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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탑골공원 내 원각사지탑(국보 2호).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이 왕명으로 창건했다. 효령대군은 절에서 술과 고기를 먹는 형 양녕대군 때문에 마음 고생을 했다
조선 전기 문신인 이륙이 펴낸 잡록집 청파극담은 고려 말, 조선 초 유명 인물의 행적과 세태, 복식 등을 서술한다. 조선시대에 여자 치과의사가 존재했다. 조선사람들은 벌레가 먹어 충치가 생긴다고 여겼다.
"내가 젊었을 때 제주도에 사는 가씨란 사람을 본 일이 있다. 사대부 집에 드나들면서 치충을 잘 잡아냈다. 그 후 같은 제주도의 계집종 장덕이 가씨에게서 술법을 배웠다. ~ (장덕은) 대낮에 침으로 핏줄을 찔러 벌레를 잡아냈고 병도 조금씩 나았다. ~ 일찍이 대궐에 들어가 이를 치료하여 효험이 있었다. 혜민서 여의로 삼고 나이 어린 여의 몇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기술을 배우게 하였으나 끝내 전한 사람이 없었다. 다만 장덕의 집에서 심부름하던 옥매라는 종이 주인 사후에 그 기술을 모두 알아 또한 혜민서에 소속하게 되었다."
수의사도 등장한다. 윤중년은 말의 병을 치료하는 마의(말의사)였지만 사람에게도 명의였다. 그중에서도 안과 전문이었다.
"윤중년은 의술이 매우 정묘했고 눈을 고치는 데도 신묘하였다. 그는 '대체로 말이 병나는 것은 사람과 다름이 없다. ~ 나는 눈을 가지고 눈을 고치므로 백 번 약을 써도 낫지 않는 적이 없다. 제비는 항상 하늘을 날아 다니면서 온갖 벌레를 잡아 먹이로 한다. (벌레의) 살은 벌써 소화가 되어도 눈만은 소화가 안 된다. 나는 제비 똥을 많이 구하여 냇물에 일면 더러운 찌꺼기는 모두 없어지고 눈만 남으나 하루에 얻는 양이라곤 아주 조금이다. 이를 갈아 약에 타서 앓는 눈에 넣으면 자연히 신묘한 효과가 있다' 하였다."
▲ 원각사지탑 상세
청주공항 근처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에 유명한 약수가 있다. 천연탄산수가 샘솟는 초정약수다.
"서원(西原·청주의 옛 지명)에 초수(椒水·호초, 즉 후추 맛이 나는 물)가 있다. 내(저자 이륙)가 안찰사가 되어 살펴보니 물이 땅속으로부터 솟아나오는데 아주 차고 맛이 쓰다. 뱀이나 개구리가 뛰어들기만 하면 곧 죽는다. 세종이 만년에 안질이 있어서 행궁을 지어놓고 행차하고는 눈을 씻었다. 여러 날이 지나자 효험이 있었다. 그곳의 목사 박효성을 당상관에 임명하였다. 어떤 늙은 농사꾼이 언덕 위에서 잠이 들어 귓가에 은은히 군마의 소리가 들리기에 일어나 보니 평지에서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달려가 사또에게 고하여 소문이 널리 퍼졌다. 불로 끓이면 맛이 없고 독도 없으며 가려움증 같은 병은 이 물로 씻기만 하면 바로 나았다. 하류에 있는 수십 이랑의 논에 이 물을 대니 땅이 매우 비옥해졌다."
요즘은 덥수룩한 수염이 남성미를 상징하지만 조선시대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목은 이색의 증손자인 좌찬성 이파(1434~1486)는 수염이 너무 많아 놀림을 받았다.
"이파는 스스로 풍채로서 당세에 제일이라 하였으나 얼굴 위에 수염이 있으므로 공을 희롱하는 자가 '윤길생(尹吉生)과 비슷하다' 하였다. 이파는 이 말을 매우 싫어하였으니 윤이 험상궂은 얼굴에 수염이 많기 때문이었다."
윤길생은 명나라 태감인 윤봉의 조카로 윤봉의 요청에 의해 사절단으로 중국에 간 것으로 실록에 엿보인다.
