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맥이 북쪽으로 뻗어 청화산(靑華山)을 이르고 서쪽으로 노산(蘆山)을 중심으로
산수가 형성되어 천혜의 자연경관을 이룬 곳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蘗溪)마을이다.
벽계마을은 구한말 정통 보수주의 이념이었던 위정척사의 발원지였다. 동시에 불퇴전의 중부지방 항일의병의
태실이었던 바로 그 벽계마을이다. 예로부터 산이 좋고 물도 좋은 땅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온다고 했다.
‘산길 50리, 물길 80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 높고 물 깊은 양명한 이곳 길지(吉地)는 구한말 성리학을
이끌었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를 배출했다. 그 이항로가 태어나 기라성같은 대학자를
양성하며 올곧은 한평생을 살다가 묻혀 있는 땅이다.
화서의 생가 앞 정면으로는 동그랗게 생긴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있다. 부를 상징하는 노적봉이다.
노적봉 앞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화서 생가의 임수(臨水)다. 화서는 이를 벽계(蘗溪)구곡이라고 했다.
용문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청화산(통방산)과 곡달산 가운데로 굽이치며 흐르는 벽계구곡이다.
이 벽계구곡은 북한강으로 합류한다.
화서의 생가는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좌청룡 우백호의 전형적인 풍수조건을 갖춘 양택의 길지(吉地)에 있다.
벽계마을에 비교적 높고 양명한 땅에 자리한 이항로의 생가이다.
200여 년 전 이항로의 아버지 이회장(李晦章)이 지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고가이다.
1980년 6월 2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이항로가 태어나서 일생을 보내며 양헌수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홍재학 등 많은 선비들을 길러낸 곳이다.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던 사랑과 대문간에 붙어 있어 하인들이 거처하던 행랑, 집의 안쪽에 있는
ㄱ자형 안채 15칸 등 2동이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주택 구조를 따르고 있다.
역'ㄷ'자형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예전의 모습을 고증하여 새롭게 지었다.
역'ㄱ'자형 안채이다.
안채는 평사량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기단과 주초는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툇마루가 쪽마루가 많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의 완충 역할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채 마루방에 현판 '靑華精舍'이 걸렸다.
청화정사는 청화산 아래에 있다하여 청화정사라고 했다.
청화산(靑華山) 기슭의 바로 좋은 집 청화정사이다.
가옥의 부엌 쪽 뒤뜰에는 4칸 규모의 초가 한 채가 있다.
화서 이항로의 '화서학파' 산실 벽계강당(蘗溪講堂)이다.
화서의 인품과 학문을 흠모한 제자들이 전국에서 찾아들었다.
면암 최익현을 위시하여 김평묵 유중교 양헌수 유인석 박문일 홍래학 등이 손꼽히는 제자들이다.
이 제자들은 일제의 외세 침입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키거나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의 선각자들이다.
노산사 앞 동산 자연석에 새겨진 '제월대(霽月臺)'다.
제월대(霽月臺)는 노산8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비 개인 그 맑은 날에 달맞이하기 참으로 좋은 전망대 재월대이다.
화서 이항로 친필의 문장이 제월대 위에 새겨져있다.
'莫遣微雲 點綴練光 極虛極明 以配太陽 丁未夏華西銘'
(엷은 구름도 남기지 말고 맑은 빛을 점철되게 하라
끝까지 비우고 끝까지 밝게 하여 태양의 짝이 되게 하라.
정미년 여름 화서 명'
경기도 기념물 제43호로 노산사(蘆山祠)이다.
화서는 생전에 주자와 우암의 영정을 모시고 항상 경모했다.
그 뜻을 받들어 주자를 주벽으로 하고 동쪽에 우암, 서쪽에 화서의 위패를 모셨다.
화서 이항로의 신도비가 그 입구에 서 있다.
신도비에는 화서의 큰 제자 면암 최익현의 도도한 문장의 글이 새겨져 있다.
"선사(先師) 화서 이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31년이 되는 무술년(1898, 광무 2)에
문인 월성(月城) 최익현(崔益鉉)은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이 지은 행장(行狀)을 바탕으로
비문을 지어서 선생의 증손 이승조(李承祖)에게 주어 돌에 새기게 한다.
아, 하늘이 이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은 평화와 혼란이 없을 수 없는데,
혼란하면 하늘은 반드시 한 사람의 대인군자(大人君子)를 내어 시대를 참작하여 혼란을 중지하는 기본을
마련하게 하였다.
주(周)의 말기에 공자가 출생하고, 송(宋)ㆍ명(明)의 말기에 주자(朱子)와 송자(宋子 송시열을 말함)가
태어난 것이 바로 그 징험이다. 그후 서교(西敎 천주교)가 횡행하여 천하가 번복되고 생민(生民)이
어육(魚肉)이 되는 재화가 있게 되니, 하늘은 우리 선생을 동쪽 지방에 탄생시켜 저들을 물리치는 일을 맡아
만세에 일치(一治)의 기초가 되게 하였으니, 아,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화서의 신도비문에서-
노산사 뒤쪽 가파른 산기슭에 벽진 이씨 참의공파 묘역이 있다.
