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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2박3일 간 밀양 산내면에 다녀왔습니다. 가지산 여름풍경 취재차였습니다. 극한직업인으로서 비록 오래 그리고 느긋하게 즐길 수는 없었지만 여름 산의 정수는 어느 정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형형색색의 봄꽃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따뜻한 마음이라면, 초여름의 정수는 초록이 전하는 몸과 마음의 평화라 할 만합니다. 게다가 늦게 개화한 꽃들까지 지천이니 마음도 봄날처럼 온화해집니다.
일반인들은 보통 방송 관련 일을 화려한 직업으로 생각하시겠지만, 실상은 ‘개뿔’입니다. 이 분야의 직업보다 열악한 것이 흔치 않을 정도입니다. 책상머리 관리직이야 괜찮은 대우를 받지만, 제작 쪽은 형편없습니다. 90% 이상의 종사자들이 평균 1년 계약직 또는 외주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생활도 안정적이지 못합니다.
밤샘 작업이 비일비재한데다가 자다가도 호출이 있으면 밤낮 언제든지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급여나 보험 등도 아주 취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잉여인력이 넘쳐나는 가장 큰 까닭은 대체 직업을 구할 형편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일 자체가 좋아 머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중국 등 제작 환경이 좋은 나라로 진출하기 위한 스펙을 쌓으려는 젊은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러다가 양질의 인력과 컨텐츠가 다 해외로 빠져나가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한때 아시아에서 방송과 영화의 메카로 여겨졌던 홍콩이나 대만의 문화산업이 한순간에 몰락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늦은 저녁 대충 때우고 잠자리에 들기 전, 너나 할 것 없이 모바일을 꺼내듭니다. 와이파이는 접속불량, 왔다갔다 연결되었다 끊어졌다는 반복합니다. 하릴없이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니 별과 달이 흐린 내 눈에 들어옵니다. 거의 반달에 가까워진 상현달이 제법 교교한 달빛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쇼팽의 ‘야상곡夜想曲’이나 들어볼까 하여 다시 유튜브에 접속했으나 역시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야상곡이란 ‘녹턴nocturne’의 한자 번역입니다. 밤의 정취에서 영감을 받아 조용하면서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으로, 고대로마 시대 ‘밤의 신’ ‘녹스Nox’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쇼팽은 무려 21곡의 야상곡을 작곡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피아노’ 하면 쇼팽Chopin부터 연상합니다만, 피아노 독주회라는 형식으로 연주를 시작한 사람은 리스트Liszt입니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사실 이 분과는 그리 친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 급격하게 친해지게 되었는데 독일 바이마르Weimar를 방문하면서부터입니다. 출판 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후 그의 자유로운 삶의 행보를 추적하기 위해 『리스트 평전』도 숙독했고요.
국제도서출판박람회라면 봄에 개최되는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와 가을에 열리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국제전시회가 가장 규모도 크고 실속이 있는 편입니다. 매년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사들도 적극 참가하여 저작권 수출입 계약을 주고받습니다. 칸이나 베를린에서 영화 판권을 사고파는 것처럼요. 출판종사자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일이 끝난 후 주관여행사에서 관광까지 시켜주니까요.
일정이 남을 경우에는 제 돈 주고 인근 국가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됩니다. 바이마르 방문이 여행사 일정에 잡혔던 까닭은 순전히 괴테Goethe 때문이었습니다. 독일문학의 거장 괴테가 태어나서 청년기까지 살았던 생가는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의 문학적 성숙기는 영주의 초청으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거주했던 곳은 바이마르였습니다. 슈타인 공작부인과 사랑에 빠져 〈달에게〉 〈사냥꾼의 저녁노래〉 〈바다여행〉 등 말랑말랑한 서정시들을 창작한 곳도 바이마르였습니다.
바이마르에서 괴테의 흔적을 쫓다가 덤으로 만난 분이 바로 리스트였습니다. 바이마르음악대학에서였습니다. 공식명칭은 ‘바이마르 프란츠 리스트 음악학교’ 리스트의 제자 칼 뮐러하르퉁이란 사람이 1872년에 설립한 독일 최초의 오케스트라 학교입니다. 헝가리 태생인 리스트는 부다페스트국립음악원(오늘날의 헝가리국립음악원) 설립에도 관여하여 바이마르와 헝가리를 오가면서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리스트는 참 풍요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은 하나님의 ‘십계명’에 충실하려 노력한 반면 리스트는 무려 ‘십일계명’에 충실하려 애썼다고 하지요. 십일계명씩이나? 살면서 십계명을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얼마나 어려웠으면 모세가 아무나 지울 수 없게끔 돌판에다 글귀를 새겼을까요. 그런데 11계명이라니….
“하나님께 들키지 말라.”
이게 마지막 계명이랍니다. 제가 함부로 한 망발이 아니라 바이마르음악대학 관계자가 리스트의 문란했던 사생활을 두고 한 농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온갖 추잡스런 염문을 뿌렸던 그가 50대에 로마가톨릭의 신부로 임명된 어이없는 사실에 대한 비난조 ‘돌직구’였지요.
50대라면 당시로서는 그리 젊은 나이도 아니었습니다. 흥청망청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신나게 놀다가 힘 떨어지자 뜬금없이 종교인이 되어 우아하게 진리와 도덕을 논하기 시작했으니, 그로서는 아주 기막힌 인생전략이었습니다. 리스트의 여성편력은 실로 화려했습니다.