▲ 조반 초상.
중국에서 성장했던 조반은 귀국해 정2품 벼슬에 올랐지만 중국에 두고 온 여인을 평생 잊지 못했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책에는 유명 인물과 기녀 등 여성의 일화가 유독 많다. 조선 태조 때 정2품 참찬문하부사를 지낸 조반(1341~1401)은 중국 전문가로 조선 개국 초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성립에 큰 기여를 했다. 조반은 고모가 원나라 승상 탈탈의 부인이어서 어릴 때부터 고모 댁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정치개혁을 추진하던 탈탈이 탄핵돼 유배지에서 처형되면서 운명이 바뀐다.
조반은 수행원 1명과 고려로 도망쳐야 했다. 그는 중국에서 교제하던 미모의 여성이 있었다. 조반은 이 여인을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수행원이 "숨어서 달아나야 하는 판국에 사람들 눈에 띄는 미인을 동행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대했다.
조반은 누각에서 이별을 전하고 길을 떠났지만 여인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인을 데려오라고 수행원에게 지시해 수행원이 누각에 가보니 안타깝게도 여인은 이미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뒤였다. 팔찌를 빼 조반에게 전하니 통곡하면서 거의 기절했다.
"본국에 돌아와 아내를 얻어 아들 5~6명을 낳았다. 모두 높은 지위에 올라 공훈 있는 재상에 이르렀다. 공은 그 미인을 오히려 종신토록 생각하여 기일을 만나기만 하면 늘 눈물을 흘리며 제사 지냈다."
세종 때 무인인 김효성은 야인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워 그 공로로 병조판서를 지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한 계유정난에도 적극 협력해 정난공신 1등에 봉해졌다. 무인 기질이 강했던 그는 못 말리는 호색한이었다.
"김효성은 사랑하는 계집이 많았고 부인도 질투가 대단히 심했다. 어느 날 공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부인 곁에 검은색 모시 한 필이 있는 것을 보고 '이 검은 베는 어디다 쓸 것이길래 부인 자리 곁에 놓았소' 하고 물으니 부인은 정색을 하고 '당신이 여러 첩한테 빠져서 친 마누라를 원수같이 대하시므로 저는 결연히 중이 될 마음을 먹고 이것을 물들여 왔습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내가 여색을 좋아하여 기생, 여의사로부터 양가의 사람, 천한 사람, 코머리(관기의 우두머리, 주모), 바느질하는 종 할 것 없이 얼굴이 곱기만 하면 꼭 사통하여 왔으나 여승은 아직도 한 번도 가까이 해본 적이 없소. 부인이 여승이 되는 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오' 하니 부인은 말 한마디 못하고 손으로 승복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 어린 기생(대한제국). 청파극담에는 사대부와 기생의 일화가 다수 소개한다./사진=부산시립박물관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지방 수령들이 민생에 힘써도 모자랄 판에 어이없게도 기생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인다. 유씨 성을 가진 임천(林川·부여)군수가 늙은 나이에도 기생을 관아로 불러들여 가까이 했다. 성씨 성의 충청수사(수군절도사)가 이 소식을 전해듣고 기생을 빼앗기 위해 임천으로 행차했다.
동헌에 들어서면서 기생의 안부부터 물으니 모두들 "병들어 죽게 됐다"고 대답했다. 수사는 몽둥이를 들고 아전들을 위협하자 기생이 남루한 모습으로 수사 앞에 섰다. 수사가 명해 기생을 깨끗하게 단장하게 하니 과연 미모가 여러 기생 중 으뜸이었다. 크게 만족한 수사는 기생을 데리고 수영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기생을 빼앗겨 화가 잔뜩 난 군수는 관노를 보내 기생에게 "너희 어머니가 죽었으니 돌아오라"고 거짓으로 전하게 했다. 그러자 기생은 웃으며 수사에게 말했다.
