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에세이 : 조선(대한제국) 망국의 풍경
1.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였고 정미조약을 통해 일본인 차관이 정치와 행정을 장악하고 군대가 해산됨으로써 사실상 조선(대한제국)의 생명은 끝이 났다. 마지막 남은 숨결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분투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지속되었다. 하나는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과 청년의 힘을 기르는 운동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무장투쟁이었다.
2.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은 서북 지역이었다. 안창호를 비롯한 서북인들은 비밀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치밀하면서도 은밀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운동과 병행하여 조선인의 실력과 정신을 살리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곳곳에 많은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서북인들의 독립운동 방식은 남부 지역 특히 전남 지역의 무장투쟁과는 다른 성격의 투쟁이었다. 한 학자는 이들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부지역 사람들이) 상당히 동기주의적인 현재형 운동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거기에 비해 서북지방의 운동은 아주 실질적인 잠재형의 운동으로 일본 관헌의 무력적인 우세만으로는 억압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3.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이념과 이론은 ‘사회진화론’과 ‘영웅숭배론’이었다. 중국 양계초의 저작 『신민설』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 ‘약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이라는 사회진화론의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여 힘과 실력이 없다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에 도달하였고, 교육에 많은 힘을 기울인 것도 이러한 사상적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난세에 영웅이 요구되듯이, 한국을 비롯한 외국의 위대한 영웅들의 일대기를 책을 통해 발표하거나 신문에 게재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특히 열성적이었던 인물은 신채호였다. 또한 신채호는 조선의 유교를 비판하며 상무정신의 회복을 강조하였다. “민족의 운명에 상무정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문을 숭상하는 유교교육이 한국의 군사적 용맹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 그 생존능력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했다.
4. 일본의 만행과 침투에 가장 격정적으로 저항했던 지역은 남부지역 특히 전남지역이었다. 다른 지역의 무장투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1907년부터 1911년까지 호남지역에서는 의병 114만이 참여하였다. 결국 일본은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일명 <남한대토벌작전>을 감행하여 의병투쟁을 종결시켰다. 호남인들의 투쟁은 이후 민중운동의 핵심적 가치를 보여준 활동으로 평가되었으며 이후 역사적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무장투쟁이 민중들의 자발적인 반민족, 반외세, 반계급적인 운동이라는 주장에 반박하여 호남의병은 ‘충군애국론에 기반한 의리심’으로 규정하는 보수적 학자들의 견해가 충돌한 것이다.
5. 조국의 독립을 지키려는 투쟁은 개인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지속되었다. 일본의 한국 강점을 옹호하던 미국의 일본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사건이 1908년 미국에서 벌어졌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개별적으로 거사에 참여했고 스티븐스는 장인환의 총을 맞고 사망한다.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다음해인 1909년 조선 침공의 거두였던 이토우 히로부미를 러시아 할얼빈에서 저격하는 안중근의 의거가 잇달았던 것이다.
6. 하지만 일본의 침략에 온 민족이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수많은 기회주의자들은 일본과 한국의 합병을 주장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세상의 변화에 무관심한 채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의 언론 또한 많은 선각자들이 신문을 발행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지만 신문의 발행부수는 지극히 적었고 대중적 영향력을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토우의 죽음 이후 일본은 한국의 청원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한국과 일본의 병합을 1910년 8.22일 체결하고 8.29일 공포한다.
7. 1910년 8월 29일, 일명 ‘경술국치’라 불리는 이날은 특이할 정도로 큰 소란이 없었다고 한다. 과거 1896년 을미사변,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군대해산 때 보여주었던 저항의 기운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을 통해 모든 권리를 빼앗긴 대한제국의 운명을 미리 예견했던 국민들로서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도록 미리 계획적으로 사전의 위험요소를 제거한 일본의 치밀한 공작의 결과일 수도 있다. 어쨌든 최린은 당시의 풍경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날 종로거리의 조선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흥청거리며 장사를 하고 먹고 마시는 일상을 잃지 않았다.”
8. 당시 외국인들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국인들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 비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약하고 국가의 운명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국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국민들의 슬픈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국가와 관리들은 백성들을 수탈하고 탄압하였고, 양반들은 계급적 지배를 통해 양인들을 핍박했던 것이다. 그런 울분과 분노가 국가라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른다. 국가가 자신의 보호처가 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반 국민들은 종교의 보호막이나 가문의 보호막 그리고 권력의 보호막 속으로 들어가 각자의 생존을 보장받아야 했던 것이다.
9.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국민, 민족, 국가라는 어휘는 철저하게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용된 말이다. 근대적 정치이념이 도입되고 그것의 가치와 중요성을 자각하면서 사람들은 차츰 민족과 국민의 의미를 공유하게 되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날, 보통의 사람들은 나라를 잃었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제의 강점 이후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토지를 강탈당하고 신체적·재산적 피해가 커지면서 국민들은 그 실체를 경험으로 지각하게 된 것이다. 불과 9년 후 1919년 <3.1운동>에서 보여준 강렬한 민족과 국민의 통합된 힘은 이때에는 아직 학습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변화를 통해서 역사를 움직이는 강력한 이념의 힘은 구체적인 경험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실체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조선(대한제국)의 망국, 그때 우리는 아직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댓글 - 민중의 삶은 우선 경제적 안정이 최우선이다.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세상이 천국이요 극락 세계이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 생존의 절박함이 우선이다. 문제는 민초들의 삶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타락과 몰락이었다. 당연한 역사적 흐름의 결과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해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