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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2026년 4월 11일 (토)
2. 날씨: 맑음
3. 경로: 영아지주차장 - 마분산 - 창나루주차장 - 남지수변공원 - 유채꽃밭 - 창나루주차장 - 개비리 수양벚꽃길 - 옥관자바위 - 영아지주차장
4. 거리: 약 12.4km
5. 소요시간: 3시간 20분
6. 코스정보 : 개비리길, 마분산, 유채꽃축제
7. 지역: 경남 창녕군
8. 트랙:
9. 코스지도
[남지 개비리길]은 용산마을에서 영아치마을을 지나 아지나루터까지 이르는 낙동강가에 있는 길로 벼랑을 따라 자연적으로 조성된 길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이 길은 수십 미터 절벽 위로 아슬아슬 이어지며 낙동강이 그려주는 눈부신 풍광을 가슴에 수놓아 올 수 있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걷는 시골 여행길이다. 또한 개비리길 주변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등록문화재 제145호)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개비리길 유래는 여러 이야기로 전해진다. 영아치마을에 사는 황 씨 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마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뜻의 지방 사투리)였다. 본시 개의 젖이 10개밖에 되지 않아 조리쟁이는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고 이를 가엽게 여긴 황 씨 할아버지는 여기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조리쟁이는 집에 남겨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등(山) 너머 시집간 황 씨 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에 왔다 가면서 조리쟁이를 키우겠다며 시댁인 알개실로 데려갔다. 며칠 후 황 씨 할아버지의 딸은 깜짝 놀랐다.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렁이가 젖을 주려고 등(山)을 넘어온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살펴보니 누렁이는 하루에 꼭 한 번씩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누렁이는 알개실 마을에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은 누렁이가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누렁이 뒤를 따라갔는데 누렁이는 낙동강을 따라 있는 절벽면의 급경사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못하고 강으로 떨어져 눈이 없는 곳을 따라다녔던 것을 확인하였다.이때부터 사람들은 높은 산 고개를 넘는 수고로움을 피하고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절벽)로 다니게 되어 '개비리' 라는 길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개는 강가를 말하며 '비리' 는 벼랑이란 뜻의 벼루에서 나온 말로서 강가 절벽 위에 난 길의 뜻으로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을 의미한다. (안내판)
[전설의 마분송(馬墳松)] 마분산 주변에는 주간(柱幹)이 여러 개로 분주(分柱)하여 자라는 소나무를 쉽게 볼 수 있는데 마분산에 자생하는 다간(多幹) 소나무를 마분송(馬墳松)이라 한다. 임진왜란(1592)년 당시 곽재우 의병장이 마분산의 나무에 의병의 옷을 입혀 허수아비로 만들어 의병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는 전술로 왜적을 물리쳤듯이, 마분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의병의 무덤 주위의 소나무들도 임진왜란을 맞아 우리 강산 우리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의병들의 무덤을 수호하고자 주간(柱幹)을 여러 개로 분주(分柱)하여 우거진 숲으로 위풍을 당당히 하여 함부로 침입자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안내판)
[의병 무덤(義兵墓)] 말무덤산 정상인 이곳에는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을 맞아 곽재우 의병장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이름 없는 의병들이 합장되어 있는 거대한 무덤이다. '무덤의 둘레가 20m 높이 5m 로 내부에는 석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부는 돌을 쌓아 둘렀다. 커다란 봉분을 지어 자손만대에 그들의 용맹을 기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록에 전한다.420여년이 지나는 동안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고 전면에는 개인 무덤이 조성되어 크게 훼손되어 현재의 형태로 남아 있다. (안내판)
[곽재우 장군의 토성과 말무덤] 임진왜란(1592년) 때에 천강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은 의병을 일으켜 마분산(馬墳山)에 토성을 쌓아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왜적을 맞아 신출귀몰하게 싸워 백전백승하였다. 이 토성은 작은 규모이나 정상에 공간을 두어 강에서는 보이지 않게 설계되었으며 산을 힘들게 올라온 적과의 육탄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정상 안쪽에 흙으로 성을 쌓았는데, 430여 년의 풍상에 **토성(土城)**은 허물어져 겨우 흔적만 남겨두고 있다. 곽재우 의병장은 왜장 하시바가 강변에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열세인 의병이 전면 전투로는 승산이 없음을 직감하고는, 자신의 말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으로 돌격하게 하여 벌떼의 공격을 받은 적군의 혼란을 틈타 기습 공격으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대승을 거두었다.하지만 적탄에 맞아 자신의 말이 사살되자 그 공을 높이는 뜻으로 토성 안의 의병의 무덤 뒤에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로 인하여 이 산 이름이 '창진산(倉津山)'에서 말 무덤 산(馬墳山 마분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덤의 둘레가 25m, 높이가 5m로 기록과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세월의 풍파와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져 지금은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렵다. (안내판)
