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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축과 응축의 미적 효과를 하이퍼기법으로 펼쳐낸 감각적 묘사
-김해빈 시인, 작품론
이 오 장 (시인)
시인의 길지 않은 생애를 일부의 작품만으로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금까지의 활동을 한마디로 평한다면 김해빈은 시인이라는 말이 우선 되어도 부족하지 않겠다. 경상남도 창녕군에 위치한 대한민국 제일의 환경보전 구역인 우포늪 인근에서 1958년 1월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우포의 물안개를 보며 기지개 켜고 각종 새와 신기한 식물을 보면서 자라왔다. 소녀는 태생적으로 시인의 기질을 받아 감성을 묘사하는 기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처음에는 자연의 풍광을 그림으로 표현해오다가 자연스럽게 언어의 틀에 들어가 언어를 깨고 나오는 우화의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새에 갇히다』 『원은 시작과 끝이다』 『저녁을 하역하다』 『욱신거리는 계절』 등 4권의 시집을 상재하였고 숱한 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시작 활동의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대시의 창작기법을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기지가 보인다. 김해빈의 이 같은 시 창작법은 현대시의 난해함을 뛰어넘어 이해력과 감성전달에 충실한 본인만의 하이퍼 기질로 보인다. 이것을 처음 발견하여 언급한 문덕수 시인은 두 번째 시집 『원은 시작과 끝이다』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김해빈의 『원은 시작과 끝이다』라는 시집에 대한 내 서문은 불필요의 필요일지도 모른다. 불필요의 필요 이런 아이러니는 언젠가 깨닫게 되겠지만 이미 이 여류는 심중에 다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설하고 그의 시 한 대목을 옮겨본다.
굳은살 박힌 팔십 년
그네에 앉히고
힘껏 굴러본 발판
앞뒤의 거리가 위태롭습니다
뒤로 물러서야 앞으로 나가는
그네의 법칙은
지난날의 고해성사인가요
「어머니의 그네」에서
미당의 “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머언 바다로⁄배를 내어 밀듯이⁄香丹아”라는 「추천사」가 연상된다. 미당의 「추천사」는 내가 애송하는 시지만, 오늘부터는 김해빈의 「어머니의 그네」로 교체해볼까 생각한다. 그러면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아주 내어 밀듯이 香丹아⁄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나를 밀어 올려다오”와 같은 자잘한 낭만적 수식어를 굳이 외우지 않더라도, 김해빈처럼 “뒤로 물러서야 앞으로 나가는⁄그네의 법칙은⁄지난날의 고해성사인가요”라고 간결하게 노래하면 될 것 같다. 이유는 물론 이런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앞에서 나는 ‘간결하게’라고 말했지만, ‘간결한(succinct)’ 미학을 발휘하려면 ‘함축’이나 ‘응축’을 살려 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간결한 특성을 시작법에 처음으로 언급한 시인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아닌가 생각된다.)앞에서 “뒤로 물러서야 앞으로 나가는⁄그네의 법칙은⁄지난날의 고해성사인가요” 같은 대목도 비록 논리이기는 하나 함축과 응축의 미적 효과를 극대화하여 처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정신도 엿보인다. 그의 텍스트에선 도처에 이러한 처리가 두드러져 보인다. 라고 함축적인 평을 보여주었다.
이를 보면 김해빈 시인의 시적 모태는 자연이지만 그것에 머물지 않고 한층 뛰어넘어 자연을 자신의 감성틀 속에 가두고 다시 꺼냈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묘미를 보여준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달’ ‘원’ ‘둥글다’라는 의미의 시편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나’가 아닌 ‘너와 나’ ‘우리’ 그리고 ‘모두’ ‘함께’ ‘하나가되다’ ‘어우러지다’ ‘소통하다’ 이런 의미로 확장되고 있다. 먼저 작품을 살펴보며 이를 논하기로 한다.
둥글게 살아도 속까지 다 보여 달라고 하면, 날마다 모서리 지우는 달은 뼈마디가 아프잖아. 반쪽을 떼어내도 속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눈썹만 하게 야위어갈밖에……
비워낸 생채기마다 어둠 수북이 쌓고 있어
다시 어둠 끌어안고 부풀려볼래
둥글어지는 시간 빨라지고 그럴싸해지면
맑은 숨결 불어넣겠어 더더더 둥글어질 때까지
어둠 속에서도 달은 항상 둥글어지고 그 속에 자리 잡은 나도 둥글다고 느껴
이젠 혼자 굴러보겠어! 최대한 낮게 나를 낮추고.
