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철학사 1 : 맑스와 엥겔스의 철학사상>
1. 1985년 녹두출판사에서 발간한 <세계철학사 1 : 맑스와 엥겔스의 철학사상>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정통파적 시각을 잘 정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맑스사상의 변화를 추적한다. 사상을 연구할 때 필요한 것은 사상이 기록된 작품과 작가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작가와 시대의 상호관계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작품’ 그 자체일 것이다. 작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 전개되는 논의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세계철학사>는 기본에 충실하면서 맑스 사상의 변화 속으로 들어간다.
2. 맑스 사상은 과거의 위대한 학문적 성취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당대에 수많은 주장들과 경쟁하면서 발전해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 사상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다른 견해들을 받아들였고, 어떤 관점으로 비판했으며,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의 박사논문이 <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과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맑스는 고대 철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철학의 기초를 수립했고, 이것을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했다.
3. 맑스사상의 토대가 된 것들을 독일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학,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특히 헤겔론의 변증법과 포이에르바하 등의 ‘유물론’이 맑스 철학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세계철학사>에서는 맑스와 전 시대의 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차이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헤겔은 발전이 정신과 이념 속에서 이루어지고 인식의 기초를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이라고 보았지만, 맑스는 인식의 전제는 외부세계의 객관적 존재 및 인간의 실천에 의한 그 변화로 보았다. 또한 ‘인륜적 이념의 실현’이라는 찬사를 통해 국가의 절대성을 강조한 헤겔에 대하여 국가는 ‘사유재산의 국가체제’에 불과하며, 오히려 ‘시민사회’에서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반박했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와 관념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개인의 감성적 본성을 통한 ‘인간학적 유물론’을 수립하였다. 초기 시대의 맑스와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곧바로 포이에르바하가 유물론을 개인에게만 적용하고 사회적 관계에 대한 통찰을 잃었음을 비판한다. 유물론은 철학과 정치, 사회적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4. 에피쿠로스 철학의 ‘클리나벤’과 같은 유물론적 운동 개념에 대한 찬사를 바치면서도, 맑스는 ‘아타락시아’ 개념에 대해서는 비판하였다. 개별 고립된 원자가 주위의 현실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속에 갇힌 채로 존재하는 형태로는 자유가 불가능하며, 자유는 사회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자유의 획득은 사람들 사이의 전면적인 상호작용의 결과이자 사람들의 창의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결과’에 다름아닌 것이다. 영국의 고전 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을 수용하였지만, 부르주아 경제학이 자본주의적 생산을 역사적인 형태로 인식하지 않고, 사회적 생산을 자연필연적 형태로 절대적이고 영원한 형태로 인식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렇듯 맑스는 과거의 사상을 분석하고 종합하면서 자신만의 사상을 수립해 나갔던 것이다.
5. 맑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다. 맑스 연구방법의 핵심적인 용어는 ‘과학적 추상’이다. ‘과학적 추상’은 특수적인 것,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찾고, 인식에 있어서도 본질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과학적 추상’은 ‘전체와 부분’, ‘연역과 귀납’, ‘분석과 종합’ 등의 방법을 활용하여 전개된다. 맑스는 철학과 과학와의 종합을 강조했다. 철학은 과학적 자료를 총괄하고 일반화하는 것이며 과학의 기초가 되어야 하고, 과학적 인식과 사유의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 철학의 핵심적인 특징을 정리한다면 과학성과 당파성이다.
