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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전국시낭송대회 지정시
가을 바람/ 강상률
문경 새재 넘는 사람아!
가을 들녘에 꿈을 감추고
경건히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을 보라
고난과 역경의 비바람 이겨낸 계절을
말없이 꿋꿋이 견딘 오늘
땀을 식히는 새재 바람 앞에서
저 벼 이삭처럼 조용히 머리 숙여 보라
빈 가슴에 와 닿는
대지의 숨결 머문 부끄러움들
서로 잘난 채 뻐기며
눈을 부라리던 일이나
굳어진 얼굴로
부질없이 마음 상하던 일
모두 가을바람에 날려 보내고
이제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일이다.
문경새재 넘는 사람아!
산바람 넘쳐나는 기운을 보라
런링의 깃발 휘날리는 저 벌판
황금 물결 넘실거리는 번영과 희망이
영순 들에도 새재골 주흘산 자락에도
빈궁한 우리들 가슴속에도
풍성한 결실이 고운 햇살을 타고
가을바람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리라
流轉하는 아버지/ 권운지
긴긴 협곡을 거쳐야 그곳에 닿는다. 폐광의 고요 속에 아버지의 수많은 전생을 만난다. 아버지는 옛집 앞 환한 벚꽃 나무 아래서 나를 향해 웃고 계신다. 검푸른 석탄을 가득 실은 가시랑차가 갱도(坑道)를 나와 아버지와 내 앞을 지나가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그해 여름 땅이 울리고 강물이 붉도록 아버지는 앓았다. 신열을 참으며 긴긴 행렬을 따라가며 돌아보고 돌아보던 아버지를 놓쳤으리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아버지도 수없이 이 길을 찾아왔을 터지만 다리 위에서 어깨를 스쳐도 번번이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를 증언하던 사람들도 모두 떠났으므로 이제 가시랑차와 아버지를 저 아득한 지층 속에 묻노니 끝나지 않는 생의 어느 봄날 검푸른 탄이 된 아버지 가시랑차 타고 오시면 못다 한 이야기 밤새 나누리라.
문경사과/ 노두원
빗장 열어 속살보이는
문경이라 관문에 들면
햇살 받아 맛살 불린 사과를 맛볼게다
순한 햇빛 시린 달빛 밤낮으로 몸을 키운 호사로움
문경에는 속향 깊은 맛깔스런 사과가 있다
휘어진 가지 잡고
꽃잎 따는 여인들이
문경 아리랑 배음으로 애잔히 깔았으니
씨방에는 열애의 격정
살랑이는 봄바람에
결 고운 문경사과 가지가지마다에 눈을 뜬다
검은 구름 천둥소리에 여름이 다 지나도록
수줍어 잎 속에 숨어 크는 풋 사과
이슬로 꿈을 덮고 밤마다 하얀 바람 쐬며
속살 같은 문경사과 탱글탱글 자란다.
깊어진 가을 햇살 얇은 산기슭에
누런 잎사귀 밀치며
수줍게 내미는 빨간 얼굴이여
문경에는 해를 닮은 사과가 있다
임금(林檎)이 능금 되고
능금이 사과 되듯
고사리가 문희 되고
문경이 된 역사의 텃밭에는
꿀맛 짙은 문경사과 영원으로 자란다
술도가가 있는 골목/ 문성해
산사춘 복분자 오가피주 백세주 매실주는 물론이거니와
막걸리 한 병을 마시다가도 그 병을 들어 만든 곳을 확인하는 일
그때마다 나는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오래된 술도가 골목을 더듬더듬 헤매지도 않고 흘러들어가게 된다
산사나무 열매나 복분자 오가피 냄새와
시큼덜큼한 막걸리 냄새가 흘러나오는 그 골목을 찾아들면
누런 냄새 위에 쓰러져 누운 술꾼이 있고
술지게미를 얻어먹고 비틀거리는 개가 있고
뻐끔 열린 솟을대문 안에는 조금쯤 요망한 자세로 누워 깔깔거리는 여자들이 있다
어느새 나는 노란 한되들이 술 주전자를 들고
한모금 두모금 마시며 가는 간 큰 애가 되어
미나리꽝이나 앞산이나 저수지가 타박타박
내 눈 속을 아프지도 않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며
하늘과 땅과 마을과 들판 중에서도 내가 참 크다 하고
돌아앉은 뒷산도 그때만큼은 내 편이란 생각을 하며
이런 술도가가 있는 우리 마을을 내가 참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옆집 새댁이 내는 스란치마 소리처럼