상대도 모조리 유부녀,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들키지 말라’는 열한 번째 계명을 스스로 창조했을 거라는 게 음악원 안내원의 시니컬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이승에서 잘 먹고 잘살면서 당시로서는 비교적 장수하다가 죽었으니 과연 그의 죄가 하나님께 끝내 발각되지 않았을까요? 아직 지옥에 가보지 못한 바 알 길이 없다며 안내원이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리스트가 공작부인, 백작부인, 자작부인 등 죄다 유부녀와 사랑을 나눈 것은 그의 죄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 귀족들에게 결혼이란 사랑이 아니라 가문의 전통을 잇기 위한 정략에 의해서였습니다. 하긴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 원칙은 고작해야 1백여 년의 역사에 불과합니다.
괴테가 살았던 19세기 유럽 유부남들은 부인은 그저 기득권과 대를 유지하기 위한 대상이었을 뿐, 진짜 사랑은 4차산업(?) 종사자들인 살롱이나 까페 여자 또는 남의 부인들과 나누었답니다. 남편의 사랑 없이 살아가는 여자들, 바람기 충만한 예술가들에게 쉬운 표적이 되기에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은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시간되시거든 『서양음악사』를 한번 숙독해보십시오. 유명 음악인들의 연인은 죄다 유부녀입니다. 여러 여자들 중 여섯 살 연상인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부인은 아예 자녀들까지 버리고 리스트와 살림을 차리게 됩니다.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도 1남 2녀나 됩니다.
그런데, 피는 속이지 못합니다. 막내딸인 코지마Cosima 역시 가정을 버리고 바그너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리스트가 잘 살고 있는 딸을 꼬드기어 바람난 여자로 만들었다면 바그너를 향해 분노의 멘트를 날렸다는데…, 과연 제 딸이 원만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던 것이 맞는지 또 자신 또한 남의 가정을 깬 주제에 그런 지적을 할 수 있었는지 그게 의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이 만들었다는 재치만점 사자성어가 떠오릅니다.
‘내로 남불!’
풀이하나마나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 마리 부인과 결혼생활 중에도 그의 여성편력은 지속되었습니다. 리스트는 작곡과 연주도 뛰어났지만, 스타성도 출중했으며 마케팅의 천재이기도 했습니다. 음악사 최초로 ‘피아노독주회’라는 형식의 연주회를 개최하여 유한부인들의 아이돌 구실을 마다하지 않았다는데, 당시 유한부인들 사이에서 그는 지금 아이들이 열광하는 EXO나 BTS급이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연주가 끝난 다음 열광하는 팬들을 향해 흰 손수건을 무대로 던지는 퍼포먼스를 보일 줄도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바람둥이의 말년은 초라합니다.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난봉질을 하다가 힘 잃고 돈 떨어진 다음에야 가정으로 복귀하여 아내나 자식들에게 구박이나 받으면서 구차한 삶을 이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닙니까? 하지만 앞서 밝힌 바처럼 난봉꾼 리스트의 말년은 의외로 가톨릭 사제로서 음악원의 교수로서 참으로 우아하고 폼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몸과 마음 편해지니 성품까지 너그러워지게 되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을 보쌈해간 바그너를 용서하는 관대함까지 보여줍니다.
영양가 없는 뒷담화는 여기까지입니다. 그의 음악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한 인간의 위대한 업적이나 기량은 혼자서 빛나는 법이 없습니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큰빛을 발합니다. 이야기도 라이벌이 있어야 재미있어지는 겁니다. 그래야만 오래 사람들에게 기억됩니다. ‘히스토리history'란 곧 '스토리story'이기 때문입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유명 음악평론가인 미국 사람 스튜어드 아이자코프는 피아노곡을 작곡하고 연주한 이들을 비교하면서, 리스트와 베토벤을 일컬어 ‘발화주의자combustibles’라고 표현했습니다. 격렬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곡 자체와 과격한 연주기법을 보여주는 음악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들과 구분하여 쇼팽을 ‘선율주의자melodists’라 했습니다. 이 범주에 슈베르트와 모차르트도 포함시켰는데, 사람이 노래하는 것처럼 작곡하고 연주했던 사람들입니다.
아이자코프는 ‘노래하는 피아노’의 정점에 쇼팽을 두었습니다. 그를 ‘피아노의 시인’이라 표현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반해 리스트의 곡과 연주는 격렬한 편입니다. 동시대에 살았지만 다른 표현으로 음악을 했던 두 사람, 리스트의 격렬함이 없었더라면 쇼팽의 부드럽고 우아함도 부각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쇼팽이 존재함으로써 리스트의 위대함이, 리스트가 있음으로써 쇼팽의 서정성이 더욱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곡을 비교하여 들어보시면 금방 ‘아하!’ 하시게 될 겁니다.
위의 곡은 쇼팽의 <야상곡 no.20>이며, 아래의 곡은 리스트의 피아노연습곡 <라깜빠넬라La campanella>입니다.
첫댓글 오후의 한가한 시간 감미로운 음악 잘 감상했습니다.
24시간이 한가한 사람이지만 오후는 졸음이 오는 시간이니 더욱 한가합니다.
아재요, 자주 연락올리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다음 달에 봉화쪽 출장이 있는데 시간이 되면 먼저 전화드리고 찾아뵈었으면 합니다.
Very. very good. 감사합니다. 전화 054-637-6957. 010-7132-6957
산내 왔으면 시간이 있었겠냐만 내가 있는 김해 한림하고는 그리 멀지않은곳인데 연락 한번 하시지 그래~~
갑자기 가는 바람에 너무 경황이 없어서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다음에 갈일 있으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