1집 「달은 둥글다」 전문
한 동그라미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테지요
종일 생각에 지치면 무기력해져 의기소침하고 그래도 행복해하는
점을 찍어도 데구루루 굴러 봐도 시작이고 끝인 것을 태어난 시간이 달라도 함께함으로 기쁨이 더해요
너와 내가 아닌 우리가 더 편하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테지요
뜬구름 잡는 흐린 날엔 구름이 비를 감추고 있다고 설명하며 수없이 하나가 되는
둘레를 돌아도 지름길로 뛰어 봐도 시작이고 끝인 것을 마른날도 축축한 날도 건망증만 더해요
같은 동그라미 안에서 너와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테지요
반세기를 업고 무겁지 않다 하고 보폭이 짧아 오래 기다리면서도 가슴 내어주는
적도에서 만나고 지구 중심에서 헤어져도 시작이고 끝인 것을 주검으로 가는 시간이 달라 두려움만 더해요
2집 「원은 시작과 끝이다」 전문
물이 내어준 물렁한 길 따라 덕적도에 왔습니다
모서리 지우고 있던 자갈마당 몽돌들
내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둥근 길 안에 또 하나의 모난 길이
단단히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겹겹으로 몽글려 온 길은 날카로운 모서리 담지 않으려고
낯선 걸음에 비명을 참고 있었습니다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며 찾아 헤매던 견고한 길을 지우고
유연한 길 찾아 되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선착장 고무통에서 퍼덕거리는
작은 눈의 도다리를 보았습니다
한쪽으로 쏠린 눈 뜨고 입맛 다시는 술꾼들의 구미에 맞춰
무거운 시간을 씻어낼 뿐
기꺼이 껍질 벗겨내는 아픔을 견디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모난 길이 아니었습니다
3집 「둥근길」 전문
김해빈의 초기 작품에는 함축적인 시편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섬세하면서도 하이퍼적인 기법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는 역사의식이나 사회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을 다소 내포하고도 있지만, 더 나아가 인간 본연의 내면에 충실하면서도 적극적인 도전의식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 이의 특징을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면 하이퍼의 기초원리를 터득한 하이퍼시의 항등성 배제 및 전경과 배경의 전환기법 관찰과 모든 작품 속에서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내는 철학적 사유의 거울에 비춰내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러므로 김해빈 시인의 작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하이퍼시가 무엇인지를 일부나마 알아야겠다.
1. 하이퍼시의 항등성 배제 및 전경과 배경의 전환기법
하이퍼시를 처음 도입하고 하이퍼시의 새로운 연구에 적극적인 문덕수 시인은 하이퍼시를 한마디로 압축하여 설명한다.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룬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결된다." 즉 하이퍼시는 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물만을 가지고 시를 쓴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사물에 대하여 새로운 상상으로 몰입되기에는 자신만이 가진 사물의 본질적 이해가 필요하다.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감정적 변화의 그림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는 사물에서 얻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며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여 독자와 공유한다. 한마디로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고 이미지의 연상을 다른 사물과 대비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모은다. 그것이 개개인의 능력이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빠트리기 쉬운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어 새롭고 진정한 하이퍼시가 완성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껴야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이퍼시가 되는가, 시인과 독자가 같은 감동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문학의 발전만큼 독자들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를 써도 그 순간은 자신이 감동하게 되고 완성을 이뤘을 때는 독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론에 맞는 하이퍼시를 쓰려면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이퍼와 항등성에 대하여
어떠한 대상을 보든 인간의 두뇌는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는 자신만이 가진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눈과 대상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00m 앞의 사물의 크기와 100m 높이에서의 사물의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되지만, 수평으로 볼 때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등성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둥근 접시를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말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의 심리학적 구성 원리인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른다면 시의 구성이 되지 않고 사물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시의 목적을 잃게 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모양에서 얻은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소나무를 봤을 때 소나무의 생태와 자연과의 동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눈으로 본 그대로의 모습을 그때의 상황과 연계하여 거기서 파생된 상상을 이어가는 것이 하이퍼시다.
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실제로 우리는 시를 그렇게 써왔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대상의 본질보다는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멀리 떨어진 큰 고목이 작은 묘목으로 보일 수도 있는 허상도 그릴 수 있고, 위에서 보는 크기와 거리를 두고 보는 크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활은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은 대부분 항등성을 잊고 산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쓸 때 그러한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감동을 앞세워 본능적인 감각으로 씨를 쓰기 때문이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은 양쪽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눈이 하나일 때만 가능했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것은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고 눈을 두뇌로부터 단절시켜 기계적인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시인들에서 먼저 나타났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기 전부터 시에서는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의 주류는 본질적 세상의 이상을 그려나가 인류는 객관적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기계문명에 완전히 길들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화면 세상에 빠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카메라가 잡은 세상만을 믿고 산다. 본질의 통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르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하이퍼시는 시작됐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림 위에 새로운 상상을 결합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카메라가 잡은 객관적 정확성에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세 번째의 눈, 다시 말해 본능적인 감성이 있어야 이미지의 연속성으로 하이퍼시가 이어지는 것이다.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의 전환
시를 쓴다는 것은 창조적 행위다. 시인은 창조자로서의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 창조적 사고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인 월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시의 대상인 사물을 대했을 때 확연한 이미지가 이어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면 불현듯 어떠한 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상상의 존재란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의 각 부분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 즉 게슈탈트(독일어로써 심리현상은 어떠한 요소의 가산적 총화로는 설명할 수 없고 전체성을 갖는 동시에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성질)로 파악한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인물만 뚜렷하게 나오게 하는 아웃포커싱과 같은 원리다.
문제는 시에서 이와 같은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물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이렇게 게슈탈트의 끊임없는 형성과 해소, 이 과정이 사물의 서사 즉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묘미이며 진정한 하이퍼이다.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못하여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을 바꾸지 못하고 고정된 존재만 바라본다면 하이퍼의 구성이 한정되게 되어 형성이 뒤엉켜버리는 데 있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잃게 되는 감동의 여부가 결정된다.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첫째. 기존의 고정 관념을 확실하게 버리는 것이다. 같은 하이퍼시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중복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다른 관념이 되는 것이므로 유행 같은 언어의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둘째. 사물의 움직임과 동화된 주위 환경을 봐야 한다. 즉 새로운 사물을 찾아내어 그 움직임을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움직여 사물의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 셋째.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게슈탈트 전환이 가능해야 창조적인 발상으로 하이퍼시를 쓸 수 있다.
