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증: 1082. [역경의 열매] 정동일 (1-12) 아직도 자랑스런 별명 ‘치킨 아저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고린도전서 13장이다. ‘사랑 장’으로 널리 알려진 이 말씀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해 살아가라는 사명감을 갖게 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신앙심이 부족해서인지 성령과 같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이 없다. 기도를 많이 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늘 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아직 여명이 트지 않은 새벽녘에 일어나 집을 나서기 전 이 고린도전서 말씀을 한번 읽는다.
특히 13절의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은 나의 기도제목이며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늘 부족한 신앙을 일깨운다. 구청 일을 하다보면 힘들고 지치고 역경이 닥칠 때도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말씀은 내게 위안이 되어주고 구민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큰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구청장이 되고 나서 크게 변화된 삶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더라도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셋째는 늘 깨어서 감사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나는 다섯 살 때 어머니와 사별했다. 아직도 ‘어머니’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가슴이 찡하게 울린다. 남들은 나에게 잘 웃는 구청장이라고 좋아하지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웃음 속에 진한 슬픔이 있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슬픔을 잘 극복했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면 감히 내가 구청장이 될 수 있는 환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온갖 잡일을 하며 보냈다. 그 바람에 제 나이에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뒤늦게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인정받아 대학 공부를 마쳤다. 나는 모진 가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 또한 굶주린 시절을 겪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소외되고 아픔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을 나누자’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농부였던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일아, 목마를 때 물 한 모금 주는 사람의 은혜를 잊지 마라. 그리고 배곯을 때 보리밥 한 그릇 주는 사람의 은혜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부족하지만 늘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그래서 ‘고아들의 치킨 아저씨’라는 별명도 듣게 되었다. 그들과의 인연은 15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작은 사랑이 모여서 구민들은 나를 중구청장으로 일하게 해준 것 같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동일 (1) 아직도 자랑스런 별명 '치킨 아저씨'
* [역경의 열매] 정동일 (2) 다섯살때 어머니 여의고 누나 품에 자라
* [역경의 열매] 정동일 (3) 어릴때 여읜 어머니 생각에 늘 외로워
* [역경의 열매] 정동일 (4) 야학마저 폐교… 멀어진 진학 꿈
* [역경의 열매] 정동일 (5) 연필 대신 스패너… 정비기술 배우기 몰두
* [역경의 열매] 정동일 (6) ‘車박사’로 인정받았지만 마음은 허전
* [역경의 열매] 정동일 (7) 제대 후 과일행상 하다 치킨점 열어
* [역경의 열매] 정동일 (8) 97년부터 치킨 체인점 사업 시작
* [역경의 열매] 정동일 (9) 단내나게 주경야독… 만학의 꿈 이뤄
* [역경의 열매] 정동일 (10) 신앙의 길 이끌어준 친구 오지석 집사
* [역경의 열매] 정동일 (11) 어르신들 위해 복지에 앞장서
* [역경의 열매] 정동일 (12·끝) 매 순간 최선 다하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
◇약력=신일교회 집사/동국대 졸업/연세대 행정대학원 정치학 석사, 동국대대학원 행정학과 정책학 박사과정 수료/서울 중구청장/충무로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역경의 열매] 정동일 (2) 다섯살때 어머니 여의고 누나 품에 자라
나는 1954년 구천동 계곡과 스키장으로 유명한 전북 무주 덕유산 자락에서 농사꾼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덕유산은 주봉인 향적봉(1614m)과 해발 1300m 안팎의 거대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30여㎞를 달린다. 향적봉 아래로 40㎞를 굽이굽이 달리는 구천동 계곡은 기암괴석과 원시림으로 장관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첩첩산중의 두메산골이었다.
덕이 많아 너그럽다는 덕유산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매정하고 가혹했다. 내가 다섯 살 때 3년 동안 병원에 누워계시던 어머니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코흘리개 철없는 막내였지만 병석에 누워있던 어머니에게 응석 한번 실컷 부려볼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큰누님과 함께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읍내로 갔다. 버스 안에서 큰누님은 내 옷매무새를 정성스레 고쳐주면서 말했다. “동일아, 오늘 엄마 만나러 간다. 이렇게 활짝 웃어봐. 예쁘게 보여야지?” 큰 누님과 나는 병실에 들어섰다. 어머니는 힘없이 누워계셨다. 무척 아파보였다. 나는 “엄마!” 하고 병상으로 달려가 와락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 많이 아파? 죽으면 안돼, 나도 따라 죽을 거야!”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 따뜻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잠시 후 엄마와 헤어져 막 돌아서는데 들릴 듯 말 듯 힘없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동일이 씩씩하게 잘 자라야지. 동 일 아!….”
