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이씨가
이만도 李晩燾 관필(觀必),향산(響山)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이다. 1842년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11세손이며, 만화공(晩花公)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이휘준(李彙濬)이며, 이휘철(李彙澈)에게 입양되었다.
이만도(李晩燾)는 23세 되던 1866년(고종 3)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후 홍문관수찬, 사헌부지평, 병조정랑, 공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에 즈음하여 최익현의 상소 운동을 두둔하다 파직되었고, 1894년(고종 31) 사(邪)를 척결하고 정(正)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원을 복설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894년 동학(東學)과 일련의 개혁 정치를 모두 ‘사’로 인식하고 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위정척사 운동은 1895년(고종 32)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안동에 전해지면서 의병을 일으킬 움직임이 일어났다. 안동에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첫 통문은 선성(현 예안면)에서 나왔는데, 1896년 1월 13일 이만응(李晩鷹)·금봉술(琴鳳述)·이만윤(李晩允)을 비롯한 223명의 이름으로 작성되었다.
이 통문을 바탕으로 이만도는 대장이 되고, 이중린(李中麟)을 부장 또는 중군으로 삼아 선성의진을 조직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만도는 이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의 내용은 을사오적을 참하고, 만국공법에 의지해서라도 조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 항쟁을 벌이던 이만도는 1910년 일본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자 단식을 시작하였다. 이는 임금의 신하 된 자로서 적의 백성으로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철저한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이었다.
처음 단식을 시작한 곳은 봉화 재산의 묘막이었으나, 동생 이만규(李晩煃), 아들 이중업, 종손 이강호(李綱鎬)의 간청으로 종가인 율리(栗里) 만화공(晩花公) 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 경찰이 와서 강제로 미음을 떠먹이려 하자, “누가 감히 나를 회유하고 협박하느냐!”라면서 호통을 쳤다. 이만도는 1910년 10월 10일(음 9월 8일)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향산문집(響山文集)』·『청구일기(靑邱日記)』·『향산일기(響山日記)』를 남겼다.
순절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49년 영남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이만도 청구유허비(靑邱遺墟碑)가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 만화공 집터에 있다.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짓고, 백범 김구가 썼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
본명은 이활(李活)이며 개명하기 전의 이름은 이원록(李源祿)·이원삼(李源三)이다. 육사(陸史)는 그의 아호로 대구형무소 수감생활 중 수감번호인 264를 후일 아호로 썼다. 본관은 진보(眞寶).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25년 10대 후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인 원기, 맏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이원록의 필명은 여러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가 있어 기재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李活'과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와 같고 이원록이 '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25년 가을부터 2~3학기 동안 베이징의 공립 중궈대학(中國大學) 사회학과에 입학해 학업 후 중퇴하였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국내로 귀국하였는데 1933년 6월 루쉰을 상하이에서 딱 한 차례 만났다는 연구가 나왔다. 이육사는 루쉰 사후에 신문학 작가 루쉰의 삶을 기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루쉰의 1921년작 초기 단편 소설 《고향》을 한국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핑(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셋째 동생 이원창이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광복 후 1960년 안동시에 이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 강점기 하의 그의 항일 투쟁 활동과 일제 강점기 하의 詩作활동을 기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1990)',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탄신 100주년과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는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 '이육사 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또한 안동시는 안동 강변도로를 '육사로'로 명명하였다.
이원기(李源祺)
본관이 진성(眞城)이고, 자는 수경(壽卿)이며, 호는 일하(一荷)이다. 1899년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으며, 1942년 향년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육사(李陸史)의 맏형이다.
이원기는 1920년 고향인 안동을 떠나 대구시 남산동 662번지로 옮겨 살았다. 여섯 형제의 맏이로 태어나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의 폭탄 폭발 사건인 일명 ‘장진홍 의거’가 일어났을 때 동생 이육사·이원일(李源一)·이원조와 함께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석방되었으며, 이후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살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원일(李源一)
본관이 진성(眞城)이다. 1886년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961년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원일은 1911년 사돈인 일송 김동삼(金東三)과 함께 고향인 안동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여, 같은 해 4월 삼원포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는 등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경학사는 민생과 교육, 즉 경작과 구국 인물 양성을 내세운 단체로 이상룡(李相龍)을 비롯하여 류인식(柳寅植), 김동삼 등 안동 출신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민단적 성격의 항일 자치 단체였다.
1920년 이원일은 흥업단 결성에 참여하여 재무를 담당하면서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힘썼다. 1931년 재만책진회에서 김동삼이 집행위원장을 맡고 이원일은 아성현 주민회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그해 9월 만주사변 발생으로 일본군이 만주로 진출하자 김동삼과 함께 중국 하얼빈으로 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원일은 1932년 3월 1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