-김해빈 시에서 나타난 하이퍼시의 관찰
하이퍼시가 새로운 시문학으로 자리 잡아 시단의 큰 방향을 일으킨 후로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그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그동안에 익혀왔던 사물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인들을 보면 문덕수 시인을 중심으로 심상운. 김규화. 조명제. 송시월. 안광태. 이춘하. 정연덕. 고종목. 위상진. 김기덕. 이솔, 이선. 김예태. 허순행. 김해빈 등 문단의 활동이 활발한 시인들이다. 나열된 이름에서 빠진 시인들도 상당수가 있어 새로운 시론으로 나타난 하이퍼시 운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이중 김해빈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이퍼시의 이론과 실제의 작품이 하이퍼답게 이해되고 부합되는 것에 대하여 관찰해보기로 한다. 김해빈은 초기 작품부터 전통 서정을 크게 벗어난 상태로 나타났다. 처음 작품집 『새에 갇히다』를 살펴본다면 그 제목부터 하이퍼 유형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 이론을 접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자신의 안목과 상상을 은연중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새에 갇힐 수는 없다. 그러나 김해빈은 스스로 새에 가두어 날개를 빌리고 새를 통하여 본 새로운 세상을 그린 것이다. 그 후의 작품집에서도 하이퍼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는 원래의 시적 감성이 일반 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비 그친 자운서원 잔디마당 위로
눈알 굴리는 잠자리 떼
뇌관 푼 핵폭탄 물고 몰려간다
유럽을 평정한 히틀러
독일공군이 영국 본토를 향해 도버해협 상공을 날고 있다
우중충한 날씨에 내려다보는 도시는 무표정하고
괴링의 출격명령에 날개를 편 전투기
노선을 이탈해 런던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 블리츠(Blitz)체험관 상공을 낮게 날고 있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전투기는 급하강한다
빗금으로 치닫는 빗줄기에 야금야금 저려오는 날개
나치는 영국 상륙을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보다 위에 있는 율곡무덤도 오만원권 오천원권 지폐도 아닌, 기념관 빛바랜 초충도에 앉은 고추잠자리
헤드라인
‘오늘이 우리의 승전일입니다(TODAY IS V.E. DAY!)’
「고추잠자리」 전문
이 작품은 하이퍼적인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고추잠자리는 평화의 상징이며 한가롭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자연의 개체이다. 누구나 비 그친 뒤에 잔디밭 상공을 바람 없이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대하면 내면에 감춰진 그 어떤 고민과 울화도 잊게 된다. 어린아이가 고추잠자리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모습에 함께 동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평화의 상징이라 아니할 수 없는 곤충이 고추잠자리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겉모양뿐이다. 잠자리의 생태를 보면 곤충 중에서도 상위급인 포식자이다. 잠자리 유충이 물속에서 자랄 때 장구벌레 등 작은 애벌레나 심지어 개구리의 올챙이까지 잡아먹으며 사는데 애벌레의 시기를 보내며 먹는 먹이의 수효가 몇만 마리가 된다는 학계의 발표도 있다. 또한, 땅 위에서 유충으로 지내는 명주잠자리는 일명 개미귀신이라 불리며 함정을 파 수많은 개미를 잡아먹는 포식자이다. 이것이 잠자리의 생태이며 본질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시를 구상하지 않고 사물의 현재 보습을 보고 시를 쓴 것이지만, 전투기와 히틀러를 잠자리에 대입시킨 것을 보면 김해빈은 사물의 본질까지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위패를 봉안한 사원이며 율곡의 가족묘를 조성한 곳이다. 알다시피 율곡 이이는 성리학자로 알려진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또한, 평화를 지키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한다며 10만 군병을 양성해야 된다고 주장하여 힘을 앞세운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잠자리가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는 데는 힘을 기르는 포식자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자운서원과 잠자리를 대비하여 나타낸 것으로 사물의 실체를 연결 인식하는 항등성을 벗어버리고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대비시킨다.
히틀러는 근대의 몇 안 되는 독재자의 대명사이다. 힘을 내세워 유럽과 전 세계를 점령할 목적으로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웃 나라를 폭격한다. 김해빈 시인의 상상은 사물의 현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유럽까지 날아가 히틀러의 폭격기를 불러낸다. 도버해협을 날아가는 폭격기가 자운서원 앞마당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사물에서 파생된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다. 고추잠자리는 전경으로, 자운서원은 배경으로 나타나다가 폭격기의 등장으로 자운서원이 전경이 되고 잠자리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전환의 기교와 이율곡의 사당과 가족이 배경이 되어 그려지다가 다시 고추잠자리가 전경이 되는 하이퍼적인 기법은 게슈탈트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운서원의 유래와 형성. 잠자리의 생태와 실태, 히틀러의 폭격기와 폭탄의 파열음과 ‘아버지보다 위에 있는 율곡무덤’의 모순을 하나의 장면에 대비시켜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하이퍼의 퍼즐을 무리 없이 그려냈다. 사물의 과거가 현재의 평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재 보이는 모습의 잠자리가 그대로의 움직임으로 평화를 만들어 모두가 승리한 승전 일을 만든 것으로 복합된 이미지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하이퍼에서 빠지기 쉬운 감동까지 만든 것이다.
