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와 손녀 종업식/이연희
세 개의 국기가 차례로 오른다. 먼저 태극기가 펄럭이며 허공을 올라간다. 그 아래로 중국의 오성홍기가 조금 더 낮게 또 다른 태극기가 오른다. 1,3위가 대한민국 선수다. 25회 광주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1위 한 강채영 선수의 목에 영광스러운 금빛 메달이 빛난다. 민주광장에 애국가가 힘차게 울려 퍼진다.
국제경기의 시상식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는 평소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이어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강한 울림 속에, 문득 캘거리에 있는 손녀의 한글학교 종업식 날이 떠올랐다.
종업식날, 아이들 웃음소리와 학부모들의 잡담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한 학년의 마지막 날 이어서일까,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설렘과 아쉬움이 함께 녹아 있었다.
“곧 종업식이 시작되니 자리에 앉으십시오.”
손녀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았다. 내빈 축사에 팀별 공연과 시상식까지 두 시간은 너끈히 넘길 듯했다. 식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딱딱한 의자가 벌써 신통찮은 허리를 자극했다.
국민의례가 시작되었다. 애국가가 강당 안에 울려 퍼지자, 허리가 저절로 곧추세워졌다. 깊은 곳에서 뭉클한 무언가가 치솟아 가슴을 가득 채웠다. 목소리보다 먼저 마음이 울컥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따라 부를 수가 없었다. 외국에서 듣는 애국가 가락이 나를 온전한 한국인으로 만들었다. 다른 학부모들도 비슷한 듯했다. 이주민인 그들에게 오랜만에 듣는 애국가가 감정이 더 북받쳐 오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을 꼭 다문 채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생경했다. 익숙한 풍경에서 무언가 빠진 듯 허전했다. 몇몇 아이들은 옆을 보며 눈치를 살폈고, 어떤 아이는 지루하다는 듯 몸을 비비 틀고 있었다. 이어 캐나다 국가인 ‘오 캐나다’가 흘러나왔다. 순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아이들 눈이 반짝거리며 생기가 넘쳤다. 반주에 맞춰 자신만만하게 캐나다 국가를 불렀다. 가슴에 손을 얹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 모습을 보는 부모들의 표정은 어정쩡했다. 그들의 어색한 얼굴에서, 타국에 뿌리내리고 있는 고단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애국가 대신 ‘오 캐나다’를 부르는 아이들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이들에게 애국가는 부모의 나라를 상징하고, ‘오 캐나다’는 자기네의 일상일 것이다. 아마도 손녀는 애국가를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을 테다. 학교에서 자주 접하는 캐나다 국가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것이다. 아이들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 아이들은 한 나라의 사람이 아니라, 두 나라 문화 사이에 서 있는 존재다. 이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이란 조국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현재 생활하는 캐나다가 더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내빈 축사와 교직원 소개가 끝나고 일 년간 갈고닦은 기량을 부모님 앞에 내보이는 순서가 되었다. 아이들이 우리나라 전통악기인 단소로 아리랑을 불었다. 나지막하게 아리랑을 따라 부르는 앞자리 할머니가 자꾸만 눈물을 훔친다. 아리랑의 구슬픈 가락이 인생 고개를 내려가는 할머니 모습 같아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내 몸을 휘감았다.
일정이 끝나고 즐겁게 강당을 나서는 아이들을 보는 마음이 이상하게 복잡했다. 아이들이 양손에 두 나라의 국기(國旗)를 들고 머뭇거리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손녀에게 애국가 한 소절이라도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태어난 손녀에게 '한국의 뿌리'보다 '캐나다의 현재'가 더 중요할 것이다.
시상식날, 민주광장에 울려 퍼진 애국가는 단지 국가를 상징하는 노래만은 아니다. 시상대에 오른 선수가 거쳐온 고난과 인내의 시간이 만들어낸 감동 그 자체다. 애국가는 한국인에게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게 하는 마음의 좌표이며 국민을 하나 되게 이어주는 끈이다. 외국에서 자라는 이민 2세가 애국가 한 소절이라도 마음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애국가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가 國歌임을 알면 좋겠다는 내 마음은 단순한 노파심이런가.
첫댓글 아쉬운 현실입니다. 타국에서 사는 아이들에게 강요를 할 수도 없고....
감동적입니다. 다만 첫머리의 '또 다른 태극기'를 '또하나의 태극기'로 바꾸면 더 좋겠다는 개인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