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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화복문(口是禍福門) (약 3:1-12)
* 오늘 본문은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서두를 뗀 후 “우리는 모두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을 하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선생’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보다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유대 사회에서의 랍비처럼 선생은 예언자들과 비교될 만큼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 야고보의 지적은 자격이 없는 함량미달의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선생, 즉 지도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지난 세월 수많은 함량미달의 지도자들이 민족을 도탄에 빠뜨렸던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부분은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뒷부분의 말은 어느 형태로든 크고 작은 조직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깊이 명심해야 할 내용을 전해준다고 생각한다.
* 야고보가 인정했듯이 우리는 모두 실수를 많이 저지른다. 그래서 말을 하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인격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지만 머리나 손, 발로 저지른 실수보다 혀로 저지른 실수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란 ‘한 번 내뱉으면 되돌릴 수 없는 화살’과 같은 것인데 그 화살은 말을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말을 한 사람까지도 겨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혀는 손잡이가 없는 칼에 비유되기도 한다.
* 말실수로 인한 화를 ‘설화(舌禍)’라고 부르는데 혀로 인해 화를 입는다는 의미지만 ‘설화’의 피해자는 듣는 사람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설화를 일으킨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압도적이지만, 유명 목사들이나 연예들도 가끔 또는 자주 그 대열에 가세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부 고위직에 오르기 위한 검증절차에서 예전에 했던 말이나 글이 다시 화제가 되 낙마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옛날에는 기록을 찾기 힘들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도 기억하지 못 하는 실수들이 파헤쳐지기도 한다.
* 엎질러진 물처럼, 날아간 화살처럼 이미 내 입을 떠난 말은 주워담거나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실수하는데 아무 생각없이 조심하지 않고 살아가면 가는 곳마다 설화를 일으키는 트러블메이커가 되기 십상이다. 박진영 전 KBS 광주 아나운서가 쓴 <한 순간에 관계를 망치는 결정적 실수>라는 책의 표지를 보면 말실수를 줄이며 관계가 90% 좋아진다는 말이 적혀 있다. 그렇다면 말실수가 늘어나면? 관계가 90% 악화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 박진영은 “말을 잘하는 것보다 말실수를 안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책에는 악의적인 실수나 무지에 의한 실수 외에도 선의에 의한 실수도 소개한다. 그 중에 하나가 이런 것이다. “한 대기업 임원인 K씨는 OO대학 출신이다. 명문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특성 있는 학교다. 그는 사석이나 공적인 자리에서도 종종 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별로 좋지도 않은 OO대학 출신이지만.....” 그런데 이 말이 나올 때마다 그 대학 출신 직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지나친 겸손으로 인한 말실수에 해당한다.
* 악의에 의한 말실수는 당연히 조심해야 하지만 선의에서 비롯된 말이라도 상대가 불쾌해 한다면 말실수가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특히 요즘 세상에서는 상대의 외모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이전에는 남자들이 여성들의 외모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해도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요즘은 잘못하면 성폭행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선진국일수록 외모와 몸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환경일수록 외모와 몸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외모가 아니라 능력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 정치인들 등 유명인사들이 설화에 휘말리는 경우 대부분은 여성에 대한 비하 발언 때문이다. 문제가 안 되면 그냥 넘어가지만 문제가 되면 실수로 얼버무린다. 그런데 사실 말실수라는 것이 정말 실수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소 가진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경우가 더 많다. 정말 실수인 경우는 선의에서 호의를 베풀었는데 상대가 그 호의를 오해했거나 호의를 베푼 방식이 잘못된 경우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 외의 경우는 대부분 의식적으로 자제하던 말이 흥분하거나 방심할 때 툭 튀어나온 것이다.
* 이를 “프로이디언 슬립(Freudian Slip)”이라고 말한다. 혀가 미끄러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지불식간에 속마음을 들켜버렸다는 말이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서 유래한 이 말은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나왔지만 단순한 실수가 아닌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의 발로로 사실은 ‘진심’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오류와 결함이 드러나고 있지만 무의식의 영역만큼은 여전히 독보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무의식과 관련 ‘우리 삶에 우연은 없으며 아무 근거도 없이 갑자기 뭐가 떠오르는 일은 없다’고 주장했다.
*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2012년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 출마 선언을 하면서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라고 연설문을 잘못 읽은 일이다. 당시 언론은 단순한 실수라며 해프닝으로 넘겼지만 나중에 이뤄진 국정 운영 과정을 보면 사실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수 있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은 인터넷언론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의 국정 운영 스타일을 보면, '대통령 하기 싫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경우'다”라고 말하며 이 사례를 인용했다.
* 프로이트는 말실수가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의 발로”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평소 갖고 있던 가치관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말로 인해 구설수에 자주 오르는 대표적인 정치인이 미국의 트럼프와 한국의 홍준표인데 그들이 하는 막말은 실수가 아니라 그들이 믿는 가치관을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낸 결과물이다. 그런 습관성 막말이 아니라 평소에는 감춰두고 있던 속생각을 흥분하거나 분노해 쏟아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 역시 감춰둔 속마음을 쏟아낸 것이 실수인 것이지 쏟아낸 말 자체는 진심에 가까운 그 사람의 가치관을 드러낸 것이다.