어머니는 따뜻한 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어서 가라고 손짓하셨다. 그날이 내 평생 어머니와의 마지막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어머니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닌데 내가 어머니를 버렸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막내를 잊지 못하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나는 영영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누님의 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땐 사람들이 없는 곳까지 마구 달린다. 그리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1년 중 제일 싫은 날이 있다. ‘어머니날’이다. 지금은 매년 5월 8일이 ‘어버이날’이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어머니날’이라고 했다. 그때는 어머니날에 아이들이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어머니가 있는 아이는 빨간색 카네이션을, 엄마가 없는 아이는 하얀색 카네이션을 달게 했다. 난 늘 하얀색이었다.
“너 어머니 없구나!” 아이들은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다. 엄마 없는 게 무슨 죄라도 되는 듯 괜히 주눅 들고 눈물이 났다. 나중에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 난 어머니 없다! 왜?” 나는 아이들을 흘겨보다가 결국 티격태격 싸움까지 벌이기도 했다. 고아 아닌 고아로 업신여김을 당하며 울음을 삼켰다. “왜 하나님은 우리 어머니를 일찍 데려가셨을까?” 살짝 원망도 해보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보다 큰 일꾼으로 키우시기 위해 일찍 시련과 고통을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3) 어릴때 여읜 어머니 생각에 늘 외로워
나는 성장이 빠른 편이었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을 정도로 주위에서 인정받는 아이였다. 그렇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허전함과 외로움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재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 채울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는 역시 어머니의 존재가 절대적이다.
소풍을 갈 때나 운동회 때에는 더욱 어머니 생각이 났다. 예전에는 이런 학교 행사 때면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싸와서는 먹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괜히 주눅이 들었고 속이 상했다.
“얘야, 너도 이리 와서 같이 먹자.”
친구의 어머니가 불러도 나는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마음이 아프고 쓰려 그날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날은 어머니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져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 가서 훌쩍훌쩍 울었다. 여느 아이들에게는 즐거웠을 소풍날이 나에겐 쓸쓸하고 외로운 날이었다.
가슴에 슬픔을 지닌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텔레비전 같은 데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금방 눈물이 쏟아진다. 어머니의 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지 정에도 참 약하다. 그러나 어떤 악조건이나 역경 속에서도 부모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극복하려고 무진장 애썼다.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태어나고 자연스럽게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복 받은 삶이겠는가. 배고픔의 고통도 모를 것이고 배움에 대한 애끓는 갈망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배고팠던 시절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머니가 3년 동안 병상에 있는 동안 우리 집은 논 몇 마지가밖에 안 되는 빈농으로 전락했다.
가난해진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아버지를 비롯해 형님과 누나 그리고 초등학생이던 나까지 온 집안 식구가 농사일에 매달렸다.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서 형들만큼 일을 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집안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끼니 때우기도 버거웠다. 보릿고개 때는 쑥을 뜯어서 밀가루를 조금 섞어 먹기도 했다. 채 익지도 않은 보리로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겨울에는 고구마와 김치가 주식이었다. 그렇게도 어려운 시절, 나는 아직 어려 철이 덜 들었던지 한때는 소를 돌보다가도 틈만 나면 요리조리 노는 데 정신을 쏟았다. 간혹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쳐다보면서 어머니 얼굴을 떠올려 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마다 나는 한숨을 길게 쉬고는 “하나님 제발, 우리 엄마 얼굴 좀 보여주세요”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성당은 다소 가까웠고 교회는 멀었다. 성당은 15리(6㎞)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교회는 50리 밖에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천주교나 유교를 믿었다. 훗날 미국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둘째누님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일아, 너도 사실은 모태신앙이다. 언젠가는 너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어머니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병으로 누우시기 전까지 주일을 지켰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모두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 것을 깨닫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4) 야학마저 폐교… 멀어진 진학 꿈
나는 초등학교 때에 1등을 놓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투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일반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6㎞쯤 떨어진 성당에서 운영하는 야학에 다니라며 입학원서를 가져오셨다.
