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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체계,
교의학 체계의 역사에 대해 살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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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우리가 지금 배우는 신학의 체계, 교의학의 체계는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졌단 말인가? 내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내내 궁금했던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인 체계가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것도 내게 의문시되었다.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학문적인 체계를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탁월함을 설명하기 위한 변증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갖게 된다. 또한 교인들에게 질서지워진 학문의 체계로서 교육하기 위해 체계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2세기의 변증가인 순교자 저스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권면하기 위한 시도로 ‘로고스’의 개념을 끌어 사용하였다. 로그스의 개념은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적 개념이다. 이 개념을 통하여 초월적인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관계를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교의학적 체계는 오리겐의 저작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저작 ‘제1원리에 대하여’(On First Principles, 212-215)로부터 교의학적 체계와 사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유출 개념을 자신의 신학적 체계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었다. 일자로부터 로고스의 유출, 그리고 인간과 기타 자연 피조물들의 만들어짐, 그리고 일자로부터 멀어진 결핍으로서의 불안전한 죄된 세상, 로고스의 귀환을 통한 우주적 회복이라는 신플라톤주의 도식과 내용을 채용하고 있다. 일자(하나님) - 로고스론(그리스도론) -피조세계(창조,인간론) - 결핍의 세상(죄론) - 로고스의 귀환(종말론) 등의 체계와 내용을 갖게 된다. 이러한 유출과 희귀라는 도식 안에서 우주적 코그몰로지에 대한 답변의 세계를 기독교 체계 안에서 갖게 된 것이다.
오리겐의 이러한 체계는 신플라톤주의를 채용하여 학문적인 체계와 내용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위배된 비정통적인 내용을 어느 정도 담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적인 체계화의 작업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신학의 체계화에 대한 공동의 지반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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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마지막 교부이다. 우리가 속사도 이후의 교부시대를 논할 때 사도 이후부터 어거스틴까지 구분한다. 그 이후를 중세시대라고 부른다. 교부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을 영적인 아버지라고 지칭하였던 것처럼 교인들의 영적인 아버지,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로마 카톨릭이 사제들에게 그대로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사도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사도성의 확보는 사제성을 계급성으로 확보하여 권력화되었다. 이러한 권력화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성숙화하고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인격화되는 신앙의 길을 차단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자신을 영적인 아버지로 자칭하면서 로마 카톨릭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은 만인 제사장이라는 개혁주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도의 역활은 사도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며 사도들의 일들을 교회 직분자들이 이어받은 것은 주께서 교회 안에 말씀을 보존하며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성도들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희생과 섬김을 통하여 성도들이 스스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 자신에게 종속된 관계성을 정립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 안에 목사로서의 역할을 로마 카톨릭적 사제개념인 영적 아버지로 돌아가고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에서 위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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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354-430)은 마니교와의 논쟁 가운데 자유의지론과 선악이원론을 반대하였으며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가운데 원죄론과 은총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신학 작품 중에 가장 중요한 조직신학적 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붕괴시킨 원인이라는 비판에 대한 답으로 쓴 것이지만 이 책 안에는 역사적 틀 안에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창조, 죄,대속, 예정,은총,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은 처음에는 신플라톤적인 사유로 기독교의 변증을 세웠지만 그의 사유가 성숙해짐에 따라 구속사의 틀(창조, 타락, 구속, 회복) 안에서 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체계는 개신교의 교의학적 틀을 이루게 되었다. 창조(하나님, 하나님의 사역 - 창조, 섭리), 타락(인간론 혹은 인죄론), 구속(그리스도론), 회복(구원론, 성령론, 종말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러반 창조, 구속, 회복이라는 관점 안에 신학적 틀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죄를 선의 결핍으로부터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성과 내용을 그대로 갖고 있는 오류를 범한다. 죄의 반대말은 ‘선’이 아니다. 죄의 반대말은 ‘의’이다. 선이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 하나님 영광과 관계된 삶의 형태이다. 여전히 신플라톤주의적 개념 안에 어거스틴은 머물고 있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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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에 들어오면서 그들은 이교도들을 향한 변증을 통하여 신증명이 가능한 체계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 된다. 안셀름은 ‘Sola ratio' 오직 이성을 통하여 신 존재 증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의 ‘모놀로기움’과 ‘프로슬로기움’은 이러한 이성을 통한 신 증명의 체계를 세운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중세적 신학체계의 모토인데 이성을 통한 합리적인 신학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이성으로의 합리성에 대한 근거를 세우고자 한 그들의 노력이 서구신학의 전통이 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이성의 합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이성의 합리성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합리성이기에 믿음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백이 된다. 더 나아가 그 이성은 단순한 사변적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과 교제로부터 오는 인격적 고백이며 송영이다. ‘이성을 추구하는 신앙’은 신앙 안에서 철학적 이성의 합리성을 허락하였기에 광신이나 미신의 토대 위에 서는 신앙의 극단성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갖는 기독교의 사변적 우월성을 갖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했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성적이지도 신앙적이지도 않다. 어쩌면 신학적인 면에서 보면 중세보다 더 어둡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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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성적 합리성의 추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신학체계를 세우므로 중세적 신학체계를 이룬다.
