원으로 갔다. 병원 진찰실의 처음 느낌은 꼭 도살장에 온 느낌처럼 규모는 꽤 컸지만, 의료 장비나 의사는 투박하였고, 장비는 비위생적이었다.
지금은 말끔히 포장되었다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국경도시인 두만강의 하싼까지는 자동차로 5시간 거리였다. 두만강 하류에 가는 길에 두만강 철교를 잠시 구경하기로 했다. 아주 쉽게 생각했는데, 외국인이 섞여 있어서 모스크바 외무성 승인이 필요하단다. 거의 3시간을 기다려 검문 후 두만강 철교에 접근하였다. 다리의 중간지점이 국경으로, 북한 쪽만 무장 경비병이 왔다 갔다 한다. 두만강 건너 북한 쪽의 숲은 보잘 것이 없었다.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한번은 어린아이 세끼 손가락 굵기만한 산삼을 채집하였다. 채집한 산삼은 식물표본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일행은 수염뿌리를 조금 잘라 맛보았다. 지금까지 인삼을 꽤 많이 먹었지만, 입안에 퍼지던 산삼의 강한 향기를 잊을 수 없다. 흔히 음식점에서 맛보는 산양삼은 그에 비하면 산삼도 아니다. 우수리 지역의 야생 산삼도 그 가치를 아는 중국인들의 불법 남획으로 야생 개체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하였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의 이창복 교수님이 쓰신 “대한식물도감”에는 있지만, 남한지역에서는 희귀한 식물이 이곳에는 아주 흔하다. 키가 낮게 자라는 눈잣나무(Pinus pumila)는 시베리아나 북해도의 대설산 또는 캄차카반도 등이 주 본거지인데,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다 설악산 대청봉에 걸렸으니, 대청봉의 눈잣나무 야생 개체군은 생태적, 형태적 또는 유전적 가치를 다시 보아야 한다. 우수리지방에서는 잡초에 불과하나, 대구 화원의 까치봉이나 청송 주왕산까지 분포하는 깽깽이풀(Jeffersonia dubia)도 가장 남쪽에 살고 있기에 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하루의 채집을 마치면 식물을 모두 정리해야 해서 저녁 식사는 항상 늦다. 늦다라는 의미는 밤 9시나 10시쯤에 식사를 한다는 뜻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항상 사우나와 보드카를 즐겼고, 더 흥이 날 때면 아주 자연스럽게 노래와 춤으로 이어졌다. 야외에서 준비하는 점심 식사라도 이미 준비한 우리나라의 시멘트 포대 같은 종이에 넣고 다니는 목침같은 빵과 버터를 자르고, 주변의 나무를 잘라 주전자에 물만 끓이면 되는 대도 항상 두 세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좋았던 점은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야생 식용버섯의 다양함과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러시아과학원에서 실험 중인 여러 수종의 열매와 수피(tree bark)로 담은 보드카도 잊을 수 없다. 중국에 10대 명주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각종 열매와 수피로 담은 보드카의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내 보기에 러시아 사람들은 술, 담배와 노래를 매우 좋아한다. 술과 담배 인심은 결코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 못지않았다. 이러다 보니 밤 1시나 2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들곤 하였다. 러시아에 갈 때에는 담배를 따로 사가지 않았는데, 막상 러시아에 가보니 필터담배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지역의 상점에서 군대시절 피운 화랑 담배처럼 필터 없는 담배를 사서 피워야 했다. 채집여행 중에는 전혀 몰랐는데, 귀국해 보니 치아가 온통 검댕이를 묻혀 놓은 것 같아서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하였다. 아마 필터 없는 담배와 석회가 함유된 식수를 계속 마셨기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한번은 자갈을 깔아놓은 비포장길을 달리다가 바퀴에 튄 돌이 앞자리에 앉은 내 쪽의 차창을 가격하여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금이 갔다. 우리가 채집하는 동안 말끔하게(?) 수리해온 차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시 유리를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자리는 목재로 처리하고 유리 대신 사용한 비닐이 바람에 날려 찢기지 않도록 테이프로 여기저기 붙여 수리를 해온 것이었다.
채집여행 중 수집한 식물표본은 다 말리지 못했고 러시아에서 반출 문제도 복잡했기에 러시아과학원에서 별도로 보내 주기로 약속하였다. 한번은 왕립큐우식물원에서 체재 중 부산 세관의 연락을 받았다. 러시아과학원 소속 배편으로 식물표본을 가지고 왔으니 인수하라고 하였다. 지금 런던에 있기에 대리인이 수령할 수 없겠느냐 했더니 안된다기에 그들은 싣고 온 식물표본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되돌아갔다. 약 반년 후에 다시 러시아과학원 배편으로 왔기에 부산에 가서 직접 수령하였다. 수속 중에 들었던 부산의 식물검역소 직원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멀리 러시아까지 가서 다 말라빠진 나무 이파리를 뭐하려 가지고 와서 귀찮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화가 목까지 올라왔지만, 항의해 보았자 “쇠귀에 경읽기” 같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최일선에 있는 관계 직원이 생물다양성의 의미와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플 뿐이었다.
러시아 채집 여행을 통하여 북한을 포함한 인접국가 간 협력이 필수적임을 더욱 실감하였다. 특히 언어 문제로 접근이 쉽지 않은 보물과 같은 수많은 러시아의 식물문헌은 우리의 식물연구에 구미의 문헌보다 훨씬 훌륭한 자양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조차도 거의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계기로 나는 BGCI에 “동북아지역식물원네트워크(EABGN: East Asia Botanic Gardens Network)” 설립을 제안하였고, 미쓰비시자동차회사의 fund로 오사까에서 창립회의를 가졌음을 매우 보람된 일로 생각한다. 특히 EABGN에 북한과 대만을 합류하게 한 일이 더욱 기뻤다. 극동지역 채집 여행과 관련한 매우 가슴 아픈 이야기를 몇 년 후 Gorovoy 교수가 경산에 방문하였을 때에 들려주었다. 우리 팀은 모든 여행경비를 각자 모스크바중앙식물원의 담당자에게 보냈는데, 블라디보스톡에서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한다. 믿을 수 없는 크나큰 배달 사고가 난 것이다.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서 몸소 경험한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러시아의 자연과 산속의 사람들을 결코 잊을 수 없으며, 이는 내 몸과 마음의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레닌그라드까지 왕복하는 한 객실에 두 명씩 타는 야간열차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는 혼자만 간직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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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귀한 체험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식물을 통해서도 이렇게 많은 나라와 많은 사람이 연결되는구나를 느낍니다. 또 많은 사진은 현장을 그릴 수 있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