*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에 대한 교훈을 주는 영화가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명배우 메릴 스트립과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필립 호프만이 주연한 <다우트>라는 영화다. 이번 달 마지막 수요일에 이 영화를 같이 볼까 <공범자들>을 같이 볼까 고민 중인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의논하겠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자신이 속한 교구 학교 학생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플린 신부가 새로 입학한 흑인 학생을 성추행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젊은 수녀의 말을 들은 교장 수녀(알로이시스) 수녀와 갈등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알로이시스 수녀는 그 학교 교장으로 공포와 징벌의 힘을 굳건히 믿는 철의 여인으로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며 플린 신부의 죄를 입증하려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플린 신부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강론 시간에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한 여인이 자기도 잘 모르는 남자에 대해 친구와 험담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을 꿨다. 하늘에서 커다란 손가락이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그녀는 엄청난 죄책감이 들었다. 다음날 그녀는 고해성사를 하러 신부를 찾아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 이어 그 여인은 신부에게 “남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이 죄인가요? 그래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저를 지목한 건가요? 제가 보속을 받아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보속은 카톨릭 사제가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자 신부가 “그렇다. 당신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당신은 죄 없는 이웃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린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서 그 사람이 오명을 벗도록 기도하라. 그리고 진심으로 반성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바로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
* 하지만 신부는 “아직 멀었다”고 말한 후 “그렇게 빨리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집으로 가서 당신의 베개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칼로 베개를 칼로 찢은 후 다시 내게 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인은 집으로 돌아가 신부가 시킨 대로 한 후 다시 돌아왔다. 신부는 칼로 베개를 찢었냐고 물었고 여인은 “그랬어요. 그랬더니 베개 안의 깃털이 다 날아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신부는 여인에게 가서 바람에 날려가 그 깃털을 모두 담아오라고 말했다. 여인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깃털이 바람에 날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신부가 말했다. “남에 대한 험담도 그와 똑같다!”
* 야고보가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에서도 이러저런 설화가 있었을 것이다. 지난번에 살펴봤지만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라는 1장 19절이나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제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된 것입니다”라는 1장 26절의 권면도 그렇고,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부분도 그런 설화에 대한 우려가 담겨있다고 여겨진다. 오늘 본문을 읽으셨으니 아시겠지만 말을 하는 도구인 혀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다.
* 특히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거나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마지막에는 지옥 불에 타 버립니다”라는 6절은 섬뜩할 정도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찬 것”이라는 8절도 마찬가지다.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도 있지만 혀를 잘못 놀려 당할 수 있는 엄청난 재앙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사람의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는 8절의 지적은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안심하지 말고 항상 자신의 말에 조심하라는 경고라고 여겨진다.
* 3-5절에서 설명되듯이 혀는 우리 몸의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말을 다루는 고삐나 커다란 배를 조정하는 키처럼 우리를 망하게도 할 수 있고 흥하게도 할 수 있다. 오늘 설교 제목인 ‘구시화복문(口是禍福門)’은 입을 잘 놀리면 복의 문이 되지만, 잘못 놀리면 화의 문이 된다는 말이다. 9절과 10절처럼 입에서 찬양이 나오면 복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는 말이 나오면 화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어느 쪽이 유익한지는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아는 만큼 살지 못한다.
* 그래도 언젠가는 제대로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변화되고 그 변화가 쌓이고 쌓이면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지레 포기하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없을뿐더러 퇴보하게 되고 말 것이다. 학문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오르지 않으면 즉시 물러나게 된다는 말처럼 삶도 마찬가지다. 노력하지 않으면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퇴보하게 된다. 시대의 변화가 흐르는 물처럼 빠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회의 모습은 어떨까?
* 지난 주 카톡에도 올린 것처럼 순천시의회 유영갑 의원이 발의한 청소년 노동인권 보호 및 증진 조례안이 한기총 산하 순기총 소속 목사들의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 15일 안건 상정해 표결을 하기로 하고 그 전날 시민들에게 찬반 입장을 알리기 위해 본회의실에서 찬반 토론자 3명이 참석해 토론을 하기로 했고 나는 찬성 토론자 중 한 명으로 추천되어 참석했다. 그런데 토론회 몇 시간 전 참석하기로 한 순기총 목사들이 불편하다며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보해 찬성 측 토론자들만 참석해 입장을 개진했다.