"저의 어머니는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비록 관아에 있었으나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군수가 볼 때마다 마음이 놀랍고 끔찍했던 차에 수사께서 인연을 맺어 고통을 면하게 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은인이십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교로 삼았지만 전기만 해도 왕실에서 불교를 믿었다. 심지어 세종대왕의 중형 효령대군은 스님이 됐다. 효령대군은 안하무인인 백형 양녕대군으로 인해 속을 썩였다. 효령대군이 법회를 열고 있는 절을 양녕대군이 찾았다.
"양녕이 수하 10여 명과 매를 팔 위에 얹고 개를 끌고 가니 방울 소리가 계곡에 울렸다. 절에 도착하여 불상이 있는 옆자리에 매를 놓아두고 꿩을 잡아 불에 구워 절간에서 술을 마시니 그의 방자하고 거리낌 없음을 효령은 몹시 못마땅히 여기고 안색을 변하여 말하기를 '형님은 어찌 절에서 이렇게 무례하십니까. 앞으로 있을 화가 두렵지도 않습니까' 하니 양녕대군은 크게 웃으며 '태어나서는 임금의 형이 되어 온 나라가 존경하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되어 세상이 받들 것이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복이 있는데 내가 어찌 두려워할 게 있을까' 하였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불도가 높은 고승들도 천대받았다. 세조대의 승려인 자비수좌(慈悲首座)는 헐벗은 자를 만나면 자기가 옷을 벗어주고 관청이나 사찰에서 매 맞는 자가 있느면 대신해 맞았다. 사람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너라고 했다.
"자비가 원각사에 있을 때 큰 불사가 있어 종친들과 재상들이 일시에 다 모였다. 자비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홍윤성(계유정난 공신)에게 말하기를 '너는 지금 귀하게 되었구나' 하니 윤성이 무례하다 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쳤다. 자비는 웃으면서 '홍윤성은 나를 때리지 말라. 아프다. 아프다' 하였다."
홍윤성은 성격이 포악했고 사람도 여럿 죽였지만 세조는 처벌하지 않았다. 자비수좌는 판중추부사(종1품) 이석형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지만 이름을 잊었다. 아- 이석형 씨로구나"라고 말해 주위 승려들을 당혹하게 했다.
북방의 4군 6진을 개척해 한반도 국경을 확정 지은 최윤덕(1376~1445)은 무장으로서 좌의정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맹장이면서 백성의 고충을 이해해 주는 목민관이었다.
"최윤덕이 평안도도절제사와 판안주목사를 겸하였을 때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청사 뒤의 빈 땅을 갈고 참외를 심어 손수 김을 매고 있었다. 소송하러 온 사람이 그인 줄 모르고 '공이 지금 어디 계신가'라고 묻자 공이 속여 '다른 곳에 계십니다'라고 말하고는 몰래 들어와 관복으로 갈아입고 판결을 하였다. 또 어떤 시골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호랑이가 저의 남편을 물어 죽였습니다'라고 호소하니 공이 '내 너의 원수를 갚겠다' 하고는 호랑이의 자취를 밟아 손수 쏘아 죽였다. 배를 갈라 남편의 뼈와 살과 사지를 끌어내어 옷에 싸고 관을 준비하여 매장하니 부인이 감격하여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온 고을 사람들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을 부모와 같이 사모하고 있다."
성종 때 활약한 도화서 화원 최경은 천한 신분인데도 임금의 생부를 그린 공로로 당상의 벼슬을 받았다.
"화공 최경은 나이 70여 세가 되었어도 눈이 밝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일찍이 덕종대왕의 초상을 그리니 임금(성종)께서 보고 사모하다가 경을 만나 특별한 은총을 내려 당상의 직책을 제수했다. 그러나 언관들이 반발해 정지되었다. 경은 사람됨이 경박하여 당시의 문벌 재상은 모두 절친한 친척이라 하였다. 상당부원군 한명회 공이 두 번째 임금의 장인이 되어 권세가 세상을 뒤엎을 만하니 경은 상당형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조정의 선비가 경을 칭할 때에 족장이라 하니 경은 크게 기뻐하며 그 말을 따랐다."
▶이륙(1438~1498) = 호는 청파. 1464년(세조 10) 별시문과에 장원했다. 경기도 관찰사, 병조·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정조사, 부고사로 2차례 다녀왔다. 성종실록 편수에 참여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