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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대피소, 계곡에‘새로운 경험’이 더해져 이야기가 피어나다
1. 일자: 2017. 7. 15(토)
2. 장소: 지리산 노고단/피아골
3. 행로 / 시간
[화엄사(02:07, 250m) -> 연기암(02:45) -> 참샘(02:55) -> (국수등/중재/접선대/눈섭바위) -> 코재/무넹기(05:00, 1300m) -> (우회길) 노고단 대피소(05:30~08:00) -> 노고단(08:29~50, 1507m) -> 피아골 삼거리(10:03) -> 피아골대피소(11:10~17, 789m) -> (구계포교) -> 삼홍소(12:05, 600m, 직전 2.5km) -> 표고막터(12:30, 496m) -> (임도) -> 직전마을 버스정거장(12:58), 18.9km]
4. 동행 : 아이넷, 행진
< 피아골 산행을 준비하여 >
산을 10년 넘게 다녔어도 아직도 가고픈 곳이 많은 건 행복한 일이다. 매일 먹는 밥이 끼니마다 꿀맛이면 살 맛나는 삶이란 말과 같은 이치다. 지리산 뱀사골과 피아골은 늘 마음에 두고도 인연이 닿지 않던 곳인데, 작년 가을 단풍 그윽한 뱀사골 길을 걸었으니 소원의 반은 풀었고, 나머지 반을 풀 기회를 엿보다 지난 치악산 산행에서 넌지시 속내를 비췄더니 호응이 나쁘지 않다. 마음이 동하면 가야 한다. 서둘러 밴드에 번개산행을 제안했다.
*번개산행 공지 *
1. 산행지: 지리산 화엄사~피아골
2. 일자: 7.14, 금요무박
3. 갈 때 차편: 해올산악회 화대종주 버스 이용
올 때 차편: 구례터미날 시외버스 이용
4. 일정 계획
: 22:00(신사역) ~ 02:30(화엄사) ~ 05:30(노고단) ~ 06:10(아침식사) ~ 08:30(반야봉) ~ (back) 09:30(피아골 갈림) ~ 직전마을(12:30) ~ (버스) 구례
< 희망사항 >
이번 지리산 산행의 키워드는‘화엄골과 피아골’이다. 지리 주 능선이 노고단에서 남쪽을 향해 밤재와 형제봉, 월령봉으로 뻗어 내리고, 종석대에서 또 다른 지능선이 치일봉, 완사봉으로 흘러 내려, 두 능선 사이에 아득하게 지리잡고 있는 계곡이 바로 화엄계곡이다. 피아골은 연곡사에서 반야봉에 이르는 연곡천 계곡을 말하여,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에서 발원한 맑고 풍부한 물이 임걸령, 불무장등의 밀림지대를 누비며 피아골 삼거리, 연곡사 등을 지나 섬진강으로 빠진다. 폭포, 담소(潭沼), 심연이 계속되는 계곡미가 뛰어난 곳이다. 두 곳 모두 내겐 처녀지라 더욱 가슴이 설렌다.
‘지리산 빗점골의 가을’이라는 산악수필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속에 묘사된 피아골의 풍경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특히, 피아골대피소와 삼홍소 란 말이 끌린다.
또 하나, 백두대간 두 번째 구간을 다녀와 산악회 카페에 올라온 놀라운 사진 (노고단에서 찍은 남원 일대의 야경) 그 모습을 보고 난 후 노고단의 새벽은 내겐 일종의 로망이었다. 이 역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 화엄사 가는 길에 >
무척 바쁜 한 주를 보냈다. 그만큼 밥 값은 하고 산다는 반증이니 할 일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퇴근해 저녁을 먹고 잠시 눈을 붙였더니 개운하다. 먼 길에 큰 힘이 될 것이다. 8시 반,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설악산이라면 11시, 여느 지리 코스라면 10시에 집을 나서도 되는데 오늘은 이례적으로 빠르다. 화대종주에 도전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산행이라 그런가 보다. 신사역에서 반갑게 인사하고 차에 오른다. 행진님이 노고단에서 별사진을 위해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왔다. 일행을 보자 한갓지고 새로운 길을 걷는 산행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진다.
