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제 28차 중론 –눈에 대한 분석-
지난시간에 이어 눈과 눈에 보인것과 보는 작용이 모두 실재하지 않음에 대한 논증을 살펴 보았다.
이어서 ‘보는 자 ’역시 실재 않음을 논증한 것을 추구해 보기로 한다.
진정한 눈이기 위해서는 ‘보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럼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
어디에 있는게 아니다. 연기적이다.
어디에도 눈은 없다.
눈이 없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각 대상들에 대해서도 ‘눈에 보인 것’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다.
‘눈’이 존재해야 ‘눈에 보인 것’이 있을 수 있다.
마치 긴 것이 존재해야 짧은 것이 있을 수 있듯이 .. 말이다.
‘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눈에 보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눈에 보인 것’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불교 전문용어로는 ‘눈’을 능견(能見:보는 측)이라 부르고, ‘눈에 보인 것’을 소견(所見:보이는 측)이라고 부른다.
이런 능견과 소견은 바로 연기관계에 있다.(긴막대, 짧은 막대를 생각하면 더 빨리 이해가 될 것이다.)
능견이 없으면 소견이 있을 수 없다. 능견인 ‘눈’이 없으면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책과 컵등을 ‘눈에 보인 것(소견)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눈도 없고, 눈에 보인것도 없다면 양자의 관계인 ‘보는작용’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용수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이렇게 ‘눈’과 ‘눈에 보인 것’과 ‘보는 작용’이 모두 실재하지 않음을 논증한 후 ‘보는 자’ 역시 실재하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눈이 보는 것도 아니고,
눈이 아닌 것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다.
눈에 대한 설명과 같이
보는 자도 이해해야 한다.
눈이 본다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걸 이해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그 어려운 반야심경의 ‘무안이비설신의’를 이해한 것이다.
‘눈이 본다’는 분별은 옳지 않다. 옳다, 그르다 .. 오직 분별이다.
‘눈이 아닌 것’이 본다는 주장도 있을수 있지만, ‘눈이 아닌 것’은 아예 볼 수조차 없다.
귀도 듣는 힘이다. 이 또한 연기한다. '귀'라는 실체는 없다. 연기, 공이다.
‘코 ,혀, 촉, 생각하는 작용, 내용을 떠 올린다‘고 하는 것 모두 이와 마찬가지다. 각각의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별도로 작용하는 각각 존재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각 대상들과 그런 각 작용들이 있기 전에 그런 각 주체들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서로의 관계속에서 연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의 진리를 가르치는 경전인 <반야심경>에서 공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걸 여러분이 이제 이해한 것이다.
중관논리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제3 관육정품에서 ‘눈이 무엇을 본다’는 판단 오류를 지적하는 방식과
제2 관거래품에서 비판되었는 ‘가는 자가 간다’‘비가 내린다‘ 판단에 과정에 오류를 지적하는 방식에서 공통점을 추출해 내는 것이 중관논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바로 흑백논리를 여의는 것이다.
교재의 설명 연기공식, 연기공식의 응용, 제2구 비판 내용을 다시 꼼꼼히 짚어 보면 중관논리는 일종의 테크닉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보다 중관논리의 테크닉을 익히기 위해서는 각 비판되는 과정에 대응시켜 다른 게송들을 이해 하고자 노력하다 보면 익혀질 것이다.
끝없이 노력하시라!!
다시 법성게의 구절로 돌아오자.
구세십세호상즉
: 아홉갈래 온 시간이 그냥 바로 지금이나..
무량한 과거의 세월이 모두 지금의 한 생각에 중첩되어 있으며, 지금 내가 그 어떤 생각을 떠올려도 그 생각은 무한한 과거의 누적으로 형성된 생각이다.
내 전생의 모든 일을 기억하는 숙명통과 다른 생명체의 윤회과정을 직관하는 천안통이 가능한 이유는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고 노래하듯이 지금의 이 순간에 모든 시간대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십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서 더 세분하면 과거의 과거,현재,미래, 현재의 과거,현재,미래, 미래의 과거,현재,미래로 세분되어 9세가 된다. 여기에 지금 이순간의 일념(一念)을 합하여 총 10가지 시간대가 된다.