[마분산(馬墳山)과 창나리(倉津) 마을] 창녕 남지 개비리를 따라가면 용산리 첫 마을인 창나리가 나오는데 창(倉)이 있던 나루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창진(倉津)이라 적는다. 이 마을의 뒷산은 창진산(倉津山) 또는 마분산(馬墳山)이라 불린다. 창나리 마을의 유래는 신라 때 산 앞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강 건너 백제와 국경을 이루어 이곳 마을에 군사가 주둔하면서 군사용 큰 창고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창고가 있는 나루’라는 뜻인 ‘창나리(倉津 창진)’마을로 지금까지 불리며 산 이름도 창진산(倉津山)으로 불려왔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맞아 천강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의 죽은 말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 하여 ‘마분산(馬墳山)’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안내판)
[낙동강 전투 최후의 방어선] 마분산(馬墳山)과 남지 개비리길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2개월도 못되어 낙동강 북쪽이 모두 점령당하였다.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 그리고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 국군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구축하여 창녕과 남지지역 방어를 맡은 미 제24사단은 낙동강 박진나루를 중심으로 적과 대치하였다. 당시 북한의 최종예비대인 제4사단은 8월 15일까지 ‘부산점령’이라는 1차 목표를 세우고 남지 일대 영산~영암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최단거리 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혈전을 전개하였다. 8월 6일 야간에 몰래 박진나루를 도강하여 은밀히 침투한 북한군은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8월 11일에는 영산면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미군은 9월 15일까지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였다. 낙동강 남지 전투로 9월 8일에는 남지철교(국가등록문화재) 가 폭파되었으며, 치열한 전투로 낙동강 물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어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사의 길이 빛나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남지 박진에는 ‘박진전쟁기념관’과 ‘박진지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안내판)
[홍의장군 붉은돌 신발] 홍의장군(紅衣將軍) 망우당(忘憂堂) 곽공 휘 재우(郭公 諱 再祐 1552년~1617년)의 돌 신발(石鞋). 망우당 선생은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817번지 외가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22일 만에 현고수(懸鼓樹-수령 520년이 넘는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북을 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이후 첫 승전보를 기음강(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 - 남지읍 용산리 창나루)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의령·창녕·합천·함안·달성 일원에서 연승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래서 왜구들이 붉은색만 보면 두려워하여 도망갔다고 한다. 어느 날 망우당선생께서 외가에 출타를 갔다가 왜구가 기음강변에 출몰했다는 통문에 급하게 기음강을 도강(渡江)하면서 붉은색 한쪽 신발은 낙동강 물에 떠내려가고 한쪽신발은 창녕군 남지읍 창나루 쪽 강변에 놓이게 되었다. 망우당 선생은 “이 붉은 신을 보관만 잘해도 왜구들이 침입하지 못 할 것이다.” 하셨다. 하지만 창녕군 남지읍 창나루 주민들이 붉은 신을 잘 보존해왔으나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에게 빼앗겨 낙동강에 던져지고 말았다. 그 후 창나루 마을 주민들은 마분산 말 무덤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어느 날 마을이장 꿈에 홍의장군 망우당선생께서 나타나 잃어버리지 않을 “붉은색 돌 신을 줄 터이니 보존을 잘 해서 더 이상 왜침이 없길 바란다.” 하셨다. 망우당 선생께서 꿈에 말씀하신 곳을 가보니 실제로 붉은색을 띤 신모양의 돌이 기음강 주변 땅속에서 발견되어, 창나루 주민들이 감사의 고유제를 지내고 이 자리에 모시게 되었다. (안내판)
[옥관자 바위]는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남지읍 동포마을 박○○씨가 수로 공사 중 발견하게 되었다. 중장비로 작업을 해도 바위가 움직이지 않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몇 번을 시도한 뒤에야 바위 일부가 보이기 시작하여 조심스럽게 들어내 보니, 마치 봉황(鳳凰)새의 알처럼 타원형 모양이었으며 크기가 옥제(玉製)의 넓었다.