웃음보에 헛바람 들었는지
멸치같이 깡마른 남자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시청 앞 건널목 횡간막 사이를 비집고 히죽거리며 다가온다
가을걷이 끝날 무렵 볼썽사납게 조무라든 꽈리를 보았을까
소피 마려운 여자의 뒤태를 보았을까
2시간 전 언양불고기 먹고 ktx 타고 올라온 여자의 하프코트에 묻은 쇠똥 굴러가는 소리를 들은 게야
설익은 시에 짓눌려
내 흉강에 덧쌓인 말씨들이 폐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혹시 눈치챘는지
남자는 이내 뒤따라오던 스키니 차림에 킬힐 신은 여자의 꽁무니에 눈길 꽂힌다
거미줄 같은 거리를 기웃거리며 권력을 찾던 남자는 몇몇 조무래기들의 웃음과 교회 전도사로부터 받은 일회용 휴지를 주머니에 욱여넣고 도마뱀처럼 꼬리 자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성형외과에서 나온 얼굴 퉁퉁 부은 여자, 공터를 지나다 울타리 넘어온 축구공에 뒤통수 맞고 미간을 찌푸리려 하자 완충지대 튤립나무에 앉았던 까치가 깔깔거리며 날아간다
주유소 화장실에 뛰어든 여자의 스커트자락 놓지 못한 남자
여자의 핸드백 들고 휘파람 부는 듯 볼을 잔뜩 오므렸다 부풀리며 달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정지신호 무시한 채
응급처치하고 나오는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
「기흉」 전문
앞의 작품이 사물의 모양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를 엮어낸데 비하여 이 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사물화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적절히 이뤄낸 데 있다. 남녀의 생태적인 일상을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바라보고 남자의 히히낙락 거리는 실태와 여자의 팽팽해진 감정을 하나의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남자를 전경으로 하고 그 뒤의 배경에는 여자의 감정이 언제나 받쳐주는 형태로 사물의 표현보다 사람의 감정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신의 소유라고 믿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후손 번식이라는 지대한 자연의 섭리가 남자들을 착각하게 하였을 것이다. 작품 속의 남자는 여자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을 꽂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여자는 뒤에서 살펴본다. 현시대의 새로운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으로 있는 여자의 감정 기복은 폭발 직전이다. 그런데도 남자의 눈길은 또 다른 여자의 모습에 현혹되어 뒤따라가는 실태를 보인다. 이때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는 남자의 기본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권력과 금전을 얻기도 전에 섭리적 욕망만을 풀어내려는 남자는 여자의 표적이 된다. 대부분 여자는 표적의 남자를 향해 창을 던지는 게 아니라 다른 출구를 찾게 되고 그 출구로 성형외과를 들락거린다. 그것이 실패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남자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푸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해빈 시인의 고민은 시작이다. 남자와 여자의 생태적인 모습을 버리고 현실에 맞는 모습을 그려야 할지. 남자의 비뚤어진 욕망의 발산을 원칙적으로 그려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 결과로 달이라는 위성을 찾았다. 해결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아 원색적인 남자의 욕망을 잡은 것이다.
기흉은 결핵성 파괴 등의 원인으로 폐의 표면에 구멍이 생겨 흉막강 안에 공기 또는 가스가 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자꾸만 헛바람이 빠져나와 남들이 보기에는 실없이 웃는 모습으로 보이는 병이다. 김해빈의 기흉은 그러한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남녀관계에서 시적 모티브를 찾아낸 것이지만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에서 이미지를 찾지 않고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사물화하여 원리적인 항등성을 배제하고 전경과 배경을 적절하게 전환하여 한 편의 하이퍼시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사물에서 찾은 이미지보다 쉽게 그려질 것 같아도 사람의 변화가 짐작하지 못할 이변의 연속인 것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다.
마지막 연에서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는 남녀의 생리적인 차이는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남녀관계는 이율배반적으로 동등하다는 항변으로 보인다.
눈 쌓이는 모스크 앞에서 기도하는 무슬림들, 눈밭에 앉아 있는 낙타, 피라미드 앞 스핑크스는 미소를 잃었다.
사람들 호기심이 파라오의 역사를 뒤집어놓고 말았다
대립이 가득한 지붕을 하얗게 덮은 눈은
주도권 싸움에 뜨겁고 치열했던 여의도 십자가를 잠재울 수 있을까
「폭설」 부분
압축된 삶은 의미가 없다며
하루하루를 느슨하게 흘려보내던 여자는 접시에 샐러드와 과일을 듬뿍 담아 테이블 아래 주름진 의자에 앉는다
1월을 지나 2월이 오면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쭉정이도 제 몸 부풀리며
이벤트의 계절을 또 기다리겠지
12월 어느 날, 베고니아 뷔페
시인의 접시 위에 퉁퉁 불어튼 강낭콩 한 알 덩그러니 남았다
「배부른 콩」 부분
위에 부분적으로 나열한 두 편의 시에서도 김해빈의 시는 시종일관 하이퍼적인 기법을 유지하며 시의 방향을 잡아 나간다.
폭설로 100년 만에 이집트 사막의 피라미드는 하얗게 덮히고 스핑크스가 미소를 잃은 상황에서 군중은 자유를 외치며 혁명가를 부른다. 개인의 염원이 하나로 뭉쳐 짓눌린 자유를 찾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되찾은 자유는 폭설에 갇혀 다른 고난을 불러내는 피의 역사, 한 송이 눈이 뭉치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웃음을 잃어버린 승리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시 일으킨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의 의사당인 여의도를 등장시켜 대립과 설전이 난무한 상황을 꼬집고 그 옆에 위치한 높다란 십자가의 건물에서 일어난 분쟁을 종교적인 문제 즉 폭설로 불러낸 전환의 기법이다.
배부른 콩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도 거리낌 없이 내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대비시켜 인간의 추악함이 얼마나 높아야 무너질 수 있는지를 쭉정이 콩에 비유하였다. 완성된 인간은 없으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려는 과욕에 대한 행동을 꼬집어 통통하게 영글은 콩과 익지 않아 쭉정이가 된 콩으로 그려낸 기법은 김해빈의 특유한 하이퍼적 시의 기교다.