번개산행의 호응이 클 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넷님과 행진님과 셋이서 함께 하기로 최종 결정된다. 서울 강남 금요일 밤, 시간은 자정으로 치닫는데도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하다. 산꾼은 빛을 버리고 어둠이 내려앉은 산으로 가려 한다.
화려한 도시의 밤을 멀리하고 지리산행 버스는 이내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 화엄사에서 피아골 삼거리 >
새벽 2시 화엄사 어느 모퉁이, 눅눅하고 습기찬 공기는 긴 버스 이동에 지친 나그네 마음을 더 가라앉힌다. 어디선가 세찬 물소리가 들리지만 사위는 어둠에 젖어 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이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지리의 품으로 들어선다. 1차 목표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7km 거리다. 맨 위쪽 코재 부근 경사 급한 너덜지대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산행하기에 비교적 수월한 계곡길이다.
풍성한 산죽이 호위하는 잘 정비된 길이 쭉 이어진다. 얘들 꼬맹이였을 적이니 10년 도 넘은 예전 걸었던 길의 느낌이 조금 남아있으나 새로운 기분이다. 습기를 흠뻑 머금은 평탄한 대로를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연기암 지나 샘터까지는 워밍업이리라.
무척 빠른 행보로 연기암 앞을 지나 샘터를 지난다. 물 한 모금 하고 싶었으나, 어둠 속 샘터는 그리 위생적이지 않아 보인다. 1/3 거리를 왔다.‘접선대까지 2.6km, 1시간’출발 전 책에서 본 안내를 철석같이 믿고 길을 이어간다. 출발 5km 지도의 고도가 900미터 어름이었으니 접선대까지만 가면 한 고비 넘기리라 믿고 간다. 샘터를 지나며 본격 산길이 드러난다. 예상대로 큰 무리가 없다. 빠른 행보에 노고단 대피소까지‘2시간 반도 가능하겠다’라는 허황된 목표를 가져본다. 3.5km 지점을 통과한다. 국수등 이정표가 보인다.
국수등을 지나며 길 사정이 확연히 달라진다. 돌계단이 잦고 가파른 등로가 이어진다. 약 0.5km 빡세게 걸었더니 땀이 나기 시작한다. 초저녁 잠이 힘이 되어주어 여기까지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왔다.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 함께 하는 두 친구는 평소답지 않게 힘겨워한다. 잠시 평탄해지는가 싶더니 등로는 다시 된바알에 거친 돌 길이다. 속도가 영 나지 않는다. 등으로 땀이 흐른다. 땅이 코에 닿는다는 코재 길이 본색을 드러내나 보다. 가파른 비탈보다 거친 돌 길이 더 신경 쓰인다. 안경에 김이 서려 코 앞 길 상황도 분간하기 힘들다. 고도가 빠르게 올라간다. 어느덧 목표한 900미터 지점이다. 거리는 4.5km, 머리 속 갈무리한 정보와 실제상황이 다르다. 접선대가 5km 지점이고, 그곳 고도가 900미터인데…. 혼란스러워진다. 그나마 고도를 예상보다 많이 올라온 것에 위안을 삼는다. 예전 이정표가 있었던 것 같은 범상치 않는 작은 공터에서 잠시 쉰다. 중재거니 여긴다. (지나고 나서 판단하니 이곳은 중재 지나 접선대 사이 어디쯤 이었을 것이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아아넷님이 준비한 참외를 베어 문다. 시원하고 달콤함 과일 향이 그만이다. 오늘 먹은 음식 종 단연 최고다.
< 화엄사에서 / 코재에서 >
먹고 나니 기운이 좀 난다. 그 힘으로 다시 된비알을 치고 오른다. 잠시의 평지도 용납하지 않는 그야말로 ‘코가 땅에 닿은 듯한’ 진득한 오름이 계속된다. 한 밤 중 모르고 오르니 그나마 왔지, 한 낮 더위에 왔더라면 곡소리 날뻔한 길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계속된다. 물소리가 거칠다. 흰 포말을 보인다. 앞서간 산악회 일행 중 일부가 멈추어 선다. 이곳을 지나며 앞선 곳보다 심한 너덜이 시작되었다. (돌아와 확인하니 이곳이 작은 폭포 접선대였다.)