조금쯤 은밀하고
조금쯤 세상에서 붕 떠나 있는
그 술도가 골목을 어린 나는 어미의 품처럼 파고들었으니
지금도 술을 받아놓고 술병을 들고 소재지를 확인하는 나는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어느새 그 많은 술도가를 다 편람한 듯 마음이 화끈해지고
그 골목에서 술꾼들의 오줌을 다 받아먹고 사는 맨드라미 모양
너도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수굿한 고개가 되곤 한다
문경새재를 넘다/ 맹문재
눈발 치는 이 저녁
문경새재를 넘어
묵밥 한 그릇 말아먹고 싶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불알친구인 동석이가
낡은 방문을 열고
점촌店村이란 세상을 찾아 넘었던 길
연둣빛 발걸음이었지만
등 뒤의 어머니와 지게와 보리밥과 그리고 내가 그리워
싸리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았을까
억양 높은 경상도의 사투리를 만나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려다가
다시금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 착하고 못나고 꺼벙한 애송이가 꿈꾼
오붓한 겸상
눈발 치는 이 저녁
그의 등잔불 아래에서
묵밥 한 그릇 나누고 싶다
모전천 산벚나무/ 박영석
해가 뜨면 귀를 여는 산벚나무
아래로 모전천이 흐르고
그 나무 물 쪽으로 구부려 소리 듣는다
사월 중순 물때가 차면
이파리 꽃봉오리 만선의 봄배가 든다
싣고 온 싱싱한 것들 부려놓으면
꼭 비린내 훅 풍기는 어시장 같다
소래포구 구룡포구 또는 수산시장쯤 되리
비린 것은 비린 것끼리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왁자하니 크고 작은 사설 미끄러진다
어깨위로 등으로 하염없는 꽃 비늘
아가미도 가시도 없는 꽃의 편린들
비늘 화륵 모전천으로 뛰어든다
동심원이 마음에 파랑을 일으킨다
하늘이 몽땅 빠져 흐르는 모전천 푸른
물속에 그림자 거꾸로 박고 산벚나무
어디서 저 하얀 구름 한 자락 펼쳤을까?
구름 둥둥 밟으며
괜히 어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
괜히 물고기가 되고 싶은 산벚나무
집 나선 사람들이 잠시 서성이는 곳
햇살은 가끔 비늘을 뒤집다 주저앉는다
문경새재, 오리무중을 헤치다/ 배한봉
제3관문 가까이 이르자 문경새재는
안개의 나라라는 생각,
너럭바위 사이로, 소나무 사이로 새어나오는 안개,
계곡 물소리를 덮치며 흘러나오는 안개,
들은 바, 새재라는 이름에는 여러 유래 있지만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말이
가장 시적이지 않느냐 묻던 김형은
안개 때문에 새들이 더 날기 힘들었을 거라고,
새재할매집에서 곱으로 먹은 점심밥
벌써 소화 다 됐다며, 너스레웃음을 친다.
오솔길에 불과했을 옛 문경새재
도적이 다가와 옆구리 찔러도 길동무와 얼굴 구분 못 했을
그 오리무중 헤쳐 과거장에 도착한 선비는
어떤 답 남겼을까. 안개 세상에서의 길 찾는 법
소백준령 같은 필법으로 써내었을까.
일행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는 동안 김형과 나는
그런 이야기 나누며 아름드리 소나무에 등을 기댄다.
안개가 만든 이쪽과 저쪽 세계의 경계
어떤 걸음으로, 어떤 마음으로 넘을 것인가.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상주의
닭 찾아준 달성판관 같은 이를 떠올리며
짙은 안개 속에서 다시 가야할 길 가늠하는 우리에게
안개 없어도 안개 낀 새재보다 길 찾기 어려운 이 시대,
길 잘 찾아 가라 일러주는 것인가. 이제야
뿌옇게 삼킨 하늘과 비경
햇살과 함께 슬금슬금 풀어내는 문경새재
문경새재에서/ 송택경
백두대간 험준한 조령산 마루
여덟 폭 병풍이 철따라 내걸리고,
오랜 세월의 터를 지키며
말없이 우뚝 선 관문 위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신립장군 목소리가
지나가는 발길을 멈추게 한다.
