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
음춘야
choonya@hanmail net
천지가 벚꽃이다. 바깥에도 가슴속에도
바람이 분다. 꽃잎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휘날린다. 쌍으로 날아오를 땐 수나비가 암나비를 쫓듯 아슬아슬 사랑이 넘친다. 그 꽃잎들이 보도블록에 소복소복 내려앉는다. 잠잠하던 바람이 또 분다. 조금 전보다 더 센 바람에 꽃잎들이 율동적으로 춤을 춘다.
둘이서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어느새 마당이 분홍 카펫을 깔아 놓은 듯 폭신하다. 뒹굴고 싶다. 밟으면 으스러질까 두려워 가만히 누워 보면 어떨까. 모두 긁어모아 남자의 침대 위에 깔아주면 연분홍 꿈을 꿀까. 잠깐이지만 로댕의 ’청동시대‘ 같은 청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꽃잎이, 바람이, 햇빛이 온통 자연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창 안에서 두 사람이 무연삼매에 이른다. 안은 더없이 한적하다. 텔레비전도 스마트폰도 잠자듯 조용하다.
정적을 깬다. 드디어 여자는 밖으로 나온다. 꽃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현관 안쪽에 서 있는 남자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사슴처럼 순한 눈이다. 안과 밖, 단지 문 하나 사인데 마음은 하늘과 땅 만큼 먼가 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냉정하리만치 의연했는데.
여자는 혼자서 꽃길을 따라 천변으로 향한다. 꽃구름이 하늘에도 땅에도 수를 놓는다. 노란 병아리 모습의 꼬마들 서로서로 손잡고 재잘거린다. 손이 허전하다. 계절이 바뀔 때면 둘이서 곧잘 찾던 곳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그 길, 혹시나 하면서 뒤를 돌아본다. 꽃들만 따라온다. 멀리 가까이 바라보며 물가로 간다. 꽃잎이 떠가는 물속에 잉어들이 작은 놈은 작은 놈끼리 큰놈은 큰놈끼리 속삭인다. 저들도 제 짝끼리 지도록 정다운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남자는 여전히 창가에서 나부끼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겠지.
4남매를 기를 때 남자는 곁에 있어도 늘 부재중이었다. 머릿속엔 60여 명, 때로는 3,600여 명의 학생들로 넘쳐났다. 30대 중반 유난히 뻣뻣하고 숱 많던 그 머리칼이 다 빠지고 말았다. 천장에서 빗물이 쏟아져도 지붕 한 번 못 올라가던 어리보기, 오직 여자만 믿고 신뢰하던 남자. 산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한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집안에선 그야말로 무위 선사였다. 오죽하면 다닥다닥 이웃한 골목에 살고 있었을 때 뒷집 아주머니는 남자는 늘 출장 중이냐고 했을까.
40년 동안 오직 한길만 걸어온 창밖의 남자였다. 반짝이는 눈망울 속에서 오직 그곳이 별천지인 양 동고동락하며 집안의 대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다. 첫애는 첫 번째 태어난 아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쪼르르 태어난 세 딸들의 이름이나 제대로 머릿속에 있었을까. 그땐 그랬다. 안과 밖이 바뀐 지금도 유효한 줄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어찌하랴.
여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긴긴 세월 직장에 쏟아붓던 사랑, 열정 헌신적 노고는 어디로 갔을까. 진이 다 빠졌나, 혼이 다 나갔나. 퇴직 후 그 많은 시간, 왜 집안에서만 지내려고 하는지 집처럼 편안하고 집처럼 따스한 곳이 없다는 말, 입버릇이 된 지도 오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만. 그 대신 여자는 자꾸 나갈 일이 생기고 나가야 비로소 손이 쉴 수 있다. 자나깨나 여자의 손을 기다리지 않는 곳이 없다. 부엌, 베란다, 세탁실, 화장실 등, 밖이라야 집안일은 눈에서 멀어지고 하늘도 나무도 시멘트벽 틈의 민들레도 만날 수 있잖은가.
한 여자만 바라보는 남자, 온종일 신문만 끼고 뒹구는 남자, 백화점이나 시장을 아직껏 홀로 가지도 못하지만 필요한 물건도 살 물건도 없다는 남자, 집안에 들어온 파리나 모기를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남자, 생전 처음 한 친구를 따라서 다래순을 채취하러 갔다가 주머니에 서너 잎만 넣고 온 남자, 나무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나. 때론 밉지만 남을 미워할 줄 모르니 미워할 수조차 없는 남자. 더구나 요즘은 두 팔에 깁스를 하고 있다. 그래도 불편하다고 말하지 않는 남자다. 한밤중 침대에서 떨어져 양쪽 팔목이 부러졌다. 병원 출입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고 있다.
여자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낸다. 남자는 수저만 겨우 들 수 있을 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일일이 그의 손이 돼 시중을 들 수밖에. 본인은 오죽 답답하고 기가 막힐까. 여자는 짜증이 나고 때때로 화가 치밀어도 그저 제풀에 지쳐 스스로 반성문을 쓰곤 한다 ‘달걀 섬 모시듯’ 한다고 할까. 어느 날 남자의 ‘지루한 오후다’란 메모를 봤을 때 여자의 가슴이 철렁했다. 아마도 그녀가 약속시간 보다 늦게 들어온 날인가 보다. 주름살 마디마디 쓸쓸함이 묻어나고 부쩍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애잔하다.
떠나는 것이 어디 꽃잎뿐이랴, 꽃이 진다는 건 희망의 약속이다. 슬퍼하지 말자. 서 있었으니, 살아 있었으니 넘어지기도 떨어지기도 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밖에서 들어온 여자를 남자가 맞이한다.
“사람이 많았어?”
“오늘이 꽃의 절정인가 봐. 사진 찍는 사람도 많고, 깁스 풀면 한번 다녀오지 뭐!”
이 봄, 남자와 여자는 마냥 벚꽃 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창문 안과 밖에서. 밖이었던 남자와 안이었던 여자, 그 자리가 점점 바뀌고 있다. 두 사람이 가야 할 남은 삶의 여정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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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직박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