“동일아! 으떡하것냐, 집안 형편이 좋으면 중학교에 다녀야 쓰것지만, 낮엔 농사 좀 거들고 밤에 재건학교라도 다녀야 쓰것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비록 정규 학교는 아니지만 나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야학에 다녔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어머니께서 생전에 다녔던 성당이었다. 그러나 우리 식구는 성당에 나간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가족에게 성당에 다니라는 강요를 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인지 성당 야학은 왠지 어머니의 숨결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낯설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그나마 재건중학교도 2학년 1학기 때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서 폐교되었다. 결국 배움의 기쁨도 잠시, 나는 이제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참으로 암담했다. 검정고시를 봐서 중학교 학력을 인정받으려던 작은 꿈마저 사라졌다.
나는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농사에 매달렸다. 친구들이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에는 잠시 숲속에 들어가 숨기도 했다. 그래도 재건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검정고시를 봐서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도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서로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꿈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싫고 원망스러웠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의 소리가 나왔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잡았다. 혼자서 한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천자문을 시내에서 사 가지고 와서는 쓰고 읽는 연습을 부지런히 했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고 사서삼경을 외웠다. 명심보감도 읽었다. 그때 익힌 한자 실력은 지금까지 도움이 되고 있다.
1969년 열다섯 살이던 추석날 서울에서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친한 동네 형이 나를 찾아왔다.
“동일아, 계속 농사만 짓고 살 생각이냐? 내가 취직자리 알아 볼 테니 서울로 가자!”
“서울을 가자고요?”
“그래, 사람은 모름지기 기술을 배워야 밥은 굶지 않고 살 수가 있다. 세차장이나 정비공장 같은 데는 일자리가 있다.”
“…”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일단 지긋지긋한 시골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친척 형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있었다. 이왕이면 큰물에서 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저도 서울로 갈래요.”
어머니의 죽음과 어쩔 수 없는 학업의 중단, 나는 가슴 속에 흐르는 슬픔을 뒤로 하고는 굳은 마음으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남들처럼 부푼 꿈을 안고 서울행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 지금까지의 삶은 내 스스로가 한 것이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5) 연필 대신 스패너… 정비기술 배우기 몰두
나는 지금도 연필 대신 기름때 묻은 스패너를 잡았던 그해 서울 용산의 겨울을 잊을 수가 없다. 특별히 나를 반겨주는 곳은 없었지만 동네 형님 말만 믿고 무작정 서울행을 결심했다.
집을 떠나 서울로 간다는 사실에 누나들이 나를 붙들고 눈물을 훔쳤다. “서울 생활이 그렇게 녹록지 않을 거야. 기술 배울 때까지 윗분이 시키는 대로 말 잘 들어야 한다. 성질부리지 말고….”
어머니나 다름없는 큰누님은 내가 기술을 배우면서 주인한테 혼이나 나지 않을까 그게 걱정인 것 같았다. 덩치는 누나들보다 컸지만 물가에 내놓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막상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겁도 나고 잘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앞날이 막막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무주 시골 촌놈은 기가 팍 죽었다. 자동차가 씽씽 달리고 덕유산처럼 높은 빌딩들이 에워싼 서울 시내를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가 말로만 듣던 서울이구나! 앉은 자리에서 코도 베어 간다는 서울,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나는 동네 형을 놓칠까 봐 보따리를 짊어지고 이 골목 저 골목 졸졸 따라다녔다. 동네 형은 나를 용산 원효로에 있는 자동차 정비업소에 넣어주었다.
정비업소 사장은 먹고 재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받아주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였지만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영민하다는 말을 들었다. 무엇보다 체력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언제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월급은 생각지도 않았고 오직 기술을 빨리 배우기 위해 나는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성심을 다해 일했다.
연필 대신 스패너를 잡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검은 때를 묻혀 가며 배우고 익힌 자동차 정비는 날로 익숙해졌다. 당시 정비업소 직원들은 거칠었다. 툭하면 욕이 터져 나오고 심하면 스패너가 허공에 날아다니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토요일 어느 날, 저녁을 먹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나는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어느 교회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교회를 정탐하러 온 사람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교회를 슬쩍 살펴 보았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즐거운 대화를 하면서 교회 정문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책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았다.
