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보다 먼저 사형선고를 받은 헤이그밀사 이상설 연보
명동촌 교회 안에 있는 김약연 기념실(?)을 돌아보면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하였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김약연선생을 그의 조카인 윤동주의 명성에 의지하여 설명한 대목이 한국에서 독립운동가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 같아서 서글펐다.
용정에서 옛 대성중학교 자리에 있는 윤동주 시비와 6개 중학교 전람관, 이상설 기념실을 돌아보면서 받는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있는 우리의 교육현실과 남북분단의 상황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왜 우리 세대가 독립운동 하면 3.1운동을 떠올리고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고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떠올리게 되었을까를 묵상하면서
해방 이후 독립운동, 특별히 무장독립운동을 외면하고 싶었던 자유당정권과
조선사편수회를 그대로 이어받은 친일사학자들과
지식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해방정국을 살아야 하는 국내 및 유학파 지식인들의 의식적인, 무의식적인 자기변명, 정당화와 합리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적인 식민지 해방의 흐름과 독립을 연합국 승리의 부산물로 강조하면서
피 터지는 한국 독립운동을 축소, 폄하시키고 싶은 사람들이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3.1운동,
유관순을 잔 다크로 만들고,
감옥에서 사망한 유학생 윤동주를 위대한 저항시인으로 앞세우며
독립운동의 피 냄새를 제거하고
독립운동의 50년 내지는 40년의 역사를 20여년으로 축소하고
전 생애를 바친 독립 운동가들의 고통과 좌절, 분노와 저항, 고문과 사형을 은폐하며 우리의 독립운동을 가볍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익을 보는 집단이 누구인가?
독립운동을 덮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누구인가?
독립운동이 역사의 전면에 나올 때 불편한 사람들,
자신의 비겁한 과거를 숨기고 싶은 사람들이 바로 독립운동을 전체를 폐기할 수는 없고 하니
피 냄새가 적당히 나고,
적당히 울분을 토하며 감상적인 기분으로 읽을 수 있고,
읽어도 피가 끓어오르지 않고,
적당히 울분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택하여서
우리의 독립운동을 가볍게 포장하였을 것이라는 묵상을 하면서
해방 직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위한 다양한 움직임과 주도권을 잃지 않기위한 다양한 몸부림을 보았다.
그들에게 조국은 없고 자기와 자기 집단의 패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국민은 없고 자신과 자신의 가문의 영광과 권세만 있을 뿐이었다.
만주독립운동사의 기초를 놓으신 이상설의사,
김약연지사의 생애를 묵상하며 독립운동에 무관심했던 나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하였다.
이상설의사는 일본에 의해 세워진 친일정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최초의 독립운동가이시다. 그는 1907년 8월 9일,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1906년 4월 망명 이후로 조국의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하였다. 그는 밀사의 일을 마치고 연해주로 돌아와서 러시아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전심하였으나 깊은 좌절감에 빠져 중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917년 3월, 47세의 젊은 나이에 니콜리스크에서 서거하였다.
1870. 12. 7 : 충청북도 진천에서 부친 이행우와 모친 벽진 이씨의 맏아들로 태어남.
1876. : 서울 중구 장동에 사는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1886년 저동으로 이사. 이회영일가와 이웃이 됨)
1882. 4. : 양부와 생부 사망.
1883. : 생모 사망.
1885. : 참판 서공순의 딸 달성 서씨와 결혼.
1888. : 신흥사에서 신학문 학습
1894. : 갑오년 과거시험 병과에 합격. (조선왕조의 마지막 과거시험이었으며
이완용, 이승만도 합격, 동학농민전쟁 승전 기념 과시)
1895. 4. 7. : 비서감 좌비서랑에 임명(6. 17. 면직)
1896. 1. 25. : 성균관 교수 겸 관장 임명.
2. 22. : 성균관 관장 사임, 한성사범학교 교관에 임명.
4. 19. : 탁지부 주임관 임명.
1904 ~ 1906 : 전덕기목사가 세운 상동청년학원의 특별 후원자로서 헐버트, 이회영, 이동녕 등과 활동.
1904. 1. 14. : 궁내부 특진관 해임( 종 2품/ 임명일이 누락됨).
6. 22. : 일본 황무지개척권 요구 반대 상소.
8. 4. : 대한협동회의 회장
1905. : 학부협판, 법부협판, 관제이정소 의관직을 거쳐서 의정부 참찬에 임명(정2품).
1905. 11. 5. :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 박탈당함.
1905. 11~12. : 을사늑약 후 5차례 사직소 제출하며 늑약에 반대하는 상소, 자결 시도,
관직 사임 및 나라 주권회복 운동에 전념.