가파른 새재길 푸른 그늘 위에
긴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오면
산새는 우거진 억새숲에서 속삭이며
잊혀져가는 전설을 정답게 이야기하고,
바람은 또 박달나무숲에서 사각거리며
골골이 얽힌 역사를 꼼꼼히 읽는다.
옛 과거길 굽이돌아 주흘산 혜국사
그윽한 풍경소리 가슴에 파문을 던지고,
깊은 계곡마다 물안개가 조용히 내리면
소쩍새가 들려주는 자장가 소리에
새재는 오늘도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며
설레는 마음 안고 포근히 단잠을 청한다.
문경막사발 연가/ 신동익
호랑이 우렁찬 산마을, 송진내 진동하는
장작과 점토자태粘土瓷胎민요民窯에서 결혼했네
천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아이 막사발.
청자에 밀리고 백자에 누질이고
요강이 밥이 되고, 화분이 밥이 되던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기구한 그 막사발.
귀족적 여성적 온화함 그다 분수 밖
깨끗하고 담백하고 검소함 그도 사치
날마다 씀에 편하고 수더분한 막사발.
쌍둥이로 태어나 권좌에 앉을 만한
남성적 분청사기 족보에 올라도, 너는
꾸미지 않아도 수수한 서민적 막사발.
심봉사 눈을 뜨듯, 소박미의 재발견
한류에 돛 달아라, 신안 앞바다 유물처럼
밥그릇 술잔 찻잔에 그대 바코드, 막사발.
새재의 달빛/ 엄재국
새재에 오면, 달의 뒷면을 걸을 수 있다
달 속을 흐르는 계곡물소리에
서로의 눈빛으로 젖었다가
물속으로 갓 건져낸 달을
단풍잎으로 닦아 가슴에 품을 수 있다
주흘관 옛길 걷는 바람에게
수백 년 전,
그 너머 이야기를 들으며 겪으며
조곡관이 펼치는 하늘, 푸른 담장 위에서
왜병을 온 몸으로 막아서던
조선 병사의 마지막 눈길을 만날 수 있다
그 옛날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등짝과 가슴이 파여지고 헤쳐지던
여기 새재는,
달빛이 알 스는 마을
모여든 발자국에 땅위의 것들이 익고
풀썩이는 흙먼지 붉은 눈빛이
조령관 가슴 속에 붐비는 노래이려니
낮은 몸 발끝으로 순한 길을 펼치는
우리는 다 같이 길 위의 사람들
누구라도
대문 활짝 열어 놓은 달 속의 첫 동네
문경 새재에 오면,
잘 익은 사과를 뚝뚝 따듯
한 광주리 달빛을 담아 갈 수 있다
문경 새재/ 오세영
물어물어 찾아왔다.
짐승도 길을 잃고 새들도 쉬어서
넘는다는 문경
새재,
인생살이 고단타 해도 어찌
길 없는 세상이 있겠느냐
은산철벽銀山鐵壁엔 무지개가 걸리고
절해고도絶海孤島엔 북극성이 뜨는 법.
이 계곡 들어서면 또 다른 계곡
이 봉우리 넘어서면 또 다른 봉우리,
나무에게 물어
메꽃에게 물어
삶의 한 고비를 예서 넘는다.
더듬더듬 오른다.
험하고도 가파른 길,
이 고개 올라서면 기쁜 소식 접할까.
짐승도 날 새도 길을 잃고 헤매는
아,
문경 새재.
문경새재, 높푸른 꿈의 고개/ 유안진
하늘과 땅 사이의 드높은 사이고개
새들도 쉬어 넘은 문경 땅 새재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넘어가고
초립동草笠童이 넘어가고
그이들의 피땀 절은 십년공부가 넘어가서
알성급제謁聖及第가 넘어왔고
장원급제壯元及第가 넘어왔지만
더 많이 넘어온 한숨 눈물 구비 구비
새소리만이 아니다
바람소리만은 더 아니다
넘어야 하는 꿈의 고개가 하도나 높고 험해
꿈도 높푸르러 고갯길이 되었으리니
바라고 소망하는 그 이름이 되었으리니
문경聞慶, 귀하고 아름다워 경사스런 이름대로
발뒷꿈치 발걸음마다 기쁜 소식이 뒤따라와
흰 구름 속 고갯마루 문경새재에는
내 모국어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낭랑 랑.
