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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從容 Gelassenheit
김형효가 도덕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從容 Gelassenheit는 gelassen ‘여유로운, 느긋한’의 명사형으로서 다른 사람은 ‘놓음(Gelassenheit, letting-go)’ ‘초연한 내맡김’, ‘마음의 여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종용從容하다’ 의미는 ‘성격이나 태도가 차분하고 침착하다.’입니다. 흔히 쓰이는 종용慫慂 (잘 설득하고 달래어 권함)과 다른 말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충분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문헌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김형효) 中에서
존재(有)가 존재자를 존재케 한다는 것은 법성(法性)으로서의 존재의 유(有)의 性起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종용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여기에 쓰여진 종용은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의 본질을 알리는 중심 개념인데, 그 의미는 법성의 존재가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자로서 안온하게 그리고 유유하게 존재하도록 용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종용은 마음과 사물이 함께 아우르는 그런 교제의 의미를 안고 있다. 마음이 사물들의 존재를 간섭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물들의 존재를 존재로서 안온하게 그리고 유유하게 친구로서 비쳐주는 너그러움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 從容 Gelassenheit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철학 」/ 김형효 4. 마음의 기호의 이중성인 본능과 본성 中에서
마음은 욕망이다. 그 욕망을 소유론적 욕망과 존재론적 욕망으로 대별케 하는 이중성도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이익을 좋아하는 기호와 같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은 이익을 좋아한다. 선과 불선도 다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의 기호가 갖는 경향의 차이에 기인할 뿐이다. 그 경향의 이중성을 갈라놓게 하는 것이 곧 본능과 본성이다.
본능적 마음은 자아가 소유론적 만족을 취득하기 위하여 바깥에서 타동사적으로 남들과 싸워서 그 이익을 쟁취하려는 이기배타적 욕망이다. 이 욕망을 탐욕이라 부르기도 한다.
본성적 마음은 자아가 지워지면서 마음이 스스로 분비하는 기쁨이 솟아나면서 타인들에게 이익을 증여하는 자리이타적 욕망이다. 이 욕망을 원력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아의 마음이 자리이타적 욕망을 분비한다는 것은 마치 허공의 공이나 무가 무한한 존재의 생멸을 용출하고 수용케 하는 그런 종용(letting-be)의 길과 다르지 않으리라. 하이데거의 말처럼 종용의 사유론은 세상을 심판하고 판결하려는 마음의 거부와 다를 것이 없다. 선종의 3조인 승찬대사가 《信心銘》에서 ‘지극한 道는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놓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라고 말한 사상이 하이데거의 저 종용의 사유와 어찌 다르다고 할 것인가? 소유론적 본능과 존재론적 본성은 같은 마음의 자리에 동거하고 있다. 다만 전자는 이기배타적이고 후자는 자리이타적인 그런 기호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마음의 기호의 차이를 짓게 하는 척도가 자아와 무아의 구분이라 본다. 마음이 무아의 무심에 접근하면 할수록 세상의 사실은 차연의 법칙으로 보이고, 자아의 아상이 중심을 이루면 세상은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호오를 놓지 않게 된다. 차연의 법칙은 장악의 법칙처럼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대상으로 갈라놓지 않고, 연기법적 얽힘처럼 또는 수사학적 교차배어법(chiasmus)의 상관성인 卍자의 문자학적 교호작용처럼 그렇게 직물짜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세상의 현상을 본다. 이런 세상보기를 불교에서 여여한 사실의 正見이라 말한다.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김형효) 中에서
"진리는 밀어냄과 되돌아 옮김으로서 생기하는 ‘나타나는 감춤’이다. 이 나타나는 감춤은 자신이 두 가지 계기들의 조화나 또는 어느 한쪽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경우나 다 마찬가지로 존재자의 놀이를 위해 교차된 자유를 준다. 이 존재자의 놀이는 사물, 도루, 만들기, 일, 행위, 제물로서 존재하면서 존재자의 진리를 보호한다.“ ····
“저러한 진리의 본질, 즉 마음의 근원으로서 밀어내면서 동시에 되돌아 옮기는 나타남과 감춤은 우리가 자성화로서 경험하고 있는 그 본질의 근거에서 현현하고 있다.”····