트랭글이 5km 지점 통과를 알려온다. 고도는 1000m를 넘어선다. 좌측으로 집채만한 바위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측으로는 아직도 세찬 계곡 물소리가 들린다. 무넹기의 어원이 물이 넘어가는 지점이라는 뜻이니 계곡 최상단은 노고단과 맞닿아 있을 듯하다. 책에서는 와 닿지 않던 지형의 특징들이 헌장에서 확인된다. 접선대는 어디인지도 모르게 지나쳐 버렸다. 한 눈에 보아도 눈썹을 닮은 커다란 바위 밑을 지난다. 이곳에서 화엄사 계곡 풍경이 기가 막히다 하는데,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다.
이제 코재는 정말 멀지 않다. 거친 너덜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찾았다. 28에 가끔 오시는, 지난 바래봉 산행에서도 조우했던 여자분이 길 안내를 한다. 커다란 배낭 메고도 잘도 간다. 셋이서 이런 저런 얘기하며 힘겨움을 이겨낸다. 이 어둠, 이 거친 비탈, 혼자였다면…, 까마득한 기분이 전해진다. 벗이 함께 하는 산행이 얼마나 다행이진 모르겠다.
먼저 오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드디어 코재다. 해발 1300m, 직접 걸어보니 거리는 화엄사에서 6km가 조금 안 되는 것 같다. 무넹기 안내판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오늘도 작은 성취감에 행복해 한다. 기분 최고다. 그 어렵다는 여름 화엄사~코재 길을 거뜬히 해치웠다. 무릎과 종아리 고통은 잠시 잊는다.
오르막 비탈이 평지 대로로 바뀐 변화만큼 드라마틱하게 기분이 업된다. 마치 자갈 위를 걷다가 융단 위를 걷는 기분이다. 잠시 후 만난 갈림, 노고단 대피소 600m의 지름길을 버리고 2.4km(실제로는 훨씬 짧았다.)라는 우회로를 택한다. 이 역시 새로움을 추구하자는 이유에서다. 여느 날 같으면 별보며 걷는 낭만길인데 모든 게 안개 속에 젖어 있다. 바로 앞 분간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좋다. 우린 긴 사선을 넘어왔고 고지는 바로 저기 있지 않은가?
30여분 비포장 도로를 걸었나 보다. 웅성임이 들리고 꿈에 그리던 노고단 대피소의 불빛이 어른거린다. 미침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제 고단한 날개를 뉘여야겠다.
< 노고단 대피소와 노고단에서 >
노고단 대피소, 성삼재에서 길을 나서며 늘 지나치던 곳, 먼 길 나서며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스치듯 지나던 곳에 오늘은 머문다. (사실 오늘 이전에는 왜 이곳에 대피소가 있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제야 답을 얻는다. 이 대피소는 성삼재가 아닌 화엄사에서 올라오는 이들을 위한 장소다.) 음식 냄새 진동하는 안으로 들어선다. 아늑하다. 냄새도 싫지 않다. 식수대의 물도 풍부하다. 서둘러 버너에 불을 붙인다. 어묵과 만두가 투하되고 라면도 곧 들어간다. 배 고픈 상태에서 음식 익는 걸 기다리는 건 고역이다. 시간이 더디 간다. 대피소 식당을 둘러본다. 적당히 붐빈다. 자장밥, 찌개, 불고기를 먹는 이들도 있지만 라면이 대세다. 옆자리 식탁에 오른 김치에 자꾸 눈길이 간다. 그들도 넉넉지 않을 터라 입맛만 다신다.