나이는 같은 또래였지만 그들과 나는 딴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직 사춘기 소년이었다. 그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냄새나는 작업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교회는 잘난 사람들만 다니는 그런 곳인 것만 같았다.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손톱 밑의 검은 기름때와 시커먼 손을 그들에게 내밀면 달아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교회가 많지 않아서인지 일하는 사람 중에 누구도 내게 전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교회가 낯설게 느껴졌지만 아무튼 내가 교회에 가면 그들이 상대해 주지 않을 것 같은 사춘기 소심함이 더 강했다. 그래서 교회를 나가기 전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6) ‘車박사’로 인정받았지만 마음은 허전
“공부는 해서 뭐해? 먹고 살려면 기술이나 배워!”
어느 날 정비업체 선임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내 본심을 꺼냈다.
“저 공부하고 싶습니다.”
“공부? 지금 네가 정비 기술 배우는 게 공부여, 뭔 공부?”
“재건중학교를 다니다 말아 좀 서운해서요.”
“야, 일반 중학교 다니다 만 것도 아니고 그 깐 재건중학교 다닌 게 무슨 벼슬이냐. 그리고 네가 공부해서 뭣에 쓰려고 하냐? 시다바리가 그럴 시간 있으면 기술이라도 하나 더 배워서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도록 해.”
내 뜻을 알아주지 못하는 선배의 훈계에 객지 생활의 설움을 느꼈다. 나 같은 사람은 공부하는 게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해보겠다는 생각도 그날로 싹 사라졌다.
대신 그럴 때마다 남산을 보면서 고향의 뒷동산을 떠올렸다. 남산의 소나무를 보면 힘이 생겼다.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아버지, 형님, 큰누님, 작은 누님 모두 그리웠다.
나는 공부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루고 우선은 내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보다 더욱 부지런히 한 발 앞서 움직였더니 나를 믿고 찾는 손님들이 점점 늘었다. 이젠 정비에 있어 가장 복잡한 엔진 부분까지 섭렵하게 되면서 맡은 일에 대한 자신감은 물론 자동차에 있어서 최고라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용산자동차정비업소에서 4년여 정도 근무하면서 제일 어렵다는 엔진까지 마스터했다. 나는 내친 김에 운전면허시험에 도전했다. 1973년, 나는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 당시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이 얼마 없었을 때였다. “어이 정 박사, 축하해. 운전면허까지 땄다면서?”
자동차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으로 ‘정 박사’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나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 박사가 된 것이다. 지금도 나는 엔진 소리만 들으면 차의 어디가 이상이 있는지 안다. 손수 자동차를 점검하고 웬만한 것은 수리도 할 수 있다.
자동차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해박했지만 남들과 같이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지 못한 것이 늘 서운해 배움에 대한 열망은 점점 높아갔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나는 검정고시 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여전히 공부는 나의 삶과는 동떨어진 꿈 같은 얘기였다. 이런 상황이 참 서러웠다. 그래도 나는 남들과 같이 학생이라는 신분을 갖고 공부할 날이 오리라 믿으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몇 년 후, 나는 군대에 갔다. 평생 차도 갖지 못할 사람이 운전면허증은 따서 뭣하겠느냐고 놀리던 사람들이 놀랄 일이 벌어졌다. 이등병이 장성을 모시는 운전병이 됐다. 운전면허증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시엔 아무도 몰랐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7) 제대 후 과일행상 하다 치킨점 열어
스물다섯 살, 군생활을 잘 마치고 제대했다. 장군 운전병 경력 덕에 모 회사 사장 기사로 일하게 됐다. 그 회사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1979년 결혼했다. 서울 신수동 방 한 칸짜리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하루에 연탄 2장은 피워야 했지만 1장으로 버텼다. 얼마 후 기쁘게도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했다. 하지만 아내는 라면 1개를 반개씩 쪼개먹을 만큼 지독하게 알뜰했다.
그렇게 힘든 겨울을 나고 80년 봄, 우리는 신당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8월에 아이가 태어났다. 역시 이웃사촌이었다. 옆 방에 사시던 신일교회 권사님이 우리 집 일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도움을 주셨다. 그 땐 그분의 은혜를 몰랐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 교회에 나갈 여유가 없었다. 그분은 6년 전 우리 부부가 신일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이광선 목사님과 함께 가장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이가 태어나자 앞으로의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동차 기술은 있었지만 직장생활보다는 내 사업을 하고 싶었다. 나는 왕십리 중앙시장에서 하루 500원에 리어카를 대여했다. 새벽에 시장에 나가 과일을 떼어다 팔았다.