흙꽃으로 핀 전설/ 윤보영
잃어버린 전설로
아픈 마음을 반죽해서
찻사발을 빚어내는 사기장!
자제할 수 없는 슬픔을
생사기에 덧칠하고
날마다 장작 가마에 태웁니다.
금이 가고
주저앉고
찾을 수 없는 사연에
소리 내어 우는 불꽃!
가마도 따라 울었습니다.
낙엽 한 잎에 담길 듯
무심한 세월은
안타깝게 지나가고
가마 문을 나서는 사발은
깨어집니다.
그립다, 그립다
날 선 사금파리에 세월이 베이고
끊임없는 실패 끝에
손끝으로 감기는 전설!
가마 속에 들어가 꽃을 피웠습니다
정호다완(井戶茶碗)
문경에서 찻사발로 태어났습니다
지지 않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화령쯤에서/ 이기철
황혼의 집들은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산 아래 산이 눕고 길 아래 길이 누워
살아 있는 것들은 나무도 짐승도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문경새재는 밤에도 키가 크고
서로 부대끼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상수리들만
푸름을 놓쳐버린 잎들을 벌려
남쪽 마을을 향해 펄럭인다.
이우출 시조비 제막식에
뇌졸중으로 오지 못한 신동집의 시 한 구절은
우리의 시월을 쓸쓸하게 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수안보 길을 묻지 않고
병든 시인의 안부를 물었다
누가 나에게 신의 모습을 그리라 한다면
나는 산짐승들의 유순한 눈에 비친
저녁놀을 그리겠다.
저녁의 빛깔이 하늘을 데우는 온기로 떠돌 때
숲은 햇빛을 제 몸 속으로 흡수하고
새들을 몸 밖으로 뱉어낸다
사람보다 나무들이 먼저 겨울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이름 모르는 마을의 집들이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이화령쯤에서 아무도 제 슬픔의 빛깔을 채색하지 못할 때
주황색의 깃발을 들어 나는
지상의 추위 타는 것들을 데워주고 싶다.
새재/ 이경림
칠흑의 새재를 넘어 보고야 알았다
한 재가 얼마나 많은 골짜기를 품고 있는지
골짜기들은 또 얼마나 깊은 어둠을 품고 있는지
새들도 넘지 못한다는 재를 칭칭 감으며 낡은 승용차가 위태롭게 내려갈 때
골골의 어둠이 노랗게 언 달을 밀어 올리고
한 치 앞의 벼랑이 시간을 자꾸 헛바퀴 돌릴 때
우리는 생사의 경계 위에 선 아버지를 보았다
온 산에 슬픔이 달빛처럼 번지고 있었다
누구였는지 문득, 넋 없는 사람처럼
재 아래 어른거리는 어린 날을 끄집어냈다
바람나 재 넘어간 옥자 얘기, 구랑리에서 떼죽음 당한 어느 一家의 얘기,
육이오 때, 목숨 걸고 재를 넘겨준 家僕의 얘기며
난리통에 관문 속 어느 골짜기에 묻히신 증조부 얘기를 두서없이 중얼댔지만
두려움보다 재는 높고 슬픔보다 길이 더 휘어
끝내 우리는 말을 잃었다
그러나 누군들 몰랐으리
그 모두 한 재가 토해낸 한숨이라는 걸
그 숨으로 깊어진 골짜기라는 걸
그것이 밀어올린 봉우리라는 걸
무슨 사연들 쏟아부어 새재를 만들었네– 내가 걷는 백두대간 135 / 이성부
곱게 분바른 얼굴 같은 길이다
험한 벼랑 내려오느라 땀 흘린 만큼
이번에는 편안함이 나를 반기는구나
주흘과 부봉*이 힘줄을 세워 굽어보고
주름 가파른 치마바위도 눈이 부시다
저 많은 절박한 생들은 어디로 갔는지
저 한숨들 잠재워 산은 제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새 세상을 찾아 힘들여 넘었다는 길이
오늘은 너무 잘 닦여서
겨울도 햇볕 아래 노닥거리며 간다
활빈당 무리들이 숲에 숨어 눈을 밝히고
허균의 어린 아들 이 고개를 넘어 도망길을 재촉했다
임진년 관군들도 백성들도 의병들도
돌배와 연이*도 이강년*도
이 고개 넘나들며 흙에 피를 보태었다
역사는 비록 지금 관광명소로 남았지만
좌우 숲에서는 느슨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이
내 온몸을 감전처럼 흐른다
* 주흘과 부봉 : 경북 문경시 북쪽에 있는 주흘산과 부봉.
