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5
ㅡ 고구려 여인 '우씨' 두 번 왕후되다.ㅡ
'형사취수'(兄死取嫂)!
"형이 사망하면 그의 아우가 형수를 취한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이 내 중학교 국사시간이었다.
국사선생님 설명에 아이들이 크게 웃으면서 왁자지껄 소란을 피웠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
형사취수제는 '부여'와 '고구려' 전통적인 풍습으로 배웠고 다른 부족국가 풍습(옥저 민며느리제, 고구려 데릴사위제등)들과 함께 국사시험에 자주 출제 되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상당히 불온스럽게 느껴지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서 형사취수제는 가족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형이 죽었을 때, 그 아우가 형수와 결혼함으로써 형이 남긴 형수와 자녀를 계속 돌보고, 가문 재산을 지키고, 가족 대를 끊기지 않게 하는 가족 구성원 간 책임을 다하는 도덕적, 사회적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형사취수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에서부터 시작 되었고 유목민족이나 여러 고대 사회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이 '형사취수제'를 이용해 두 번이나 왕후에 오른 기가막힌 여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고국천왕'과 '산상왕' 부인이었던 '우씨왕후'이다.
최근에 '유투브'를 통해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 '우씨왕후'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tvn'에서 현재 방영 중이라 한다.
솔직히 유투브를 보기 이전에 나는 '우씨왕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유투브에서 우연히 보았고 또 이 글 쓰는 시기와도 딱 맞아 떨어졌다.
유투브를 통해 압축본으로 몇 편 보면서 고구려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을까 했는데 알고보니 '삼국사기'에 우씨왕후 이야기가 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자세한 기록 덕택에 제 손으로 왕을 선택하고 그를 왕위에 올리며 같은 형제와 두 번이나 결혼하여 두 번 왕후 자리에 오르는 우리나라 역사 상 이제껏 보지 못한 주체적이고 자주적 여성 캐릭터가 탄생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우씨왕후'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서기 197년 5월 고국천왕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우씨는 왕의 서거 소식을 숨긴 채 왕제인(고국천왕 바로 아랫동생) '발기'(이름이 쪼게 ㅎㅎ)를 찾아가 후사를 논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후계자로 낙관하고 있었던 것인지 '발기'는 야밤에 찾아온 형수를 철저히 외면했고, 이에 우씨는 다른 동생인 '연우'(고국천왕 둘째동생) 를 찾아갔다. '고발기'와는 달리 "고연우'가 예를 갖추고 우씨를 맞이하자, 연우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씨는 발기를 모함하는 한편 그에게 자신의 호위를 부탁했다.
<이 와중에 우씨를 대접하던 연우가 고기를 썰다가 칼에 베이자 우씨가 치마끈을 풀어 상처를 감싸주었으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왕궁에 돌아왔다.>고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위 내용은 좀 상징적이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 날 바로 동침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나 하는.... 내 응큼한 생각일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씨왕후가 발기에겐 고국천왕의 승하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니 당연히 발기 입장에서는 차기 후계자에 대한 언급 자체가 자기 목숨을 거는 행위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 발기는 왕 후계자에 대한 발언을 그 늦은 저녁에 왕후 우씨가 느닷없이 찾아와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왕조시절엔 왕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자기 목숨 뿐 아니라, 집안 자체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우씨왕후가 자기를 시험한다 여겼거나 미친 여자 취급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론은 '고발기'는 한 순간 잘못된 선택(일반적으로는 아주 올바른 선택이었지만)으로 제대로 발기도 못 해보고 왕위는 날아갔고 자기 목숨마저 잃고 만다.
하지만 우씨왕후는 연우에겐 고국천왕이 승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것도 어느 정도 얘기를 진행하면서 이 사람을 차기 왕으로 삼아야겠다고 판단된 시점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집에 찾아가자마자 바로 알렸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연장자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윗 이야기는 이미 연우와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합의된 상태 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연우 스스로가 왕위에 대해 야심이 있었기에, 고국천왕 생전 왕후 우씨와 어느 정도 연계를 구축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간 덕분에 고발기가 유력했던 고구려의 왕위는 고연우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그가 바로 고구려의 제10대 왕인
'산상왕'이었다.