“과일 사세요. 토마토 사세요!” 처음엔 모기 소리보다 작았지만 점차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나가시던 목사님이 “그렇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외치면 누가 당신의 과일을 사먹겠느냐, 자신 있게 목청껏 소리쳐야 팔린다”는 말씀을 듣고부터다. 그날 이후 내 목소리는 중구의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번져 나갔다. 폭염에도 혹한에도 장충단 고개를 넘어 남산자락을 굽이돌며 리어카와 한 몸이 되었다. 내 과일을 사려고 기다리는 고객이 있을 정도였다.
마침내 84년, 종로 5가에 작은 치킨 가게를 열었다. 오늘의 ‘치킨 사업’의 밑거름이 됐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보니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악마의 혓바닥처럼 널름거리며 가게를 불태우고 있었다.
“여보! 우린 이제 어떡해요.” 아내는 넋을 잃고는 흐느꼈다.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내 한 목숨에 열한 식구의 목줄이 걸려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다면 기적을 보여주세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그렇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가게는 잿더미로 변했다.
당시 우리는 약수동 꼭대기, 그야말로 산동네에 살았다. 그 허름한 곳에 식구가 자그마치 열둘이나 되었다. 시골에서 처남과 처제, 그리고 내 형님의 자녀들까지 불러들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남과 처제들은 장인과 장모가 돌아가신 후 돌볼 사람이 없어 아내와 의논한 끝에 우리가 서울에서 공부시키며 보살피기로 하였다. 결코 여유롭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아내는 열 개가 넘는 도시락을 싸면서도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이들의 목소리로 마치 고아원을 방불케 했다. 이 아이들을 생각하니 이대로 마냥 실망하고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새벽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일아, 다시 시작해라,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8) 97년부터 치킨 체인점 사업 시작
아내와 나는 화재가 난 바로 그날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복구에 매달렸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잖아.” 단층이었던 가게를 2층으로 올렸다.
연탄 1장으로 겨울을 나던 시절로 되돌아갔다. 24시간 일했다. 1년 동안에 빌린 돈을 모두 갚고도 여유가 조금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사람이 변하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990년, 마침내 서울의 중심인 중구 한복판 명동에 치킨 가게를 오픈하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현재 전국 500여 개의 체인점을 둔 ‘둘둘치킨’(둘이 만나 맛있게 먹는)의 모태가 된 곳이다. 장소를 옮겨 오픈한 치킨 가게이니 만큼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맛을 개발하여 세계 최고의 치킨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97년 본격적인 체인점 사업을 시작했다. 장사가 안돼 폐점할 경우 인테리어 비용 50%를 환불해 주는 사후보장제도 등으로 신뢰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벌처럼 날아서 나비처럼 놓아라”는 둘둘치킨 직원들의 구호다. 손님을 대할 때 빠르고 깨끗하고 공손하게 대하라는 의미다.
사람들은 나를 ‘닭 박사’라고 불렀다. 유명 외국산 브랜드의 국내 시장 진출로 골목 국산 치킨집이 속속 문을 닫는 상황 속에서도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치킨 가게를 새로 연 어느 날, 가게에 몹시 궁색해 보이는 열댓 명의 꼬마 손님들이 몰려 왔다.
“엄마, 엄마!”
함께 온 젊은 아가씨에게 꼬마들은 엄마라고 불렀다. 젊은 아가씨 는 겨우 치킨 한 마리를 시켰다.
“아가씨, 이 아이들은 누굽니까?”
“예, 숭의여전 옆에 있는 군경유자녀원에서 온 아이들인데 닭 좀 먹이러 왔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치킨 몇 마리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울리며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
나는 1991년부터 지금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셋째 주일마다 치킨 30마리를 싸 가지고 보육원으로 가서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흐뭇해 했다. 그때마다 어린 시절 배를 곯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금방 낳은 계란을 당신이 드시지 않고 나에게 건네시던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웠다.
치킨을 들고 보육원을 방문하는 날이 되면 아이들은 멀리까지 마중 나와 나를 기다렸다.
“치킨 아저씨, 어서 오세요!”
“치킨 아저씨, 고맙습니다!”
나는 형편이 되는 대로 겨울철 난방 연료로 사용하는 석유를 지원하기도 했고, 보육원 수리하는 데 작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편지를 써 주던 아이들이 성인이 돼 요즘도 찾아온다.