대표적인 신학자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1267-72)은 개신교의 ‘기독교강요’와 더불어 중요한 저작으로 꼽힌다. 그는 형식적으로는 오리겐처럼 신플라톤적 유형을 갖고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용을 갖고 있다. 신학대전 1부는 하나님에 의한 만물 창조, 2부는 이성적인 피조물이 하나님 자신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는 내용,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이러한 희귀가 성취되는 수단으로서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을 다룬다. 이러한 내용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광범위한 내용(신증명,창조, 섭리, 죄, 은총 등)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이러한 플라톤적 형식과 더불어 갖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내용은 무엇인가? 현실태와 가능태, 실체, 우유, 질료, 형상, 본질, 존재가 토마스의 신학대전의 내용을 이루는 핵심적 신학체계의 내용이다.
여기서 나는 본질과 존재를 다루겠다. 왜냐하면 개신교의 신학 안에 이러한 토마스적 내용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은 그것의 그것 됨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인간 됨은 흑인이든 백인이든 어린아이이든 어른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인간이라 가르킬 수 있는 그것 됨이다. 존재는 무엇인가? 존재는 그것의 그것 됨을 있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어공주라고 하면 인어공주의 본질은 있다. 밑은 물고기 위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것의 그것 됨을 있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과 존재는 늘 동일하지 않다. 우리의 본질은 우유적 본질과 실체적 본질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원희는 인간 됨의 본질인 실체적 본질이 있으나 늘 늙고 뚱뚱해지는 변함의 본질 - 우유적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의 변함 가운데도 박원희는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질과 존재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존재와 본질은 동일하다. 그런데 토마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 즉 있음은 인간이성으로 어느 정도 도달할 수 있으며, 그 본질도 어느 정도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토대를 갖는다. 즉 사람들이 위험할 때 “아이쿠 하나님” 하는 것에서 하나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알아도 아주 뛰어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학자가 조금 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앞부분은 일반은총이고 뒷부분은 특별은총이 되는 셈이다.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토마스의 견해는 인간 부패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 존중의 합리성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개신교의 교의신학적 체계도 이러한 토마스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론을 다룰 때 신의 존재는 삼위일체이며 그 본질은 속성이며, 그의 사역(일하심)은 그 본질의 나타남으로 나눈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존재는 피조물이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 됨의 본질을 잃어버림으로 다룬다. 그리스도론을 다룰 때도 그의 본질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존재는 지상에서 신-인이다. 그의 사역은 대속으로 나눈다. 성령론을 다룰 때도 성령의 본질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사역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본성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신학적 체계는 지금까지 가톨릭신학 안에서(가톨릭은 토마스의 신학체계에 대한 복귀를 꾀하고 있다)와 개신교 안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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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적 신학체계에 반기를 둔 것은 루터이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의 과도한 합리주의, 즉 이성에 대한 신뢰에 대한 반기였다. 루터는 스콜라주의의 합리성의 근거에 비판했다. 존재의 긍정성과 그 체계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그 존재의 부패성과 본성의 타락성을 강조했다.
중세적 존재적 체계 안에 인간 죄의 부패성을 강조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주제를 갖고 그는 일괄되게 말하였다. 물론 그는 신학대전같은 교의학적 체계를 갖는 글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것이 루터에게 보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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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아쉬움은 당대의 칼빈에게 고스란히 넘겨졌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통하여 합리성의 전통 위에서가 아니라 말씀 위에서 신학적 체계를 세우기를 원했다. ‘기독교강요’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첫 부분은 창조자와 통치자로서의 하나님 둘째 부분은 중보자와 구속자로 그리스도께, 셋째 부분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원리인 성령에 대해 마지막 부분은 교회, 그리고 교회와 시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사도신경의 형식을 따르고 있음은 어거스틴의 구속적 형식과 동일하다.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이나 은총론은 어거스틴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중세 스콜라적 신학 내용을 벗어났는지는 의문시된다. 기독교강요 안에서도 토마스적인 존재와 본질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스콜라적인 이성적 합리성의 체계를 배제한 것은 사실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 완전히 벗어났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최소한 칼빈의 신학체계의 용어 속에는 존재와 본질이라는 체계는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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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신학적인 체계에 대해서 회의적이 사태가 일어난다. 이러한 신학적 체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서구적 전통 안에서 자신들의 신학체계는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체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합리적 대상이 아니라 경험적 대상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제자훈련에서 영성훈련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이성적 훈련에 대한 해체가 오늘날 일어나는 것처럼 근대 이후 합리성에 바탕을 둔 신학체계에 대한 해체가 일어난다. 슐라이마허에 의하면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신학이 존재하며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실존론적 존재 자각으로서의 기독교가 존재한다. 폴틸리히 같은 학자는 교의학의 체계를 세우되,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안에 찾아오는 신으로서 말함을 통하여 개혁주의의 성경 안에서의 교의학적 내용과 그 체계를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이유는 교의학의 체계를 학문의 체계로 이성의 합리성의 체계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오해이며, 과학과 이성의 발달로 더 이상 성경을 역사적 사실과 무오적 계시로 보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신학체계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체계 안에는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까? 다음 호에 그 내용을 논해 보도록 하자.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