즉, 9세의 시간대가 지금 이순간의 일념인 십세에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아홉갈래 온 시간이 그냥 바로 지금<구세십세호상즉>이라는 법성게의 가르침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아무리 먼 과거를 떠 올려도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먼먼 미래를 상상해도 그렇게 상상하는 일 자체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난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외의 시간대를 체험한 적이 없다.
과거도 만난 적이 없고, 미래는 만날 수가 없다. 우리가 접하는 것은 항상 현재의 바로 이 순간뿐이다.
이 모든 시간대를 통틀어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능한 시간대, 생생한 시간대가 바로 십세인 것이다.
바로 구세십세호상즉이다.
그러나 더 엄밀히 보면 ‘일념’이라고 부르는 현재의 지금 이 시간 역시 실재하지 않는다.
앞선 시간 중론에서 관거래품 제1게송이 의미하듯이 과거는 지나가서 만난 적이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 만날 수가 없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틈에 끼어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야중관학에서 시간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화엄에서 말하는 완벽한 시간대인 지금 이 순간 9세 전체를 통찰하는 절대적인 시간대인 십세(十世)역시 존재할 수 없겠지만, 십세는 시간의 중첩성을 가르치기 위해 방편으로서 제시하는 최소한의 긍정 표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손가락이라는 말이다.
아비달마교학에서 말하는 찰나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기억을 거슬러 중관에서 찰나연기론을 설명하면서 4연을 말했다.
그 사연설 모두가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하면서, 교재에서는 ‘차제연’을 예로 들었다.
(앞선 수업을 다시 떠올려보자)
이 차제연 이론의 의미로 바로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의 가르침이 등장한다.
부처님께서는 외도들이 주장하는 ‘아뜨만’에 대해서 그런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하셨다.
영원한 아뜨만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부단히 흘러가는 우리 의식의 한 모습일 뿐이다.
삼법인, 사법인을 통해 열반에 이르는 수행의 최종적 완성을 설명하신 것이나 아비달마교학에서는 ‘제행무상의 진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 ‘찰나설’ 을 고안하게 된 것이다.
이 찰라 1/75는 시간의 흐름을 극도로 미세하게 분석할 때 앞 찰나의 마음과 뒤 찰나 마음의 연기 관계가 차제연 관계다.
다시 말해 앞 찰나의 마음을 조건으로 삼아서 간극없이 바로 일어나는 다음 찰나의 마음이 일어날 때 앞 찰나의 마음을 차제연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앞 찰나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서 조건의 역할을 하는지 물을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론을 고안할 수 있다.
1) 앞 찰나의 마음이 존재하면서 조건의 역할을 하여 뒤 찰나의 마음을 발생시킨다.
2) 앞 찰나의 마음이 사라지면서 조건의 역할을 하여 뒤 찰나의 마음을 발생시킨다.
여기서,1)은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 어떤 한 찰나의 마음이 존재하면서 조건의 역할을 하여 바로 다음 찰나의 마음을 발생시킨다면 매 찰나의 마음은 최소한 앞과 뒤의 두 찰나 동안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 앞 찰나의 마음에 대해서는 결과로서 존재해야 하고, 뒤 찰나의 마음에 대해서는 원인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제행무상 이론의 다른 표현인 찰나생멸 이론의 취지에 어긋나고 만다. 그래서
아비달마논사들은 2)의 차제연 이론으로 선택하였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무엇이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일단 존재해야 한다.
앞 찰나의 사건이 소멸하면 다음 찰나의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이렇게 차제연 이론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찰나설은 제행무상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적 효용을 갖는다고 여러번 얘기했다.
즉 제행무상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가르침을, 긍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방편으로서 제시하는 최소한의 입각점인 것이다.
중론의 차제연 비판에서 보듯이 찰나설은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지만, 제행무상의 가르침을 긍정적 표현을 통해 알려주는 방편으로서의 효용을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화엄에서 말하는 지금 이 순간의 일념의 시간대는 제행무상의 토대위에서 절대긍정의 통찰을 노래하기 위한 최소한의 입각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일념’ 모든게 항상하지 않다는 긍정적 통찰을 얘기한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