고생 끝에 자수성가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에 집착하는 경향이 더러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생한 만큼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인생철학이다. 내가 존경하는 사업가들은 많지만 특히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꼽는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9) 단내나게 주경야독… 만학의 꿈 이뤄
치킨 사업을 시작한 지 벌써 사반세기가 흘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둘둘치킨’은 국내에만 500여개의 체인점이 생길 정도로 성장했다. 지난 25년 동안 변하지 않는 신념이 있다. “분명한 목표를 가져라.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창조적으로 일하라. 일류가 아니면 죽는다. 일류를 만들어라.” 바로 고(故) 이병철 회장의 좌우명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피자 업체인 도미노피자 사장 토머스 모너건도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하늘의 별을 따겠다는 노력을 하라”는 신념을 마음에 새기고 공장 직공으로 시작해 성공한 사람이다.
불혹을 넘어서면서 사업 외에 지방정치, 만학의 꿈도 펼쳤다. 1995년에는 검정고시 학원으로 유명한 수도학원에 등록했다. 상경한 뒤부터 항상 공부에 대한 꿈을 잃지 않고 있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군 제대 후 직장 다니느라, 장사하느라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특별한 목표를 가지게 됐다. 나처럼 어려운 여건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등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연필을 잡았다. 가게와 학원을 오가는 ‘주경야독’의 날이 이어졌다. 입에 단내가 떠날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몇 년 후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2005년에는 동국대 경영학부와 북한학과(복수전공)를 졸업했다. 올해에는 고려대 박물관 제5기 문화예술 최고과정과 국민대 정치대학원 의회과정도 수료했으며 국민대 행정대학원 지도자과정도 마쳤다.
정치활동에도 시동이 걸렸다. 98년 6월 마침내 제3대 중구의회에 입성했다. 2000년에는 구의원직을 사퇴하고 보궐선거에 출마, 서울시의원에 당선됐다. 2002년에는 47.3%의 지지로 당선됐다.
2006년 7월 민선 4기 제5대 중구청장으로 선출됐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청장 취임 후 가장 먼저 구청장실을 1층으로 옮겨 개방했다.
2007년에는 효도특구 테마송인 ‘어버이의 사랑’ ‘내 사랑 옥화’ 등 6곡을 수록한 노래를 취입해 ‘가수 구청장’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요즘도 노인복지관에서 만난 노인들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청하면 즉석에서 흔쾌히 노래를 부른다. ‘어버이의 사랑’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다. 내가 만나는 노인 모두가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는 항상 상복이 따르게 마련이다. 특히 기초자치단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주요 역점 사업을 통해 전국단위 평가와 서울시 평가에서 총 98회 수상하고 58억원의 인센티브를 확보했다. 서울시 청렴도 개선 대책, 건강도시 사업 평가 등 최우수 구로 선정되고 전국기초단체장행정대상·효도특별상을 비롯해 대종상영화제 감사패 수상, 2009년 대한민국 장한 한국인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지만 한 가지 이루지 못한 상이 하나 있다. 1년에 최소 100명을 전도해 전도왕상을 타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10) 신앙의 길 이끌어준 친구 오지석 집사
나에겐 둘도 없는 친구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공개적으로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전하지 못했다. 내가 어려운 고비마다 정신적인 도움을 받았던 신일교회 오지석 집사다. 정말로 고마운 친구다. 이 친구의 우정 어린 기도와 전도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정동일이라는 인물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에게 올바른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사회에서 만난 친구지만 고향 친구 못잖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그는 나의 모든 것을 믿어줬다.
그는 늘 나도 교회에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나의 울퉁불퉁한 신앙생활을 변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난 참 매정하게도 나만 생각하면서 살았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십수 년간 그렇게 지내다가 2004년에야 우연히 다시 만났다. 다 변했지만 오 집사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어이 정동일, 이번에는 꼭 우리 교회에 나와야 하네. 자네에게 줄 선물이 있어. 예수님이 특별히 자네에게 주시려고 오랫동안 준비하신 거야. 자네도 아마 매우 기뻐할 거야. 궁금하거든 주일날 예배 드리러 오시게. 동부인 하는 것 잊지 말고…”
오 집사의 끈질긴 전도에 우리 부부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내가 신일교회에 나간 후,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금순(59) 누님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누님의 목소리가 떨렸다.
“동일아! 잘했다. 정말 잘했어! 주님께서 너를 선택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네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기도하기 바란다.”