진리는 무애의 차연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나타남은 화엄학적으로 法性이 有力으로서 相入하는 능동적 순간이고, 진리의 감춤은 그 법성이 無力으로서 수동적으로 相卽하는 순간이다. 이 능동적 순간을 하이데거는 일방이 타방으로 밀어내는 상입의 유력이라고 보았고, 동시에 수동적 순간을 그는 일방이 타방에 의하여 되돌려 옮겨지는 상즉의 무력이고 보았다. 그래야만 위에서 언급된 밀어냄의 유력과 되돌아 옮김의 무력과의 이중성으로 진리를 해석한 것이 이해된다. ····
법성의 나타남과 감춤의 이중성을 다시 마음의 근원으로서의 이중성으로 자성화시키면서 그 자성화의 이중성을 밀어냄-되돌아옮김으로 대입시키고 있다. ·····
존재로서의 법성인 [그것]만이 이중적인 교차배어법적 얽힘장식으로 그려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도 역시 그런 이중적인 교차배어법적 새끼꼬기로서 형성되어 있다, 그런 마음의 이중적인 새끼꼬기로서 [유/무]를 교차시키는 진리는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의 놀이를 놀이로서 존재케 해주는 그런 종용의 道와 같은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유/무]를 사실상 그렇게 이중적으로 [유력/무력]으로서 상관적으로 교직하기 때문에 존재자를 인간중심적인 대상이나 또는 인간의 탐욕을 위한 이용가능한 물건으로서만 간주하지 않고,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차연의 놀이를 하도록 종용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편안해지고 인간도 아울러 대지에 거주하면서 모든 존재자를 괴롭히지 않고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존재함이 거절로서 이해된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후퇴나 퇴각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거절이 하나의 配定의 친밀성임을 알린다.” 배정은 할당의 개념처럼 몫을 분배하는 것을 말한다. 존재함은 나타남과 숨음의 양가성을 가진 동거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어서, 거절은 숨음의 하나의 양식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 거절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여나 증여의 몫을 나누어 주는 배정의 친밀성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즉 숨음의 거절이 오히려 나타남의 증여를 증여이게 해준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숨음의 거절은 증여가 뇌물의 유혹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자이게 종용시켜 주는 배경을 지닌다. 존재자가 놀이하고 춤추는 것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대접해 주는 종용의 마음이 있어서 가능하다. 그런 종용의 마음이 가능한 것은 無의 숨음과 거절함의 신비를 有가 은닉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거절은 모든 것이 다 노출되어 인간의 손에 다 쥐어졌다고 믿지 않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 거절의 감춤이 없는 시여는 시여의 한계를 노정하는 전부 퍼냈음의 고갈을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거절이 오히려 배정의 친밀성이라고 규정했다. 즉 거절의 신비가 시여의 베풀음을 물질적 선물로서 오인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선물은 친밀성을 유지시켜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존재자를 이용하려는 저의가 숨어있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여기고 종용하는 그런 자기의 보시가 없기 때문이다.
“거절은 가난을 방어하는 필요에서 가장 근원적이며 가장 시원적인 가난을 가장 신심으로 간청함이다.” ···· 거절함은 은적의 숨음이고 또 은닉의 감춤이며, 그런 은적과 은닉의 필요성은 그것이 마음의 가난을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다. 마음의 가난은 마음의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다. 거절은 흔히 생각하듯이 인색의 표시가 아니고,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찬 소유적 사고방식을 멀리하는 계기를 준다. 가난은 소유의 有에서 존재의 有로 마음을 이동시킨다. 그런 이행이 일어나기 위하여 마음은 자신을 다 퍼내는 진열로 마르게 하지 않고, 늘 일말의 퍼내기의 거절과 그 신비를 간직해야 한다. 퍼내기에 열을 올리는 자는 자신의 고갈된 마음을 보상받기 위하여 더 소유의 탐욕에 매진한다. 거절은 인색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이 탐욕스럽지 않게 하는, 즉 존재자를 종용하는 그런 배정의 자기 증여와 통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잘 시여하기 위하여 마음의 가난을 방어해야 한다. 그런 가난은 가장 친밀하게 다른 존재자들과 사귀려는 간청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空의 사유 특징
