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45
허형만 시인
허형만(許炯萬) 시인과 수인사를 나눈 것은 필자가 늦게 등단하고 나서 성춘복 선생이 이끄는 ‘미래시(未來詩-『월간문학』출신 시인들의 동인모임)’에 참석하면서 친분을 가지게되어 지금까지 변함없이 정을 나누고 있다.
당시 ‘미래시-우리는 농담으로 말래시(末來詩)라고도 했다)’는 매월 지방 나들이 시낭송회를 열고 있어서 부산, 목포, 경주, 강릉 등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는데 나도 항상 초청되어 동참하게 되어서 『월간문학』출신 시인들과의 교분은 더욱 두터워졌다.
그가 목포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자주 상경해서 문협과 한국시협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우리 문단과 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 와서도 강의 등의 바쁜 일정 때문에 바로 헤어지는 일이 많았다.
자연은 소재로 쓴 향토적 정서의 시가 한국적 전통의 동일성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송배 시인의 고향의식은 단순한 시적 소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정신으로까지 승화하고 있음을 본다.
허형만 시인은 필자의 제4시집 『黃江』에 대한 서평을 위와 같이 써 주었다. 그는 ‘그동안 많은 평론가 . 시인들이 김송배 시인의 작품 경향에 대해 분석하고 연구해온 것을 감추려보면 순수 서정을 바탕으로 현실과 삶의 고뇌 및 갈등 투영’이라는 요점으로 정리해 준 바도 있었다.
그는 194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순천고교와 중앙대학교 국문학과와 숭전대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에 『월간문학』신인상에 「예맞이」가 당선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문단력으로서는 나보다 선배가 된다. 그후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일상적인 사물을 시작 대상으로 다루되 평범한 언어로 현실 인식과 역사인식의 확충을 꾀하고 있다.(어문각 발행『한국문예사전』에서)’는 그의 작풍(作風)을 알 수 있다.
그는 시집『청명』『풀잎이 하나님에게』『모기장을 걷다』『입맞추기』『이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供草』『진다래 산천』『풀무치는 무기가 없다』『비 잠시 그친 뒤』『영혼의 눈』『첫차』『눈먼 사랑』『그늘이라는 말』과 활판시집『그늘』등이 있으며 시선집『새벽』『따뜻한 그리움』과 중국어 번역시집『許炯萬詩賞析』수필집『오매, 달이 뜨는구나』등이 있다.
이러한 공로로 영랑문학상과 심연수문학상, 월간문학동리상, 한성기문학상, 광주문화예술대상, 전남도문화상, 순천문학상 그리고 한국시협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그는 연구서로『시와 역사인식』『오늘의 젊은 시인 읽기』『문병란연구』『영랑 김윤식 연구』등 많은 저서를 펴냈다.
나이가 들면서 젊은 시절보다 더 긍정적이고 행복한 생각으로 고맙게 살아가노라니 시 또한 그렇게 내 안으로 파고들어 나로 하여금 삶과 언어에 대한 명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세 가지의 신비를 깨달았다. 첫째는 빛과 소리의 신비요, 둘째는 만남의 신비요, 셋째는 은총의 신비다. 나의 시와 삶 속에서 깨달아 얻어진 이 세 가지 신비로 나는 보이는 것만 읽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무자서(無字書)을 읽고, 들리는 것만 듣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무현금(無弦琴)을 들으며 시를 쓰고자 한다.
그는 언젠가 내가 지도하는 청송시인회에 초청되어 ‘체험과 주제’에 대한 특강을 해서 참석자들로부터 갈채를 받은 바 있는데 위와 같이 ‘무자서(無字書)’와 ‘무현금(無弦琴)’에 대한 논지에 감동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무자서(無字書)’와 ‘무현금(無弦琴)’의 경지를 섭렵하면서 그는 그런 생각으로 쓴 작품 중 한 편이 이탈리아 오페라 맹인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듣고 명상 끝에 쓴 「영혼의 눈」이라고 한다.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 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냄새와 물 냄새를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 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절창(絶唱)이다. ‘영혼의 눈’이라는 관념에서 추출해낸 ‘체험과 주제’인 그날 특강의 결론적인 작품이다. ‘눈먼 가수의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라는 그의 상상력은 우리 시의 묘미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서가 바로 ‘영혼의 눈’임을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인이 시를 쓴다는 말은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다. 시 한 편에 목숨을 건다는 것, 그래서 말을 잊은 지 오래, 오로지 내 안의 나를 찾기 위해 노모와 누이가 있는 지리산 깊은 곳에 들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언어를 위해 창끝을 세워야 할 나의 시정신은 아직도 갑옷 한 벌 갖추지 못했다’고 시집『그늘이라는 말』‘시인의 말’에서 겸손을 토로하고 있다.
1980년대 초 우리들은 목포시내 어느 포장마차에서 미래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공식적인 행사를 모두 끝내고 몇몇이 시내 구경 겸 일잔을 위해 거리를 배회하다가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회포를 풀고 있었는데 나를 잠간만 이곳을 지키고 있라는 전갈을 남기고 그들은 사라졌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충 주대를 계산하고 그들의 행방을 찾아 나섰으나 묘연할 뿐, 밤 길거리에서 헤매고 있는데 우리들 행방을 찾아 나선 동료를 만나서 함께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디들 갔냐고 물어도 묵묵부답-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그들은 이상한 호객행위에 이끌려 들어갔다가 흠뻑 바가지만 쓰고 왔다는 것이었다.
산길의 안개는 슬픔의 무게로 어깨를 누른다 / 안심하면 한두 피씩 떨구어주던 굴참나무도 / 어깨가 무거웠던지 순식간에 무더기로 털어낸다 / 나얼굴을 스치며 떨어지는 나뭇잎이 말한다 /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때가 되었으니 때를 / 알아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 그것이 곧 적멸의 길이거니 저 안개 속 / 어딘가에 나의 영혼이 편히 쉴 집이 있을 것이다(「해인사 가는 길」전문)
허형만 시인은 국립목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고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도 역임했다. 그는 퇴임 후 목포, 광주, 순천 등지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경기도 성남시로 아예 이사를 왔다. 아마도 모방송국 기자인 아들과 가깝게 살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서울생활보다는 고향 순천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한 주에 몇 번씩 오르내리면서 고향을 위한 작은 봉사와 더불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베풀고 있어서 인생의 진미를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