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토탄을 쌓아 불을 붙인 다음 , 말했다.
“ 모린이 7시 반에 당신을 데리러 올 거예요. ”
그녀는 내 곁을 지나 현관 밖으로 빠져 나갔다.
예상치 못한 행운에 기뻐하며 , 시계를 힐끔 쳐다보니 외출하기까지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외출했던 것이 벌써 몇 주 전의 일이었기에 , 나는 이 기회를 완전히 활용할 계획이었다.
정확히 저녁 7시 반에 모린이 도착했다.
그녀도 나처럼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고 ,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머릿 수건을 핸드백에 넣어 놓고 있었는데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모린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차는 대문 앞에 주차되어 있었고 , 아이들은 성당에 갈 때 입는 가장 멋진 옷으로 차려입은 상태였다.
나는 브랜던 , 새넌 , 브리짓과 인사를 나눈 뒤 ,
함께 마을로 출발했다.
두 마을 사이에 위치한 성당는 흰 색의 큰 건물로 , 수십대의 차량과 자전거에 둘러 싸여 있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마을에는 펍만 네 군데 있었는데 ,
두세 개의 마을 사이에 성당은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브랜던이 주차를 하고 , 다른 사람들은 모두 차에서 내렸다.
나는 아이들 뒤에 줄을 서서 매의 눈으로 모린을 지켜 보았다.
나는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고 , 작은 마을의 아일랜드식 가톨릭 미사에는 그들 만의 특징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제대로 행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해가며 , 이들을 잘 따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성당의 한 모습
모린과 브랜던 , 그리고 두 딸아이는 성당 입구에 놓인 성수에 손가락을 넣어 적신 다음 ,
이마 위로 성호를 그렸다.
나도 그들을 똑같이 따라 했다.
그녀는 이웃 주민들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며 , 통로를 걸어갔다.
부모님을 발견한 모린은 그들 옆자리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나 역시 그들 곁에 자리를 잡았다.
오툴 부인은 몇 좌석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는데 , 깔끔한 꽃무늬 원피스에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성당 미사에 참석한 오툴 부인
발에는 장화 대신 스타킹과 튼튼해 보이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녀가 평소 머리에 둘렀던 스카프를 벗자 , 흰 머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밝은 갈색의 머리가 드러 났다.
오툴 부인은 10 년은 더 젊어 보였다.
오툴 부인을 보려고 애쓰던 나는 모린 가족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서둘러 그들을 따라 무릎을 꿇었지만 ,
딱딱한 나무 장쾌틀에 무릎이 닿자 마자 , 모린 가족이 금방 다시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감고 있던 눈을 떠 통로 건너편을 슬쩍 쳐다보니 , 두 가족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미소를 지었고 , 그들도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이후 그들이 고개를 숙이자 , 나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 마을에 머무는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듯 했다.
모린은 손에 묵주를 들고 있었는데 ,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모든 사람이 모린처럼 묵주를 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얼른 핸드백을 열어 외할머니가 사용하시던 묵주를 꺼냈다.
외할머니는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셨고 , (이후에 개신교로 개종하셨다)
돌아가시면서 , 나에게 묵주를 물려 주셨다.
외할머니는 일곱 명의 형제 자매들과 농장에서 함께 자랐는데 ,
외할머니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
아버지는 술을 지나치게 많이 드셨다고 한다.
다른 형제 자매들 역시 모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지만 , 외할머니는 92세까지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외할머니는 내가 살면서 만나 본 훌륭한 사람들 중 한 분이셨다.
외할머니는 좋은 유머 감각의 소유자에 , 사랑을 실천하셨고 , 관대한 성격을 지니셨던 데다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은 일절 하지 않으셨다.
열심히 일했던 우리 외할머니
나는 그런 외할머니늘 사랑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 나는 매일 밤 외할머니의 플라스틱 묵주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묵주 기도로 성모송을 바치는 법은 몰랐지만 , 묵주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외할머니와의 추억에 빠져 있던 나는 오르간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부님이 제단에 들어서자 , 모든 신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마디 말로 신부님이 미사를 시작하자 , 신자들이 응답했다
미사 책이 제공 되어 있었지만 , 신자 모두가 그 내용을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 내게 익숙한 연합 교회 예배가 떠올랐다.
하지만 미사에서는 찬송가 대신 의례적인 응답을 한다는 점이 달랐다.
또 다른 점은 예수 보다 성모 마리아에게 더 많은 기도를 한다는 점이었다.
개신교에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성모 마리아를 포함하는게
기독교의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의 균형을 맞추는데 더 나은 것 같았다.
신부님은 별다른 특색 없이 평범했지만 , 그 교구에는 딱 맞아 보였다.
보수적인 성향의 중년 신부님은 미사의 진행 방식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으며
성경 구절에 충실했다.
헌금 시간이 끝나고 , 미사의 마지막 부분인 영성체 시간이 되었다.
나는 영성체를 받고 싶었지만 ,
내가 개신교인 것을 알면 신부님이 반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신부님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 속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
나는 영성체를 모시려는 마음이 그런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일어서서 영성체를 모시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나는 영성체를 나누어주는 신부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사람들이 영성체를 모시기 전에 성호를 긋는 모습을 보았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 나도 그들처럼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눈을 감고 사랑을 위해 기도했고 ,
내가 모든 의식 있는 존재들에게 더 잘 봉사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렇다.
영성체를 모시기로 한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
아일랜드의 자연 속에서 의식을 치르는 가톨릭 사제
나는 가톨릭과 성당에 관한 경험이 별로 없다.
어렸을적 부터 주변 환경이 개신교로 둘러 싸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당에 관한 기억이라면 기억나는 것이 한가지가 있다.
2015 년 2월에 나는 서울의 불광동 성당에서 공지영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강연 제목은 잘 생각이 나지 않으나 , 대체적으로 강연이 깊이 있고 진실된 것 같았다.
신기했던 점은 이 강연에 참석하기 전에
평소 좋아했던 공지영 작가가 성당에 있는 모습을 꿈에서 보았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 성당에서 강연이 있다고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아마 공지영 작가의 이 강연은 `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 이라는 책을 출간하고서
성당에서 가지게 된 작가의 간증 같은 경험담을 말하는 시간이자
(실제로 담배를 끊게 되었던 기이한 체험을 말해 줌)
책 출간 기념 가톨릭 신자분들과 만나는 자리인 것 같았다.
강연 내용은 대체적으로 이런 것이었다.
고통의 껍질을 조금씩 벗겨가다 보면
고통의 묘미를 느낄 수 있고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 할 수 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