6. <세계철학사>에서 말하는 맑스 철학의 당파성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철학이라는 점이다. 맑스는 ‘사적유물론’을 통해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이라는 변증법의 철학적 개념을 역사적 상황에 적용했다. 역사의 변화는 이념과 정신의 변화가 아닌 생산물과 생산관계에 따른 대립과 충돌 속에서 변화는 물질적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각각의 사회적 관계를 대표하는 ‘계급’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와 현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와 물질적 관계가 인간의 의식을 정립해나가는 것이다. 맑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말하던 계급의 화해와 ‘자본과 노동의 조화’를 믿지 않았고 역사의 연구를 통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해방을 위해서는 계급 그 자체가 폐지되어야만 가능하다. 그것의 주체는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뿐이다. 인간의 해방을 위해서는 ‘사유재산’의 철폐가 근본적인데, 부르주아 계급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7. 맑스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당파성은 당시 사회주의 사상가들과의 논쟁 속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프루동주의’는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인정하였고 빈곤을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보았으며 문제의 해결에 ‘박애’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맑스는 프루동주의가 대립물의 투쟁을 부정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은폐시키려는 목적에 봉사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의 ‘모든 계급의 평등’과 ‘국가의 철폐’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허황된 이상에 불과하며 결국 부르주아 계급의 구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8. 맑스주의의 이상적인 ‘공산주의’는 2단계의 과정을 밟는다. 1단계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받는다’는 원칙으로 노동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중간적 과정이다. 이때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한 국가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부르주아적 위험성을 제거하는 일종의 국가적 개혁이 시행된다. 맑스는 라샬레주의가 주장한 노동의 모든 수익을 ‘평등과 공정’의 원칙으로 똑같이 배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프티부르주아적 주장이며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맑스가 제시한 최종적인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욕망)에 따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원칙의 기반에는 ‘새로운 주체’로 만드는 자유가 필연적으로 전제된다.
9. <세계철학사>의 특징은 맑스의 사상이나 저작에만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엥겔스의 사상에도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1883년 죽은 후, 정통 마르크스 운동의 지도자는 엥겔스였고 그는 작품을 통해 사회주의의 정통적 개념을 전개하였다. 마르크스 사후, 독일 사회주의 세력 중에는 ‘계급적 투쟁’을 포기하고 의회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적 개혁을 시도하는 ‘사회민주당’이 성장하고 있었다. 엥겔스는 <반듀링론>을 통해 정치적 타협이나 윤리적 방법을 통한 화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국가와 사유재산의 폐지를 통해야만 인간의 해방이 가능함을 주장하였다. 엥겔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은 자유의 왕국이다. “지금까지 역사를 지배해온 객관적인 소원한 힘은 인간 자신의 통제하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스스로가 창조하게 된다. (....)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의 인류의 비약이다.” 엥겔스가 말한 자유는 ‘객관적 법칙’ 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인식된 필연’이다.
10. <세계철학사>는 1980년대 중반 독재정권 시기에 발간되었음에도 상당한 수준으로 정통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마르크스 사상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원서를 바탕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사상이나 대립되는 사상과의 관계를 적절한 수준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이 일명 ‘정통마르크스주의’라는 점에서 당시 주목받고 있던 실존철학에서 주장했던 있는 인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명시적인 차이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책에 대한 보완으로 당시 발간된 에리히 프롬이 편집한 <사회주의 인간론>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11. 이 책에서 강조되는 것은 마르크스 사상의 해방성과 당파성이다. 인간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는 기존의 ‘사유재산 체제’를 철폐하고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이은 국가의 철폐를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후의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맑스가 그렇게 믿었던 프롤레타리아가 지녔다는 순수한 혁명성의 변질과 오염을 발견했으며, 역사의 방향에 대한 허구 그리고 사상을 배신한 현실적 국가의 파멸적인 현상을 목도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맑스 사상의 중요한 가치는 자본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한 분석이다.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이며 계급적 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사유재산에 기초한 이윤과 잉여가치 추구에 매몰될 때 인간의 자유와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필수적이며, 국가는 근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12. 어떤 사상도 완벽하게 현실을 진단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다. 무엇이든 비판적 관점을 통하여 현실에 재적용할 수 있도록 핵심을 파악하고 추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맑스 철학의 연구방법인 ‘과학적 추상’은 여전히 중요한 사상과 현실을 결합시킬 수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마르크스 저작이 번역되지 않은 시점에 <세계철학사>는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관점을 비교적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그 자체의 자료적 가치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녹두출판사’라고 한 것은 저자에 대한 궁금증을 준다. 분명히 외국의 저작을 참고하고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저술의 내용 및 느낌에서 상당한 독창적이고 자율적인 편집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한된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탄생한 훌륭한 성과라고 평가할 만하다.
첫댓글 - "어떤 사상도 완벽하게 현실을 진단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다." - 녹두라는 출판사 이름만으로도 슬픈 과거를 다시 보는 것 같다. 개인이 없는, 생각의 자유가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