누님은 미국 뉴욕으로 시집가신 후,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듣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자랑하는 분이다, 점순(61) 큰누님은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에 엄하면서도 자상했지만 작은 누님은 눈물과 정이 많았다. 두 누님 모두 오래 전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특히, 금순 누님은 이억만리 타국에서 나를 위해 눈물의 기도를 많이 하셨다.
친구의 말에 복종한 결과는 놀랍고 엄청났다. 2년 후에 구청장이란 명함을 새겨주셨다. 내가 없는 둘둘치킨은 더 잘 돌아가고 있다. 내가 출석하는 신일교회 이광선 담임목사님은 내게 ‘구민들을 예수님처럼 섬기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동안 구청이 중심이 돼 펼치던 봉사활동에 교회 성도들의 온정이 실리자 주민들의 호응도 좋았다.
언제부턴가 내 입에서도 “예수를 믿으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비신자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시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덕담을 건넨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그냥 끝내지 않는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려면 보약보다 수백 배 더 좋은 신약과 구약을 드세요”라고 한다. 얼굴이 익은 분들 중에는 “청장님, 저도 지난주부터 교회에 나갑니다”라고 인사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략 손으로 꼽아보면 올해만 한 50명은 넘을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10) 신앙의 길 이끌어준 친구 오지석 집사2009.12.22 17:40
나에겐 둘도 없는 친구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공개적으로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전하지 못했다. 내가 어려운 고비마다 정신적인 도움을 받았던 신일교회 오지석 집사다. 정말로 고마운 친구다. 이 친구의 우정 어린 기도와 전도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정동일이라는 인물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에게 올바른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사회에서 만난 친구지만 고향 친구 못잖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그는 나의 모든 것을 믿어줬다.
그는 늘 나도 교회에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나의 울퉁불퉁한 신앙생활을 변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난 참 매정하게도 나만 생각하면서 살았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십수 년간 그렇게 지내다가 2004년에야 우연히 다시 만났다. 다 변했지만 오 집사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어이 정동일, 이번에는 꼭 우리 교회에 나와야 하네. 자네에게 줄 선물이 있어. 예수님이 특별히 자네에게 주시려고 오랫동안 준비하신 거야. 자네도 아마 매우 기뻐할 거야. 궁금하거든 주일날 예배 드리러 오시게. 동부인 하는 것 잊지 말고…”
오 집사의 끈질긴 전도에 우리 부부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내가 신일교회에 나간 후,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금순(59) 누님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누님의 목소리가 떨렸다.
“동일아! 잘했다. 정말 잘했어! 주님께서 너를 선택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네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기도하기 바란다.”
누님은 미국 뉴욕으로 시집가신 후,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듣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자랑하는 분이다, 점순(61) 큰누님은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에 엄하면서도 자상했지만 작은 누님은 눈물과 정이 많았다. 두 누님 모두 오래 전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특히, 금순 누님은 이억만리 타국에서 나를 위해 눈물의 기도를 많이 하셨다.
친구의 말에 복종한 결과는 놀랍고 엄청났다. 2년 후에 구청장이란 명함을 새겨주셨다. 내가 없는 둘둘치킨은 더 잘 돌아가고 있다. 내가 출석하는 신일교회 이광선 담임목사님은 내게 ‘구민들을 예수님처럼 섬기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동안 구청이 중심이 돼 펼치던 봉사활동에 교회 성도들의 온정이 실리자 주민들의 호응도 좋았다.
언제부턴가 내 입에서도 “예수를 믿으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비신자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시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덕담을 건넨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그냥 끝내지 않는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려면 보약보다 수백 배 더 좋은 신약과 구약을 드세요”라고 한다. 얼굴이 익은 분들 중에는 “청장님, 저도 지난주부터 교회에 나갑니다”라고 인사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략 손으로 꼽아보면 올해만 한 50명은 넘을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11) 어르신들 위해 복지에 앞장서
구청장이 되고 나서 나는 좀 더 효율적으로 지역 주민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중구 관내의 종교단체 결합체인 ‘종동협의회’(종교단체와 동사무소협의회)를 만들었다.
다행히 나의 뜻을 아는 종교 지도자들이 선뜻 관심을 갖고 협의회를 구성하게 됐다. 종동협의회는 지역 주민의 애로 사항과 어려운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종교도 ‘사랑’을 배제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 구 지역에는 80여 개의 크고 작은 교회가 있다. 이 중에서 일부 대형 교회를 제외하고는 운영이 넉넉하지 못하다. 지역적으로도 낙후된 동네가 많아서 근근이 살아가는 시민들도 많다. 교회가 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한 체질로 바뀌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어르신, 정동일입니다.”