벽진 이씨 묘역 상단에서 두 번째 공간에 화서 이항로의 묘를 썼다.
화서의 묘 뒤쪽에서 바라다 본 묘역 앞은 시원하게 탁 트였다.
좌우 양쪽에서 기세좋은 용맥이 흘러들고 있다, 그 골짜기로 생기(生氣)을 쏟아내고 있다.
산의 왼쪽 날개 좌청룡이 울창한 숲을 넘어 꿈틀거리고 있다.
산의 오른쪽 날 우백호가 기세좋게 흐르고 있다.
벽계마을 앞을 흐르는 벽계구곡이다. 'S'자‘ 혹은 '乙’자 형태로 구불구불 흐르는 벽계천이다.
벽계구곡에는 노산8경이 있다.
명옥정(鳴玉亭)의 맑은 바람은 제2경을 자랑하고 있다.
鳴玉, 옥이 올린다는 뜻이다.
앞 시내의 흐르는 물소리가 옥구슬이 올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화서의 친필을 돌에 새겼다.
'欸乃聲中萬古心'
그 한문장을 요새말로 풀이하면 이렇다.
"뱃사공 노젓는 소리에 영원한 마음이 서렸구나!"
제5경 분설담(噴雪潭)이다.
화서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금강산의 분설담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곳을 제5경 분설담이라고 명명했다.
바위 틈사이로 급류가 쏜살같이 흐르면 마치 눈보라와 같은
물보라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렇게 명명했다고 전한다.
벽계구곡은 용문산에서 발원한다.
그 물줄기는 청화산(통방산)과 곡달산 가운데로 굽이치며 북한강으로 합류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부터 노문리 벽계마을에 이르는 약30km의 물길과
산길 10여km를 말한다.
노산팔경은 벽계구곡에서 경관이 수려한 8곳을 일컫는다.
구곡이나 8경 명칭들은 벽계마을에서 태어나 후학들을 배출한 조선후기 성리학자 화서 이항로가 붙였다.
이항로는 호를 화서(華西)라고 한다.
청화산의 서쪽에 있다하여 화서라 작호했다.
조선말기 성리학자인 화서 이항로의 생가는 벽계(蘗溪)마을에 있다.
벽진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벽진이씨는 경북 성주군 벽진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다.
시조는 신라 말에 벽진태수로 있던 이총언으로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벽진장군에 봉해졌다.
이항로는 이총언의 27세손이다.
그의 고조부인 이정철(1628~1705)이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그전에 살았던 파주를 떠나 이곳으로 오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이항로의 아버지 이회장은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으나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는 집을 청화정사(靑華精舍)라 칭하고 덕망 있는 선비들을
초대하여 담론하는 것을 즐겼다.
그때마다 어린 화서를 곁에 두어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화서는 17세 되던 해 성균관에 반시 보러 갔다가 부정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돌아왔다. 18세에 한성시 초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당시 권력자가 자신의 아들과 가까이 지낼 것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집에 돌아왔다. 그 후 과거장의 출입 자체가 부끄럽다며
더 이상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화서의 학문세계는 주리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만사는 리(理)뿐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살았던 정조 16년부터 고종 5년까지는 격변의 시기였다.
개화세력과 수구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도학적 의리를 강조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내세웠다.
위정이란 바른 것 즉,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자는 것이고,
척사란 사악한 것 즉, 성리학 외의 사상은 배척하자는 것이다.
이는 우암 송시열의 사상과 일치한다.
송시열은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바르게 해석 해놓았으니
이를 벗어나는 것은 모두 사문난적이다”고 하여 성리학 외의 것은 배척하였다.
화서의 사상은 조선말기 위정척사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화서의 주리론은, 이(理)가 선이요 기(氣)는 악이며, 정직이 이이며
거짓은 기라는 것을 요체로 한다. 주리론은 거짓을 배척하고 올바름을
지켜야 한다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정치사상으로 발전했다.
나라를 지키는 구국 이념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중국에서는 성리학의 맥이 끊겼다.
오로지 조선에서만 그 정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小中華).
조선이 지켜온 이런 질서(理)를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氣)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선비의 도리였다.
“목숨을 바쳐 정의를 이루라”(死身取義)는 의리론과 사생관이 그것이다.
화서의 인품과 학문을 흠모한 제자들이 전국에서 찾아들었다.
면암 최익현을 위시하여 김평묵 유중교 양헌수 유인석 박문일 홍래학 등이 손꼽히는 제자들이다.
일제의 외세 침입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키거나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의 선각자들이다.
면암 최익현은 대원군 앞에 멍석을 깔고 도끼로 목을 치라며 상소했다.
끝내는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대마도에 붙들려가 "왜놈들이 주는 물과 곡물은 안 먹는다"며
단식하다 아사한 의절충신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제자만 450여명, 제자의 제자까지 합치면 수천명에 이르렀다.
비타협적으로 일제와 맞선 화서학파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이렇게 단언했다.
“의병 정신은 반만년 역사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민족정신이요,
선생은 그것을 깨달아 전달한 선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