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니즘과 미술품 수집
19세기 후반 서양의 화가들에게 일본 미술은 새로운 관심거리였다. 1854년 일본이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유럽 여러 도시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면서 일본 공예품들이 대거 소개되었다. 섬세한 표현과 정교한 기술의 일본 공예품들은 그 수준이 유럽과 거의 대등하게 보였을 뿐 아니라 세련된 전시효과는 찬탄을 자아냈다. 일본 공예품은 대부분의 박람회에서 매진되었고 곧 봉 마르쉐 같은 파리의 백화점에서도 팔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서구의 문명에 반응하지 않고 몰락한 나라로 비친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섬세한 미적 감각을 가지고 서구의 산업기술을 배워 발전하려는 나라로 인식되었다. 곧 중국에 이어 새로운 동양으로 등장한 일본 붐이 일어났고 평론가 필립 뷔르티는 이러한 열기에 ‘자포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미술품은 필리프 시셸이나 지그프리드 빙과 같은 골동상에서 구입도 가능했지만 당시 일본 미술 시장의 권위자로 알려진 인물은 일본인 하야시 타다마사(林忠正)였다. 그는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통역으로 따라간 뒤 그 곳에서 정착을 하고 우키요에(浮世畵) 뿐 아니라 나전칠기, 도자기 등을 판매했다.
파리의 화가들이 매료되었던 것은 에도 시대의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였다. 화가들은 우끼요에를 하야시의 상점에서 그들의 작품과 교환하기도 했다. 우키요에를 처음 발견하게 된 계기는 화가이자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Félix H. Braquemond)이 1856년에 일본 수출도자기의 포장지로 썼던 호쿠사이(葛飾北齊)의 목판화를 발견하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 목판화들은 주로 게이샤나 연극인, 또는 서민들의 일상생활 장면이 주제였는데 강렬하고 평면적인 색채, 단순화된 윤곽선, 그리고 특이한 각도의 시점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휘슬러, 반 고흐, 마네, 모네, 드가와 같은 당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생 테오와 함께 400여 점의 우키요에를 수집했던 반 고흐는 히로시게(歌川広重)의 목판화를 그대로 모사한 그림에서 한문을 옮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양에서 일본미술이 붐을 일으키고 있을 때 일본 내에서도 서양미술품이 수집되었다. 19세기 말에 서양 회화를 소장했던 인물 중에는 외국여행의 기회가 많았던 고위직 관리들이 있었는데 이토 히로부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또 서양미술관 설립을 꿈꾸고 미술품을 수집한 대표적인 인물로 가와사키 조선소의 사장이었던 마츠가다 고지로(松方幸次郞)를 들 수 있다. 그는 제 일차 세계 대전 동안 선박 제조의 특수경기를 바탕으로 이룬 재력으로 로댕의 <칼레의 시민>등을 비롯해 유럽에서 무려 2000여 점의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24년부터 일본 정부가 국내에 들여오는 미술품에 100% 세금을 붙이면서 그는 이미 들어와 있던 1300점 이외의 나머지를 런던과 파리에 맡겨두었다. 2차 대전이 나자 파리의 로댕 미술관에 맡겨두었던 그의 소장품들은 적국 재산으로 몰수당했고 런던에 있던 300점은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나중에 프랑스 정부가 작품들을 반환하기는 하였지만 <반 고흐의 침실>과 같은 몇몇 유명한 작품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우에노에 위치한 국립서양미술관이 바로 마츠가다의 소장품을 기반으로 창설된 미술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