* 그리고 다음날 시의회 의장과 의원들이 참석한 토론회를 거부했던 순기총 목사들은 11시 시의회 앞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이며 시의원들을 압박해 결국 안건 상정이 다시 보류되고 말았다. 토론을 통한 여론 수렴 과정이 보장됐는데 힘으로 밀어붙이는 이들의 태도는 일단 비민주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 또한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나는 지난 여름부터 이 문제에 대해 시민단체들과 입장을 같이 하며 그 과정에서 순천지역 교회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파악하는 중인데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 특히 이번 토론회 준비를 하면서 이전에 순기총에서 의회에 전달한 서한을 받아봤는데 내용이 정말 가관이었다. 이전에도 말로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들의 주장이 그대로 문자화된 것을 보니 한심했다. 청소년 노동인권 조례안이 통과되면 청소년들 간에 동성애가 더 만연해 에이즈가 확신되니 반대한다는 주장은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본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노동인권조례가 통과되면 모든 노동현장에서도 군대와 학교처럼 문란한 성적지향의 행위가 이루어져도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에이즈가 감소추세에 있는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매년 1천명 이상 감염자가 늘고 있습니다....”
* 순기총에서 언급한 ‘세계 다른 나라’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 나라들에서 에이즈가 어느 정도 감소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동성애 결혼도 합법화되는 추세이고 일부 교단에서는 동성애 성직자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에서 에이즈가 줄어든다고 주장하면서 청소년 노동인권 조례안이 통과되면 에이즈가 확산될 것이라고 반대하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 지난 15일 광장신문 기자가 찍은 사진과 당일 배포된 성명서, 순기총 회장의 발언 녹음파일을 전해 받아 보고 들으면서 더욱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믿는다는 예수와 내가 믿는 예수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참으로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랑을 들먹이면서 노동과 인권을 함부로 경시하고 불온시하며 생각이 다른 이들의 주장을 좌경이다 용공이다, 동성애 지지다 하면서 멋대로 재단하는 이들이 믿는 예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입은 화의 문일까 복의 문일까?
* 요즘 기-승-전-동성애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마치 동성애가 모든 정치적 입장의 기준이거나 상대를 공격하는 최상의 무기인 것처럼 인식되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상대의 입장이 자신과 다르면 빨갱이, 종북으로 몰아붙이던 습성이 이제 동성애 지지자라는 딱지붙이기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이 문제를 톱기사로 다뤘는데 종북 공세가 안 먹히자 자유한국당 등 극우세력이 보수 기독교와 함께 동성애라는 색깔론을 들고 나왔고 국민의당이 이에 합세해 김이수 헌재소장 후보자를 낙마시켰다고 분석하고 있다.
*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야고보는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하며 “짠 샘이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한 입으로 예수의 사랑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를 동시에 뱉어낸다. 특히 순기총의 최근 행태는 청소년들의 노동인권 보호 노력을 동성애와 결부시켜 저주하며 방해하려는 치졸하고도 비열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마을에서 지혜롭다고 소문난 노인을 찾아가 몹시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제자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습니까? 내 말 좀 들어 보십시오.” 그러자 노인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시오. 당신은 지금 내게 이야기 하려는 내용을 세 가지 체에 걸러 보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리둥절해진 그가 되물었다. “세 가지 체라니요?” “먼저 당신이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 그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도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선(善)이라는 체에 걸러 보지요. 그 이야기가 진실한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선한 것입니까?” “글쎄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그러면 세 번째로 당신의 이야기가 꼭 필요한 이야기 입니까?” 노인의 물음에 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자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야기 하려는 내용이 진실한 것도, 꼭 필요한 것도 아니라면 그만 잊어버리시오.”
* 오늘 본문과 연관해 말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라는 우화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 이야기가 진실이고 선한 것이며 꼭 필요한 말이라면 그 말을 해야 한다. 탄압을 받거나 불리한 지경에 처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가 청소년 노동인권 보호 및 증진 조례안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달림이님이 카톡에서 제안했을 때는 15일에 조례안이 가결되거나 부결되거나 결정되니 시기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시의원들이 일부 목사 및 교인들의 항의에 밀려 보류되는 모습을 보고 우리라도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해야 하는 교회가 약자의 편에 서서 노동 인권 보호에 앞장 서 지지해도 모자랄 판에, 순기총 소속 일부 교회들은 조례안에 언급되지도 않는 동성애나 조례안 추진 단체들의 성향을 거론하며 극렬한 반대로 안건 상정을 보류시켰다. 이럴 때 누군가 나서서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라며 낙담해 하는 시민단체와 청소년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촛불 정국에서 우리는 순천지역 어느 교회도 하지 못한 “박근혜 퇴진”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 길이 옳은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 나는 그동안 성주 소성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드 반대 투쟁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살기 회원 목사, 교인들이 상주하다시피 하며 사드배치를 막으려 애쓰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틀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과 조금 동떨어져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우리가 전국의 모든 현안에 대해 일일이 다 관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은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순천지역의 현안에 대해서는 우리 교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
* 말씀을 정리하겠다. 우리의 입은 화가 나오는 문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나오는 문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저주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우리 각자의 몫이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이 결정되고 우리 삶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정의와 예수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 주변의 소외당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돕고 지원하는 말과 행동을 하며 그로 인해 예수의 사랑이 널리 전해지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