하이데거는 無나 空을 소극적인 의미에서 부족함이나 결핍의 뜻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空은 어떤 기다림이나 소원이 채워지지 않는 단순한 불만족이 아니다. 空은 오직 마음의 존재로서 즉 평정으로서, 다시 말하면 우물쭈물하는 거부 앞에서의 안정으로서 존재한다.” ····· 공은 허전하게 비어 있는 그런 공허가 아니다. 공은 현존재의 마음으로서 존재한다. 마음이 자기를 다스려서 어떤 생각의 실마리를 어지럽게 하지 않는 그런 禪的인 평정의 상태가 空이다. ··· 그런 평정의 빈 마음에서 탈근거로 回心시키는 깨달음의 시공이 정초된다. 왜 공이 우물쭈물하는 수줍음의 거절 앞에서의 평정일까? 수줍음의 거절은 숨과 감추기 위한 태도이다. 숨고 감추지만 그것은 이미 본질현현의 우회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숨음이나 감춤을 단순한 도피나 후퇴로만 여겨서는 안된다고 하이데거가 누차 강조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숨음은 그냥 평정한 마음의 현현이기에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어떤 인위적인 생각의 표출은 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 평정은 ‘고요의 근원이고 몸의 법칙’이며, ‘존재함의 본질현현으로 말없는 가운데 근접하기 위한 계시’라고 언표하였다. ····
하이데거가 평정을 해석한 내용을 일별해 보면, ‘고요’, ‘모음’, ‘숨음’, ‘비어있음’, 그리고 ‘탈근거’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하이데거의 사유는 그가 진단한 서양철학사의 흐름에 대한 비판과 직결된다. 그에 의하면 서양철학사의 본질은 신비를 점진적으로 추방한 역사라는 것이다. 신비의 축출은 無의 배제와 같은 궤적을 간다. 無를 有에서 배제한 역사는 자연히 유를 존재자로 표상하고, 그런 표상의 신학적 역사는 근현대에 이르러 인간을 최고의 존재자로 여기게 하였다. 근현대의 사상사에서 기독교의 신은 비대한 경제기술의 육체 앞에서 그 경제기술이 야만이 아님을 장식하는 그런 교양적 가치 기준으로서만 존속하게 되었다. 근현대는 신비의 의미가 소멸한 시대라고 하이데거는 규정하고 있다. 신비가 소멸하였다는 것은 존재가 소유나 기능으로서만 평가받는 시대라는 것이다. ····
현대인은 모든 것을 투명하게 샅샅이 파헤쳐 소유하면서 그것에 탐닉하려는 음욕의 자세에 도취해 있게 된다. 존재의 소유화는 존재의 가격화와 동의어로 쓰인다.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쟝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현대인은 비대한 음욕의 화신이다. 현대인은 끝없는 소유와 탐욕으로 비대해졌고, 타인을 투명하게 실오라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벗겨 보려고 하는 음욕의 화신이다. 매스컴이 이런 풍조를 더욱 부채질한다. 대중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대가로 돈을 버는 이른바 상업주의의 만연이 현대 문명의 질환이다. ····
선정은 무와 공과 같은 탈근거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탈근거에서의 창조적인 인내’이다. 공한 마음은 소유욕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려는 그런 집착을 씻어냄으로써 마음을 고요히 모으는 평정이다. 마음을 모으는 것은 마음의 걱정거리를 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에 해당한다. 마음을 모으는 것은 꽃이 휘날리는 散花와 하나로 되는 놀이이며, 눈오는 밤의 창가에 비친 밤의 소리들 들으면서 느끼는 적요의 충만함이다. 고요는 진지의 은적이라는 비유가 가리키듯이, 마음이 어떤 것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거부할 때 진여로서 나타난다.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마음의 평정에 법성의 실상이 나타난다. 이 나타남아 바로 법성의 有이다. 숨음은 나타남의 근거이다. 그러나 그 근거는 탈근거에서 비치는 그런 나타남이다. 숨기 위하여 마음은 마음을 모으고 은둔한다. 현대인은 이 은적의 깊이와 고요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은적의 깊이가 없으면 나타남의 표현이 천박하다. ····
공은 결국 마음의 가난과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등장된 개념인 가난은 결코 배고픔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공은 하나의 배고픔에 동반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가난은 오히려 자기 안에서 꽃봉오리가 터지는 企圖인 평정의 가난이고, 가장 근원적인 귀속의 근거가 되는 마음 상태이다.” ····· 공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내부에서 꽃이 피는 마음의 평정이 함의한 가난이고, 그것은 또한 가장 근원적으로 법성으로서의 존재의 無와 숨음에 귀속하는 마음 상태로서, 그 마음 상태가 곧 마음의 근거임을 알린다. 그러므로 마음이 근원적으로 귀속하고 있는 마음의 바탕과 같은 근거는 空이다.
따라서 공은 마음이 근거로 삼고 있는 탈근거와 상관적이다. “탈근거로서 비어 있음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탈근거는 근거 상실과 같이 각 근거에 대한 부정이 아니고, 그 자신의 감추어진 넓이와 아득함 속에서 근거에로의 긍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은 하나의 허무적 심연과 같은 근거 상실을 의미하지 않고, 有의 근거를 아득히 멀고 깊은 것에서 긍정해 주는 충만을 말한다. 그러므로 공은 비어 있으나 有의 나타남의 깊이와 신비를 가능케 해주는 법성의 존재론적인 무고갈성과도 같다.
첫댓글 다시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_()_
학습카드에 첨가합니다. 정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