어느 작품에서든 사물과 사물의 연관을 찾아내고 사물의 움직임과 멈춰진 정서를 끄집어내는 김해빈의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집중은 앞으로 한 발짝 더 나갈 것이 분명하다. 이는 시의 실제가 이론을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2.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내는 철학적 사유의 거울
‘시는 무엇이며 왜 쓰는가’라는 물음에 선뜻 대답하는 시인은 없다. 물론 각자의 생각을 정립하여 막힘없이 대답하는 시인도 없지 않으나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누구나 동감하는 대답은 아닐 것이다. 시가 무엇이고 시를 왜 쓰느냐는 물음은 어리석은 질문이 분명하다. 시에 정답이 있고 시인에게 목적이 있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영원불멸의 이상향에 이미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론과 실천을 구분해서 생각하기 마련이다. 지식이 뛰어난 학자가 반드시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고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이 반드시 윤리적인 사람은 아니듯이 유명한 신학자라고 해서 신심이 깊은 영성가나 성인이 아닐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은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본능과 욕구가 있어 ‘아는 것은 행하는 것이며 행함이 없는 앎은 앎이 아니다’라는 이론과 실천을 명확히 구분하는 본질적인 이성을 가졌다. 육체적인 충돌과 정신적인 사유를 통하여 사물의 형태와 구성을 찾아내어 이를 언어로 나타낸 것이다. 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언어의 정점이다. 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시작되어 해석하려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주어지지만 근본적인 원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같은 특성을 보인다. 시는 보편적 현상을 각기 다른 대답으로 드러낸다. 시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곧 같음과 다름에 대한 해답 찾기다. 이렇게 묻고 이해하는 과정의 언어 활력에서 시의 형성은 지속하는 것이며 끝없이 묻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성립된다. 어떻게 질문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이해의 체계를 제시하는지에 따라 방향이 정해지고 의문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김해빈 시인은 사물에 인간이 가진 원형적 질문을 던지고 형성과정의 물질과 질량을 저울질하여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인간이 추구하는 오욕칠정 전부를 한 권의 시집에 담아내었다. 자기 이해에 관계되고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통하여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내고, 모든 것은 결정되고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언제나 걸어가는 과정만 있다는 철학적 사유의 거울로 비춰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기를 원하고 사물이나 사건을 보면 그 원인과 내용이 어떤지를 알고 싶어 한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김해빈 시인의 작품은 인간의 알고 싶다는 본성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갖는 삶의 일상에서 이해와 해석의 연속으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작품마다 하나의 뜻을 내세우지만 연행마다 이미지를 달리하여 결국은 하나로 귀결시키는 묘수를 보인다. 인간은 아픔의 동물이다. 육체적인 아픔으로 힘들어하고 정신적인 고뇌로 몸부림친다. 그 아픔에는 징조가 있다. 정신적으로는 두통을 육체적으로는 욱신거림으로 아픔의 신호를 보낸다. 이 시집에서 김해빈 시인이 나타내려한 이미지는 아픔의 징조 찾기다. 전체적으로 시의 흐름은 멈춤이 없어 과격과 통념이 충돌한다. 때론 형이상학으로 치달아 어렵고 낯설다. 어렵고 낯설다는 것은 감각적 영역을 넘어서며 지각할 수 없는 것에 접근하고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적 영역의 하이퍼적인 시 창작이 낯설게 다가와서 신선하다. 따라서 김해빈 시인의 시세계는 삶의 이유와 목적의 질문으로 연속적이다.
-삶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의문
모든 사람은 삶의 이유와 목적에 의문을 가진다. 사람이 가진 근본적인 질문이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움이 닥치든가 생활방식에서 이탈된 상황 즉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이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그에 대해 ‘왜’라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과학적으로 해명되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측정하고 관찰하는 행위만 가지고는 사람의 고정된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이러한 문제는 상상력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고 객관적 지식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이해하고 해석하는 시로서만 가능하다. 밖이 아닌 나 자신에서 답을 찾고 사람의 영역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김해빈 시인의 시에서 이런 문제 해결에 대한 능력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바위에 껍질을 벗어두고 환골탈태한 그녀
뉴런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흔적을 남겼다
바위 속 은둔자는 존재 이유를 찾아
라디칼과의 전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비타민 C와 E 베타카로틴과 미량의 원소 셀레니움이 들어있는 항산화 물질 소량의 적포도주와 균형 잡힌 식단을 찾아 뛰쳐나왔을까
허물을 벗어 던진 그녀
질병과 신경, 세포, 가치관까지도 돌에 새겨놓고 뼈와 근육만 지닌 채 앞만 바라본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변이, 유전, 사고도 없는 양질의 산소만 있는 곳을 기억하며 그 어떤 소란스러움도 지우고 있다
끝없는 공허함 속으로 달려가는 근육의 파편들
피비린내 없는 저 완벽한 구도는
또 하나의 생명이다
「플라스티네이션 3 -허물 벗는 여자」 전문
플라스티네이션이란 사람의 사체에서 수분과 지방을 모두 빼고 실리콘 고무 에폭시나 플라에스테르 등 합성수지를 주입하여 통통한 상태를 유지 사람의 외형과 실핏줄 등을 관찰할 수 있게 만든 인체 해부학적 모형이다. 생명은 없으나 인체의 모든 것을 비춰주고 살아있는 듯 표정까지도 알 수 있게 만든 전시물로 인간이 가진 원형의 모습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보여줘 생명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준다. 신경계를 이루는 구조적 기능적 기본단위가 되는 세포를 낱낱이 드러낸 인체의 표본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일시에 무너트린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물질형태의 순수한 인간이 어떻게 상상하고 그 상상을 뛰어넘어 새로운 물체와 사상을 구상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화자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삶의 목적이 왜 필요한지 고민하고 사람의 탄생과 죽음이 어디로 어떻게 어느 과정을 밟아 가는지에 의문을 두고 허물 벗은 여자의 생체해부 실체와 마주한 순간, 우리가 고민하는 삶의 목적이 해석되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끝없이 공허함 속으로 달려가는 인간의 허무한 삶, 그것은 생명이 없는 표본에서 또 하나의 생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삶은 영원하지 않지만 생명유지의 염원은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 한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해석으로 입증된다. 생명이 없는 사람의 표본체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주는 것은 진실은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인류의 가치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작품이다.