허기진 배에 음식이 들어간다. 뜨끈한 국물이 속을 덥힌다. 살 것 같다. 하나 둘 식당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옷차림이 달라진다. 비옷을 입고 있다. 밖을 본다. 세친 비가 쏟아진다. 일기예보에는 오후에 그것도 잠시 비 예보가 있었는데…. 날씨 중계소로 전락한 기상청을 믿었던 나에게 화가 치민다. 별을 보고 일출의 기회가 날아간 걸 안타까워할 계제가 아니다. 우의 없이 먼 길 갈 생각에 머리가 무거워진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까지 한 잔 하고 무언가 아쉬운 마음에 앉아 있는데, 아이넷님이 용기를 낸다. 라면 한 봉과 오뎅을 주고 소주 4홉을 얻어 왔다. 처음엔 이 새벽 술이 들어가나 하다가 홀짝홀짝 다 마셔버렸다. 그러고도 부족한 느낌이다. 밖을 본다. 빗줄기는 더 거세진다. 한 시간째 대기다. 조금씩 무료해진다. 이러다 성삼재로 내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하염없이 시간이 흐른다.
시선이 한 곳에 몰린다. 한 일행이 고기를 굽고 있다. 그것도 버너에 직화구이다. 일명 원형로스터에 부채살이 올라와 노릿하게 구워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눈이 확 뜨이는 광경이다. 신기하고 부러워 몇 마디 말을 붙인다. 자세하게 구입처를 알려준다. 게다가 잘 익은 고기 한 점도 얻어 먹었다. 웬 횡재.^^ 식당 안은 새 손님도 들어오고 죽치는 이들도 늘어간다. 대피소에서 잤다는 남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소주 4홉을 또 얻었다. 이 귀한 선물을 그냥 먹을 수 없어 밴드에 자랑질을 한다. 산거북님, 유박사님, 한설지님, 걷다님 등이 소식을 전해온다. 4인방 카톡을 통해 아카님이 불참을 아쉬워하는 멘트들이 올라온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흐른다. 히터 위아래 명당 좌석에 걸터앉아 무료함을 달래다, 노고단~피아골로 행로를 결정하고 빗속에 길을 나선다.
< 노고단의 들꽃들 >
대피소에서 우비를 사 입고 노고단으로 향한다. 대피소에서 우의를 파는 줄 미리 알았으면 빗 속을 뚫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을 게다. 오랜 쉼에 오르막이 힘에 겹다. 눈에 익은 노고단 출입 통제소 앞에 선다. 출입증까지 출력해 가져 왔건만 금줄은 개방되어 있다. 숙제 다 해왔는데 그날따라 선생님이 검사를 안 해 주는 기분이다. 오늘은 되는 일이 없네….
널찍한 데크를 따라 오른다. 오랜 로망은 별 감흥 없이 현실화 된다. 다행히 비는 거의 그쳤다. 연무가 자욱하다. 풍경은 기대할 게 없다. 노랗고 분홍 들꽃만이 우릴 반갑다. 비가 그치고 나니 색이 더 곱다.
< 노고단에서 >
노고단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잘 나올 것 같지 않다. 대신 까마귀란 놈이 비석 주인인 냥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더 근사하다. 지리의 이름난 풍광에 빛나는 노고단 이건만 오늘은 예외다. 세우(細雨)가 모든 걸 앗아가 버렸다. 이 역시 하늘이 하시는 일이라 군말 없이 돌아선다.
< 노고단에서 직전마을 >
통제소에 들려 숙제 검사를 해 달라 자청하고는 임걸령으로 향한다. 성삼재에서 출발해 늘 새벽에만 걷던 길을 비 개인 아침에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늘 붐비는 곳이 한산하다. 오늘 산행에는 새로운 경험이 꽤 많다. 화엄사~코재 길, 노고단 대피소에서 아침을, 노고단에 오르다 등등. 오래 기억될 추억들이 많아진다.
비가 멈추고 해가 나자 숲은 습기로 가득 찬다. 게다가 비릿한 냄새까지. 비가 개었지만 꼭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어둡던 숲에 햇살이 들자 나뭇잎이 더욱 푸르름을 뽐내는 모습은 보기에 참 좋았다.