이때 분노한 '고발기'는 우리가 잘아는 삼국지 중 위나라가 있었던 '동연'으로 도망쳐 그곳의 수장 이었던 '공손도'(삼국지에 나오는 공손찬 집안)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3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빌려 고구려에 쳐들어 왔다.이를 '고발기의 난' 이라 부른다. (우씨왕후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은 그 유명한 '조조 유비 손권'이 맹렬하게 활동했던 삼국시대였다.)
이 고발기의 난을 산상왕 막내 동생이었던 '고계수'가 막아 진압했다. 이후 계수는 형인 발기의 잘못을 꾸짖었고, 결국 왕실과 나라에 큰 위기를 몰고왔다는 죄책감 탓에 발기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위 내용은 한 참 후대인 '연개소문' 아들들에 의해서 똑 같은 행태가 벌어진다. 연개소문 큰아들 '연남생'이 동생들한테 쫒겨나 당으로 도망쳐 당나라 군사들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것이다.
고발기도 고구려를 엄청난 위험에 빠트려 했던 것이다. 동연 공손도가 3만이나 되는 병력을 그냥 빌려 주었을까?
분몀 3만병력 그 이상의 댓가가 약속이 있었을 것이다.
그 뒤 왕위를 차지한 '산상왕'은 우씨 덕에 왕위를 얻은지라 다시 장가를 들지 않고 그대로 우씨를 왕후로 맞아들였다.
이처럼 우씨왕후는 9대 고국천왕, 10대 산상왕 왕후로 두 번 왕후를 지낸다. 그러나 우씨왕후는 산상왕과도 아이를 얻지 못했다.
이 이야기도 삼국사기에 꽤 자세히 나온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산상왕은 후비를 보게되고 그 후비가 낳은 아들이 제 11대 동천왕이 된다. 이 과정 또한 아주 재미있다. 드라마에서는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씨왕후는 동천왕 7년에 사망한다. 나이 70대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고려 때 쓰여진 삼국사기는 '형사취수'에 대한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는지 '우씨왕후'에 대해 호의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씨왕후는 실권을 잡고 고구려 역사에서 선정을 베푼 왕후로 알려져 있다. 우씨는 고국천왕이 사망한 후에도 국정을 돌보고, 자선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백성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한다. 또한, 그녀는 진대법 같은 빈민구제와 같은 사회복지활동 에도 앞장 서 고구려 민생안정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요즘 방영되는 우씨왕후 드라마 초기에서도 '을파소'와 손잡고 '진대법'을 주도적으로 실시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성리학 중심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와서는 우씨왕후를 인륜을 어긴 악녀라는 비난을 받았다. 조선시대 출판된 역사서 '동국통감'에서는 우씨왕후 행위 가 돼지와 다를 바 없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삼국사기'에도 당시 우씨왕후 심정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조- 8년>
[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돌아가셨다. 태후는 임종에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내가 행실이 바르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 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차마 내 시신을 도랑이나 구덩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 마침내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를 지냈다. 무당(巫者)이 말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싸웠다. 내가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도다. 네가 조정에 알려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고구려에는 형사취수의 문화가 남아있었기에 왕후가 시동생과 재혼한 것 자체는 비윤리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설명한다면 그녀 입으로 남긴 유언에서 왜 선왕에 대해 부끄럽다고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유언이야말로 정절의 개념이 조선만큼은 아닐지언정 당대에도 있었고 그녀는 그 개념을 어겼던 것에 대한 사회적 비난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대에 와서는 우씨왕후에 대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한 여성이라는 평가가 많아진 편이다. 요즘 나오는 드라마도 그런 쪽으로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한국 역사상 두 명의 왕을 남편으로 둔 유일한 왕비였고, 심지어 그 왕들 중 한 명은 자신이 세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씨왕후는 고구려사는 물론 한국사에도 눈에 띄는 흔적을 남긴 몇 안 되는 여성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나도 몰랐을 만큼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으로 고구려 10대 산상왕 까지 고구려 전기 상황은 마친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