러시아워를 피해
지하철역 출구를 빠져나오는
미련한 여자의 입 안은
늘 흙탕물이 고여있다
보스톤 탑 치과
수술대에 누워
보스턴으로 출발하는 여자
프리덤 트레일을 찾아
최대한 입을 벌리고
중략
미소 찾으려 약국으로 간다
딩동 스마트폰에
긴장을 외면한 난수표
미소가 오만하다
「미소약국」 부분
인체의 모든 것에는 아픔이 있다. 신경이 연결된 조직마다 통증을 감지하는 선이 뇌의 조종을 받아 각 부분에 가해지는 위해에 아픔으로 방어막을 친다. 그중 치아에서 발생하는 아픔은 공포를 넘어 무한의 암흑으로 빠지게도 한다. 치통은 그만큼 살벌하다. 이 작품은 누구나 겪게 되는 치아치료 과정을 그렸지만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공포에서 삶의 방식을 찾게 되고 그 방향에서 이탈하여 인간이 스스로 외면하고 피하려는 샛길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그렸다. 화자는 자신을 미련하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은 아픔을 피하지 못한 자책이지만 자유의 길을 마음껏 달리지 못한 현실에 대한 원망이기도 하다. 여기서 보스턴 전쟁박물관을 대입시켜 앞으로 일어날 고통이 곧 전쟁임을 암시하고 있다. 치과의사의 명령으로 크게 벌린 입속으로 시술 기구가 난립하여도 속수무책으로 따라야 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에도 치료에 전념하는 의사의 행위는 간신히 유지한 미소마저 빼앗아간다. 여기까지는 치료의 상황이다. 그러나 마취주사에 볼이 부어올라 저절로 생긴 미소가 상황을 반전시킨다. 결제한 치료비는 스마트폰이 먼저 액수를 확인해주어 아픔보다 부어오른 만큼 흐릿해진 눈자위는 처방전이 난수표로 보일 것이다. 자책과 고통을 체념과 외면으로 역설적이고 재미있게 승화시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렇다. 인간은 어느 상황에서든 해결책을 찾게 되고 앞뒤의 판단이 맞지 않을 땐 허망함을 가진다. 인간 최고의 장점은 절벽을 만나도 마음속으로는 그것을 뛰어 넘어버리는 데 있다. 어떻게든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간은 현상을 유지한다. 삶의 이유와 목적이 다시 확인되는 작품이다.
덕양산 성벽 넘어
단풍씨 날개를 돌리며 날아간다
권율의 신호에 발사된
서슬 퍼런 역사가
토성에 기어오르는 왜적을 향해 쏟아진다
성을 쌓던 여인들이
‘저 남자는 파트너가 자주 바뀐대’ 하며 수군댄다
그렇게 단풍씨는
어미 단풍나무가 태어난 곳으로 따라 날아갔고
금기의 꽃날에 손이 베인 남자 끌고
눈웃음치며 산성에 오른 여자
행주치마 벗어던진다
귀 큰 남자의 어깨 위로
권율의 큰 칼이 프로펠러 돌리며
소문이 되어 다시 날아왔다
단풍나무 아래
남자의 어깨에 걸린 낮달이 차갑다
「부메랑」 전문
인간의 삶에서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반드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주는 대로 받고 받는 대로 주게 되는 것은 스스로가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그 흐름으로 인류는 자연스럽게 믿고 후대에 물려주어 인성을 가르쳤다. 이 작품은 하이퍼 시작법으로 그려진 이미지 조합의 작품이다. 최초의 이미지 발견과 대입으로 역사적인 사실, 억압된 여인들의 해방, 사회 부조리의 고발, 인간 자책의 양심선언, 자연이 주는 교훈 등 사람 사회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였다. 단풍씨앗은 토끼 귀를 닮은 날개를 달아 씨앗이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러나 의도대로 멀리 날지 못하고 뱅글뱅글 돌다가 제자리에 돌아오기 일쑤다. 이것의 발견이 부메랑이고 행주산성의 피맺힌 역사는 오늘의 정세를 닮아 언제 외적의 침입이 닥칠지 불안하다. 집단사회의 병폐에 몰린 여인들은 남자들의 일탈을 꼬집어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원하며 금기를 깨트린 여자들은 드디어 행주치마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외친다. 귀족이라고 큰소리치며 풍류를 일삼던 남자는 소문의 프로펠러를 멈추지 못하고 제자리에 돌아왔으나 부메랑의 무게에 눌려 넘어졌다가 찌그러진 낮달에 바짝 정신을 차린다는 이미지의 전개가 숨 가쁘게 펼쳐진다. 여러 개의 이미지를 던지고 있으나 결국은 행한 만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적인 철학을 담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시가 상상의 시공간을 폭넓게 넘나들며 텍스트를 잘게 쪼개다가 또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는 등 함축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성향을 뚜렷이 띄고 있다. 이렇듯 김해빈의 작품은 인간사회의 불가분의 관계와 부조리의 연속적인 이해와 해석이 대부분 하이퍼적인 전개로 펼쳐진다.