평탄한 길이건만 쉬이 지쳐간다. 온 몸에 감겨오는 습도 때문이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돼지령에 잠시 멈춰 선다. 먼 산등성이에 운해가 목격되더니 카메라를 꺼내는 사이 숨어 버린다. 오늘 같은 날 제대로 된 풍경 사진을 찾는 건 무리인가 보다. 평소 같으면 40여분 길을 1시간 넘게 걸어 피아골 삼거리에 선다. 이곳에서 임걸령을 지척이나 뒤돌아 보니 않고 바로 피아골 대비소로 내려선다. 지도상 가파른 내리막이 꽤 오래될 거라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날이 다시 흐려진다. 빗방울도 한 두 방울씩 떨어진다. 습도는 장난이 아니다. 땀과 빗물이 구분되지 않는다. 돼지띠 두 친구는 지친 기색 없이 씩씩하게 걷는다. 부러울 따름이다. 나도 마음을 다잡는다.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다. 몸과 마음이 지켜갈 무렵 아이넷님이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 맞장구 치고 웃고 떠드는 사이 경사 급한 1km 구간을 무사히 내려왔다. 부지불식간 이란 말이 딱 어울린다. 작은 공터에서 쉬어 간다.
< 임걸령 가는 길 숲 >
피아골은 출입이 허가된 지리산 여러 계곡 중 가장 원시적인 곳이라 불린다. 그만큼
수종이 다양하고 사람의 손길이 덜 묻은 곳이다. 소문처럼 숲이 농밀하여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다만, 돌 길이 정비되어 있지 않아 빗속에 걷느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이름난 계곡이건만 1.5km 이상을 내려왔지만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무엇이 유명하다 말이지 하고 의구심이 들 무렵, 계곡 물소리가 들리고 곧 피아골 대피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얼마
전 돌아가신 함태식 어르신이 운영하던 곳이다. 대피소 옆 음수대는 물이 철철 기운차게 흘러내린다. 이곳은 한 때 지리산 빨치산의 무대다.
때마침 빗줄기가 거세진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우리 일행이 대피소에 도착하기만 하면 비의 기세가 거세진다. 나무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앉아 쉬어 간다. 대피소 관리인이 나온다.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살피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척 보아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한 마디로 말 섞기 싫다는 표정이다. 용기를 내어‘하산 길은 내려 온 길보다 덜 험하지요?’라고 물으니 퉁명스럽게‘온 길 보다야.’라고 짧게 말한다. 더 말을 해 봐야 핀잔만 먹을 게 뻔하다. 나도 그에게 별 관심 없다. 2km를 내려오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부지런히 가야지 1시 무렵 작전마을에 도착할 것 같다. 간식으로 빵을 나눠 먹고, 우비를 다시 입고 길을 나선다. 등로 사정이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고 기대해 본다.
빗방울이 거세진다. 고도 차는 거의 없지만 거친 돌과 물기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 가뜩이나 무릎과 종아리 상태가 좋지 않는데 비까지…. 역시 기상청을 믿으면 안돼. 예보란 말에 내포된 불확실성은 이해하지만, 오늘처럼 맑은 날을 예보했건만 줄기차게 비가 내리는 상황을 어떻게 변명할 지, 참 한심하다. 늘 비난 받으니 유능한 인력들은 이탈하고, 주말이나 휴일에 오보가 심한 건 도덕적 해이와 무관하지 않을 테고…. 힘겨움을 이겨낼 희생양으로 기상청 욕을 하며 걸어 내려간다.
< 아이넷님과 행진님 >
계곡 물소리가 거칠어진다. 우렁참을 넘어서 두려움이 들 정도로 물길의 기세가 맹렬하다. 협곡 다리를 지난다 내려다 보는 눈에 거친 파도 같은 포말을 그리며 떨어진다. 장관이다. 비 그친 날에 보면 그 시원함이 천하제일이겠다. 거리는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남포폭포와 구계포계곡 등 명소는 안내판이 없어 구분해 내지 못했다. 빗 속에서 힐끗 보는 계곡과 폭포와 소는 예사롭지 않다. 어디서 이런 훌륭한 풍경을 볼 수 있단 만인가?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한다. 시원한 물줄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꿈꾸던 곳에 오지 않았는가?