* 돌배와 연이 : 신경림 시인의 장시 「새재」에 나오는 주인공들
* 이강년(1858~1908) : 구한말의 의병대장
달빛을 깨물다/ 이원규
살다보면 자근자근 달빛을 깨물고 싶은 날들이 있다
밤마다 어머니는 이빨 빠진 합죽이였다
양산골 도탄재 너머 지금은
문경석탄박물관과 '연개소문' 촬영지가 된
은성광업소, 육식공룡의 시체 같은 폐석더미에서
버린 탄을 훔치던 수절 삼십 년의 어머니
마대자루 한가득 괴탄을 짊어지고
날마다 도둑년처럼 십 리 도탄재를 넘으며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청상의 어금니가 폐광의 동바리처럼 무너졌다
하루 한 자루에 삼천 원
막내아들의 일 년치 등록금이 되려면
대봉산 위로 떠오르는 저놈의 보름달을
남몰래 열두 번은 꼭꼭 씹어 삼켜야만 했다
봉창 아래 머리 맡의 흰 사발
늦은 밤의 어머니가 틀니를 빼놓고
해소 천식의 곤한 잠에 빠지면
맑은 물속의 환한 틀니가 희푸른 달빛을 깨물고
어머니는 밤새 그 달빛을 오물오물 되새김질하는
이빨 빠진 합죽이가 되었다
어느새 나 또한 죽은 아버지 나이를 넘기며
씹을 만큼 다 씹은 뒤에
아니, 차마 마저 씹지 못하고
할 만큼 다 말한 뒤에 아니, 차마 다 못하고
그예 들어설 나의 틀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어머니의 틀니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장례식 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털신이며 속옷이며 함께 불에 타다가 말았을까
지금도 그대로 무덤 속의 앙다문 입 속에 있을까
누구는 죽은 이의 옷을 입고 사흘을 울었다는데
동짓달 열여드레 날의 지리산
홀로 고향의 무덤을 향해 한 사발의 녹차를 올리는
열 번째 제삿날 밤이 되어서야 보았다
기우는 달의 한쪽을 꽉 물고 있는 어머니의 틀니
그래여↘ 안 그래여↗/ 이인원
해마다 가을걷이 후면
갓 캐낸 따스한 고향소식과 함께
감또개 잔뜩 넣은 찰떡함지를 지고 오던 문경아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새재 너머 저 먼 나라로 떠난지 오래지만
환갑 지나 들인 양자養子 재성이는
어엿한 기관사가 되어 오늘도
서너 량 쯤 이어붙인 귀이개만한 완행열차를 몰고
그래여, 안 그래여로 끝나던
아재의 넉넉한 사투리 사이를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여↘
은성, 봉명, 광업소는 모두 폐광 되었어도
문경이라는 이름은
긴긴 갱도 따라 아직도 무진장 채굴 되어서는
내 귓속
그 비좁고 낡은 레일 위를
기적소리 울리며 매일 진입하고 있다
우리는 문경을 한 발짝도 못 벗어났다
재성아, 안 그래여↗
문경이 고향이라 했다/ 황금찬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날아간다.
집에서 문경새재가 가깝습니까.
방문을 열면
첫 손님으로 찾아 드는 그가
문경새재였지요.
1942년 그 무렵
동경 어느 직장에서 만났던 친구
그의 이름은 권진태
하도 옛날이어서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니
그렇거든 용서 하시라.
나이는 내가 한두 살 위였지.
그 친구는 천재였지
중앙대 법과재학생
그 후 그는 학도병으로
끌려 갔고
나는 성진으로 돌아왔었지.
6.25 피난 때
대구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울며 웃으면서 차를 마셨지
그리곤 지금까지 못 만났네.
친구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말하라
대답하라
문경새재보다도
더 그리운 친구
권진태
내가 부르고 있으니
대답해주시오
그리운 친구
내 이름은 황금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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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좋은시에 푸욱 빠졌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