-객체적 지식을 풀어내려는 게 아닌, 인간 본성을 비춰내려는 자연적 발성
시인은 사상가가 아니다. 연구실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인간의 생리를 정립하는 학자도 아니다.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는 일에 시비를 걸든가 다루기 힘든 철학적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철학자도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찾아 마주하게 되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생각을 통해 찾아가려는 노력과 인간이 품고 있는 자연 속에 기댄 의문과 고민을 자연과 심리를 통하여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이런 것은 심리학과 심리철학, 역사학과 역사철학,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시인은 인간이 품은 모든 의문을 풀어내려는 객체적 지식을 찾는 게 아니라 이해와 해석을 통하여 인간 본성을 비춰내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 자연발생적 탄생으로 출발하여 누가 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빛낸다. 김해빈 시인의 시 작업은 여기서 한 치의 비켜남이 없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하나의 길로 고수하며 지구상 어느 곳이든 찾아간다.
아이의 어둠이 멈춘 곳은
산머리 절벽 위였다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던 절벽의 이끼는
백악기에 깨어난 새끼들이었을까
꼿꼿하던 해가 기울면
쉼 없이 질주하는 산양이 되었다
반쪽이 잘린 지구 너머로
어둠 비켜 달렸지만
새끼의 등 덥석 물고 숲을 벗어나갈
아비의 그림자는 없었다
쇠똥구리가 떠나온 강가 모래밭은
빛이 잦아든 어둠의 집
쇠똥 덩어리 굴리며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을 기어올랐다
오래전 그들이 그랬듯이
빛의 세기가 절벽으로 치달아도
밧줄 내려줄 어미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둠 속의 어둠
해를 삼킨 태풍이 다시 절벽을 친다
부서진 어둠이 굴러내린다
「어둠 지우다」 전문
둥근 지구가 쉬지 않고 돌아가며 그림자를 만들어도 지구상의 모든 것은 인간이 발견한 과학의 원리대로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한 쪽의 아픔이 반대쪽 아픔으로 번져나가 비극적인 상황에서는 서로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만든 아픔이라 누구를 원망하지 못하고 자학적인 형태로 상처를 낳는다.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전쟁난민, 시리아와 이라크 등 종교로 인한 인간말살 작업에 피난길에 오른 난민, 그리고 부모들의 학대로 인한 어린이들의 주검 등 우리주변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의 장면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달되고 우리도 같이 그런 장면을 마주한다. 아이가 멈춘 곳은 절벽 위다. 아이의 어깨를 덥석 잡아채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줄 손길은 보이지 않는다. 쇠똥구리와 뒹굴며 살던 초원의 모래밭이 배경으로 비치고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장면이 확대된다. 원시적인 자연의 평화를 모르고 평화를 원하는 인간 군상들의 무관심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해를 삼켜버린 태풍이 절벽을 쳐 언제 무너질 줄 모르는 상황, 인간원형의 물음에 무슨 대답을 하고 어떤 행동을 보여야 할까. 화자는 상황을 그대로 던지고 대답을 기다리며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다 제시할 뿐, 스스로 느끼고 인간의 본성을 찾으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풍기는 작품으로 특성을 살려냈다.
문을 연다
어둡다
갈바람에 곡식이 알차게 영글지만
밤마다 떠도는 개처럼 읍내를 들락거리며 주전부리하는 그 남자
언제나 마네킹 같은 달을 탐닉하며 컹컹거린다
발바닥에 요령소리 나도록 뛰어다녀도
하루의 끼니 꼬박꼬박 챙겨 먹고 칼 출근 칼퇴근으로 현관문 지키더니
쏠쏠히 꿀밤같이 산으로 강으로 굴러다닌다
현관 밖의 남자
혈관에 나로핀을 꽂을까 아니면 미다졸람으로 수면을 유도해 볼까 셈하며 이중의 커튼을 내린다
현관 안의 마이클잭슨
부재중이다
「현관 밖의 남자」 전문
현시대의 남자는 서글프다. 너무 서러워 눈물도 마르고 서 있을 자리를 잃고 방황의 연속이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길이다. 일을 핑계로 주전부리를 일삼고 있는 남자들의 특성을 비유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주전부리는 먹거리가 아닌 남자의 또 다른 숨겨진 일상을 말하고 있다. 마네킹 같은 여자를 향하여 컹컹거리며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발바닥에 요령소리 나도록 뛰어다닌 고행이 자신만을 위한 일탈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들의 집에는 지켜줘야 할 가족이 있고, 가족을 외면한 남자는 도태되기 마련이고 그것이 남자의 숙명이다. 그러나 이 세상 남자들은 항상 일탈을 꿈꾼다. 똑바로 걸으면서 앞을 보지 않는 남자의 속성을 은근한 필치로 나무라는 작품이 유쾌하고 통쾌한 것은 그만큼 남자들의 일탈이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통렬하게 비판하고 과장된 행위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김해빈 시인이 가진 언어의 조탁 능력이다. 어느 작품을 읽더라도 이러한 능력은 섬세하게 발휘되어 거부감 없이 전개된다. 은근슬쩍 나로핀으로 달래고 미다졸람으로 위협할 뿐 남자가 가진 이중 커튼을 열어젖히고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반전은 현관 안에는 마이클잭슨이 부재중이라는 것이다. 마이클잭슨 또한 위와 같은 주사의 부작용으로 사망에 이르렀음을 우회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경쾌한 음악의 신으로 모든 남자의 어깨를 들먹이게 하던 존재인데 그 대상이 없다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인내와 노력으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시적 구상이 아닐까.