나는 복지 중구를 꿈꾸면서 무엇보다 먼저 어르신을 생각한다. 오늘날의 발전을 위해 밑거름 역할을 한 어르신들에게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렵고 힘든 시절을 열심히 살아오신 이분들이야말로 바로 국가의 부흥과 삶의 터전을 일구어낸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구 의정활동을 하기 전부터도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노인들이 존경 받고 대우 받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가 터가 있는 이곳을 ‘대한민국의 충효 1번지’로 만들고 싶다.
어르신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복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노인복지를 우선적으로 해결해 부모를 공경하는 풍토를 정착시키고 우리 구의 버팀목이 된 분들을 편안하고 즐거운 노후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지혜를 짜내야 한다.
특히 내 자신이 못살고 어려웠던 시절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기에 더욱 간절하고 절실하다. 노인복지에 남달리 관심을 쏟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의 노력이 지난 한국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며 우리 경제의 틀을 세우고 대한민국의 심장인 중구 지역을 굳건히 지켜준 어르신들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한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참 진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 윌리엄 로젠버그라는 분은 트럭 한 대를 가진 회사에서 시작해 세계에서 가장 큰 도넛과 커피 체인을 만들었다.
그가 72세 생일 자리에서 남긴 어록은 기막힌 명언이다. 나는 이 말씀을 늘 전한다. “성공은 지식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태도에 있다.” 처음엔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나이 쉰 줄에 들어서면서 겨우 깨닫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정동일 (12·끝) 매 순간 최선 다하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
윌리엄 로젠버그는 소년 시절 몹시 가난했지만 신앙을 지키면서 십일조를 드리며 열심히 살았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성실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태도가 인생의 성공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 결과 30세에 ‘모빌런치 서비스회사’를 설립하고, 세계적인 ‘던킨 도넛’ 상표를 개발했다.
그는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가난과 역경이라는 돌부리에 쓰러지지 않는다. 지금 내가 잡고 있는 것이 고작해야 손수레 한 대나 트럭 한 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10년 후라도 더 나아질 리 없다. 하나님이 타고 계시다는 마음으로 달리면 천만 리 길도 신나게 갈 수 있다.
나는 공부할 때를 놓치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다시 책을 잡았다. 계속해서 확장되는 사업과 정치에 입문하면서 정신없이 지냈다. 그런 와중에서도 성경은 놓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힘들게 일하며 짬을 내 학업에 매진하는 분들이 참 많은 줄 안다. 고학을 한 선배로서 꼭 당부하고 싶은 점은 인생이란 참으로 긴 여정이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면 반드시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오긴 하지만 어떤 이는 눈앞에서 놓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소중한 기회가 온 것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때를 기다리며 항상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 또한 그 기회를 또렷하게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특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학업은 물론 매사에 적극적으로 살기를 바란다. 아무리 무겁고 어려운 짐이라도 하나님께 맡기면 맨손처럼 가볍다.
나는 정규 중학교에 못 가고 재건중학교도 중퇴했다. 15세에 정비소 ‘시다’였다. 30대에 손수레 과일장수였다. 40대에 ‘둘둘치킨’ 사업을 일으켰으며, 구의회 의원과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 했다. 그리고 53세에 중구청장이 되었다. 희망이 없다고 비빌 언덕이 없다며 눈물짓는 ‘이태백’ ‘사오정’들에게 말한다. “희망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꿈이 없는 것이다. 꿈은 꾸는 즉시 이루어지지만 참고 기다려야 한다. 좋은 꿈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도 서울의 남산과 소나무를 사랑한다. 지금까지 중구의 낡은 이미지를 거둬들이고 진정한 서울의 중심으로 새롭게 도약하여 경제 문화 교육 복지 환경 등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뤄내겠다는 각오와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효도구청장’ ‘소나무구청장’ ‘교육구청장’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게 참으로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
나에겐 아직도 꿈이 많다. 새해에는 우선 ‘복음(福音)구청장’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찬양과 기도, 전도에 심혈을 기울일 생각이다. 국민일보 창간 21주년 기념호부터 시작해 성탄절까지 설익은 간증을 참고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행복하고 즐겁고 뜻깊은 성탄절을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