1906. 4. 18. :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이동녕 동행.
8. : 만주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서전서숙 설립.
1907. 3. : 헤이그 밀사 대표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과 만남.
5. 21. : 러시아 페테르부르크행. 이준과 동행.
6. 4. : 철도편으로 독일행. 이준, 이위종 동행.
6. 25. : 헤이그 도착. 융호텔 투숙, 평화회의에 고종친서 전달 및 회의 참석권 요구.
6. 27. : ‘공고사’와 ‘일인불법행위’를 세 밀사의 연서로 평화회의 의장, 각국대표,
신문사를 통하여 공표.
6. 30. : 영, 미, 독, 불 대표위원을 만나지지 호소. 냉담한 반응.
7. 9. : 기자단의 국제회의에 이위종 연사로 초빙됨. 밀사들 동행.
이위종 불어로 ‘한국의 호소’를 연설.
7. 14. : 이준열사 분사, 공동묘지에 임시 매장.
7. 19. : 영국행. 헐버트, 이위종, 윤병구, 송헌주 동행.
8. 1. : 미국행.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면담 시도했으나 거절당함.
8. 9. : 친일파 정부, 형 구형, 정사 이상설 사형, 부사 이준, 부사 이위종 종신형.
9. : 이준열사 유해 뉴에이크다우묘지에 안장, 윤병구목사, 이위종과 헤이그
YMCA 회원들 참여.
9. 5. : 파리, 베를린, 로마, 페테르부르크 방문.순방외교를 통해서 일제 침략의 잔혹 성과 을사늑약의 폭력성을
알림.
10. 3. : 런던 도착
1908. 2. 27. : 미국행.
3. : 샌프란시스코 공립회관에서 활동.
4. : 신문 연재.
7. : 콜로라도 덴버시 애국동지회에 참석, 미주, 하와이 한인사회의 여러 단체 통 합운동 전개.
1909. 2. 1. : 국민회 결성, 국민회 제1차 이사회에 참여.
4. 22. : 시베리아 행.(국민회)
7. 14. :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독립운동기지로 한흥동 건설(이승희와 협의)
1910. 6. 21. : 13도의군 편성, 외교대원으로 활약.
7. 28. : 고종황제에게 망명과 군자금 요청, 망명정부 수립기도.
8. 22. : 한일늑약 조인.(29일 조약 발효)
8. 23. : 성명회(한국국민의회) 결성, 한국국민의회(성명회)선언서를 기초하였으며 유인 석을 비롯한
8,624명의 독립운동가들의 서명을 받아 미국 등지에 보냄.
9. 11. : 성명회와 13도의군의 인사 42명 러시아 정부에 의해 탄암당함.
이상설의사 우수리스크에 유폐됨.
1911. 봄 : 석방,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옴.
12. 19 : 권업회 조직, 권업신문 간행, 권업회 회장과 권업신문의 주간 역임.
1913. 12. : 밀정으로 매도, 공직을 사임 하바로프스크로 이주. 밀정 오해 풀림.
12. : 북간도 나자구에 독립군사관학교 대전학교 지원.
1914. 5. : 최초의 망명 임시정부 설립, 정통령에 선임됨.
1915. 3. : 상하이에서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 조직, 북경 본부장에 선임.
1916. 초 : 하바로프스크에서 와병,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로 옮겨 투병,
1917. 3. 2. : 사망, 수이푼강변에서 화장, 유언으로 문고 소각.
이상설 의사가 세운 서전서숙은 민족교육, 항일교육의 요람으로서 만주일대에 독립운동의 인재를 키우는 민족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그를 통해서 시작된 교육이 만주일대에 공명되었으며 만주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헤이그밀사로서 그가 느낀 약소국의 설움과 울분, 좌절과 고통, 무력감과 무능력을, 독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대국에 휘둘리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의 문제를 보며 느끼고 있다.
이상설의사의 길에서 우리 갈 길을 본다.
나라의 주권 회복을 위해 정2품직의 직분과 영광을 기꺼이 내려놓은 애국지사!
일제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독립투사!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재산을 바친 서전서숙의 설립자로서 교육가!
독립운동과 아울러서 이민 교포들의 생계와 삶을 생각하며 활동한 애민의 일꾼!
미국, 연해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많은 단체들의 협력과 일치 운동을 벌인 지도자!
통 큰 지도자, 화해와 일치의 지도자.
이상설의사를 추모하며 협력하며 함께 일하는 통 큰 지도자가 많이 나오길 간절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