-시는 철저히 인성 안에서 펼쳐지는 사유의 독립성에 있다
김해빈 시인의 내면에는 고민과 질문의 연속적 과정의 인식론 문제로, 윤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과 질문으로 변형되어 끝없이 펼쳐져왔지만 그 바탕에는 언제나 질문하는 화자와 이해하려는 존재론적 지평이 자리 잡는다. 그런 까닭에 김해빈의 작품에는 철저히 인성 안에서 펼쳐지는 사유의 독립성으로 다뤄진다.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 칸트의 마지막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였다. 시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의문의 연속성을 제시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로써 표현한 인간적인 질문과 고뇌의 해결은 칸트의 철학에 가깝다. 시가 가진 이해와 해석의 연결고리는 인간이 가진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김해빈 시인은 시야가 넓다. 바라보는 시야뿐만 아니라 느낌의 폭이 넓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문제의 핵심이 뭔지를 제시한다. 그러한 능력이 인간이 가진 이해와 해석의 연결고리를 잡아채어 누구든 알아듣게 섬세하고도 강력한 필치로 조언하고 때론 질타하기도 한다. 그것이 김해빈이 가진 인간 속에서 펼쳐지는 사유의 독립성이다.
지하철역 3번 출구를 빠져나온 직박구리
안중근 공원 동상에 올라앉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브라우닌 M79299 권총을 물고 하얼빈으로 가려는지
빌렘신부 모시고 여순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려는지
구름다리 위로 날아오른다
명품가방 명품차를 끌며
그렇게 사람들은
명품의 자유를 찾아 날마다 소풍 간다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거리는 자유로 한껏 부풀어 있는데
하얼빈과 여순을 다녀와 공항 리무진에서 내린 직박구리
창을 닫은 채
꼬리를 물고 달려가는 자동차와
길 위에 무표정의 사람들 시선을 헤집고
다시 구름다리를 건너온다
어둠이 마지막 기록을 덮어버린 공원 벤치 아래
소풍고속버스터미널 불빛을 비켜 날개 꺾인 직박구리 위로
3월의 빗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진다
「소풍 가는 길」 전문
직박구리는 대표적인 텃새다. 텃새 중에 가장 시끄러운 존재로 너무 짖어댄다 해서 때까치라고 불리는데 크기와 목청보다 우물 안 개구리 방 안 퉁소다. 자신들의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직박구리가 구역을 침입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새다. 사람도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존재로 오직 자신밖에 모른다. 김해빈 시인은 직박구리를 통하여 사람의 이기심을 고발한다. 안중근 의사는 민족이 받들어 모시는 애국자로 기꺼이 자신을 바쳐 나라에 헌신한 민족적 영웅으로 모든 국민이 칭송하며 따르는 존재다. 하지만 말 뿐이다. 공원을 조성하고 동상을 세워 우러러본들 무슨 소용인가. 진정한 마음으로 영웅을 따르는 애국적 자세가 되어야 올바른 국민이 아니겠는가. 주변 고급 쇼핑센터에 명품가방이나 좋은 음식을 먹으러 다니면서도 진정으로 우러러볼 민족의 영웅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해마다 기일을 정하여 행사하지만 그때뿐이고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의 영달과 오락을 위하여 바쁘게 살아간다. 은연중에 흔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던져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시인의 자세는 여러 갈래의 이미지를 생산하여 현실 참여적이고 하나의 이미지적인 작품으로 승화했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어둠이 마지막 기록을 덮어버린 공원 벤치 아래 3월의 빗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진다는 표현은 마치 안중근 의사가 현신하여 말없이 국민의 행태를 나무라는 듯 가슴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울림을 준다.
3. 시인의 사고는 멈추지 않는 우주다
김석환 시인은 김해빈 시인을 가리켜 ”김해빈 시인의 무의식적 욕망을 이끌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시세계를 구축하는 ‘환상’의 스펙트럼은 무척 넓다. 시간과 공간을 비약적으로 넘나들며 낯선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배열함으로써 시적 긴장감을 준다. 그 시간과 공간 또는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고 어울리며 욕망의 실재와 가까운 곳으로 보는 이를 이끌어 간다. 특히 서사적 요소들이 압축되어 들어가 정지된 사물의 정교한 묘사와 아울리며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긴장감을 더한다. 김 시인의 시에 참여하는 시어들은 무척 다양한데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다듬어져 있어 미적 기능을 은밀히 감당한다.”라고 시집 욱신거리는 계절에서 평하고 있다.
시인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는 인간적인 물음이다. 과학과 생물학으로 이해하려는 의도는 절대 불가능하다. 인간 중에 시인만의 특성을 구분하려 한다면 시의 존재가치를 잃게 된다. 시는 사물과 사물의 움직임에서 파생된 모든 것을 사유를 통해 이해와 해석의 연속성을 가진다고 정의한다면 시인의 사고는 멈추지 않는 우주다. 김해빈 시인의 시는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은 제한 없는 특수성을 가진다. 이미지의 다변화를 만들어내는 시 「플라스티네이션 1, 2, 3, 4」 「자카란다 꽃목걸이」 「노근리의 봄」 「면사무소」 「좀비 PC」 「붉은 밀담」 「스콜」 「꽃점」 「댄싱 퀸」 「코리아케라톱스」 등등 작품마다 하이퍼적인 특성이 강하다. 그밖에 보편적인 이미지의 시편들도 사물의 편린이 난무하여 읽는 이에게 긴장의 끈을 조이게 한다. 서로 다른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이 분명하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작품을 엮어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이런 특수성을 잘 살린 김해빈 시인의 시세계는 독창적인 에너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어 앞으로 어떠한 작품이 발현되어도 독자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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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김해빈 1시집 『새에 갇히다』/ 2시집 『원은 시작과 끝이다』/ 3시집 『저녁을 하역하다』/ 4시집 『욱신거리는 계절』/ 『원은 시작과 끝이다』 서문/ 하이퍼시론 (문덕수)/ 동인지 ‘하이퍼시클럽’ -하이퍼3 / ’시문학’에 발표한 ‘하이퍼시’ 평설 (이오장)/ 『욱신거리는 계절』 평설 (김석환)/ ‘시문학’에 발표한 ‘나의 시쓰기’ (김해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