하류로 내려갈수록 물길은 더 거칠어지고, 고도 차는 완만해진다. 수 많은 다리를 건넌다. 물길의 기세는 모든 걸 압도한다. 거친 물소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무렵, 범상치 않은 풍경을 자랑하는 소(沼)가 보인다. 긴 다리를 건넌다. 이곳이 바로 피아골 최고의 명소 삼홍소다. 산이 붉게 타서 산홍, 붉은 단풍이 물에 비치어 수홍,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 인홍, 꿈보다 해몽이라고 멋진 이야기가 탄생된 곳이다. 아쉽다, 감탄에 마지 않을 명소에서 두려운 눈으로 물 길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내리는 비는 멈출 기세가 없다. 옷은 물론 신발에 까지 물이 들어찬다. 난 지금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걸일까? 허탈함을 넘어서니 여유가 생긴다. 그래, 이제 다 왔다.
누구 하나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걷기만 한다. 속도가 빨라진다. 거친 돌길이 조금씩 순해진다. 널찍한 공터를 지난다. 표고막터다. 이는 곳 험로가 끝났다는 표식이다. 마지막 다리를 건넌다. 널찍한 임도가 나타난다. 고생 끝이다.
직전. 옛날 이 일대에 피밭[稷田]이 많아서 ‘피밭골’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이것이 변해 피아골이 되었다 한다. 이정표는 직전마을까지 1km라 말하지만 버스 정거장까지는 2km 이상 걸은 것 같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온 몸이 땀과 비 범벅이다. 뭘 먹을까? 심신의 여유가 생기자 드는 생각은 맛난 음식뿐이다. 새벽 대피소에서 부러운 시선으로 고기 먹는 이들을 바라보던 생각이 나 삼겹살이 땡긴다. 목욕도 해야지~~. 상상만으로도 몸의 피로는 급감한다.
직전 버스 정거장이 보인다. 트랭글 종료 버튼을 누른다. 이렇게 19km의 긴 여정이 마무리된다. 아무 생각 없다. 어디서 좀 씻고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 피아골 대피소에서 / 피아골 계곡 모습 >
< 에필로그 >
택시를 타고 구례로 갔다. 목욕탕으로 직행해 찬 물에 몸을 담근다. 살 것 같다. 산에서의 모든 힘겨움이 날아간다. 비 맞고 받은 고난을 그 친구 물이 풀어준다.
집에 돌아와 겨우 사진 몇 장 정리하고 긴 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개운하다. 세상에 곤한 잠보다 더 큰 보약은 없다. PC 앞에 앉는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나? 생각에 잠긴다. 비, 대피소, 계곡, 노고단, 피아골…. 산꾼에겐 그리 특별할 게 하나 없는 키워드들이다. 여기에 ‘새로운 경험’이라는 단어가 더해지니 이야기가 생겨난다. 여름 장마 비 속 지리산행, 노고단 대피소에서의 2시간 반, 비 갠 노고단의 아침, 비 오는 피아골 계곡 물소리. 많은 새로운 경험을 한 하루다. 산악회 버스 타고 가서 시외버스 타고 온 것 역시 처음 해 본 일이다. 덕분의 경험의 지평이 많이 넓어졌다. 이제, 비 맞는 일 두려워하지 않던 대간 시절의 용기도 되찾았고, 노고단 정상에 오르고픈 로망도 이루었고, 피아골의 실체도 알게 되었고, 지방 소읍에서의 낯선 버스여행도 자신 있어 하게 되었다. 혼자라면 도전하지 못할 길 함께 했던 아이넷님, 행진님 덕분이다.
산행기를 마무리 할 무렵 들른 산악회 카페에 특이한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다. 같은 날 백무동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 올랐던 분이 비 갠 장터목에서 본 무지개 사진을 올렸다. 내가 노고단 대피소에서 비 그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때, 반대편 장터목에는 무지개가 피었다. 지리산은 참 큰 산임을 새삼 깨닫는다. 사진으로나마 한 간접 경험에 다시 지리산이 그리워진다. 산병이 깊어간다.^^
< 화엄사~피아골 산행 궤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