바위는 부드럽고 긴결이 있어 일정한 기운이 흐르는 듯하며, 당시 주변에 솔향내가 풍기고 옅은 빛이 번쩍이며 맑은 샘물이 솟아 주변의 산기와 바위 등이 상승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우주(宇宙)를 만들어내고 있었다고 한다. 매일같이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기도를 드렸던 옥관자(玉貫子) 바위(巖)와 자식을 등교시킨 충효나무를 돌 옆에 모셔두어 재향하시며(載享祭) 딸 할머니(昌原黃氏)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안내판)
[관직에 등관시킨 층층나무]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마을에 살았던 재령이씨(載寧 李氏) 한 집안이 1929년경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수송이 원활하지 못할 때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배를 띄워 사람의 이동이 편리한 수변(현, 옹달샘 주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농사일을 하거나 물고기를 시장에 팔아 춘궁기(春窮期)를 면했지만 강물 범람으로 재해가 발생하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재령이씨(載寧 李氏)댁 할머니(昌原 黃氏)께서 북풍한설 몰아치는 꼭두새벽에 매일같이 찬물에 목욕하고, 옥관자(玉貫子) 바위 앞에 맑은 정화수(井華水) 한 그릇을 떠놓고 가정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였다. 기도(祈禱)하는 100일째 되는 날 천지신명께서도 그 모습이 가련했는지 날이 샐 무렵에 백발에 긴 수염을 한 산신령께서 강무(江霧)를 타고 불현 듯 꿈에 나타나 한 그루 나무를 점지해 주시고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꿈에서 깨어 그곳으로 가보니 나무껍질에서 광택이 나는 한 그루나무가 서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무릎을 내리치면서 “바로 이 나무다.” 하시면서 그 날부터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슬하에 둔 아들이 관직에 입문하게 되었고, 관재 구설 하나 없이 고을 원까지 올라 층층나무는 영험하기로 유명해졌다. 그 후 남지읍 곳곳에 심어져 자라고 있으며 층층나무를 집에 심어두면 관직과 직장에 있는 사람은 막힘이 없이 관직의 층계 층계를 거쳐서 오르게 된다는 층층나무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안내판)
[금천교(禁川橋)] 이름의 유래는 조선시대(朝鮮時代) 궁궐 창덕궁(昌德宮)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지나 인정전(仁政殿)으로 가는 길목의 명당수를 건너는 다리 이름에서 발췌하였음 (나라에 일을 하는 신하는 공이 아닌 사사로운 마음으로 공무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금천교를 건널때, 흘러가는 하천에 모든 사심을 버리고, 건너 오라는 뜻). 그와 같이 풍광이 아름다운 이곳, 신성한 창녕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대나무 숲속에 희락동천(喜樂洞天)으로 들어오는 모든분들은 사악한 마음을 금천교에서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오셔서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이곳에서 신선과 선녀가 되듯 하시면, 좋을 것 같아 다리 이름을 금천교라 붙였습니다. (안내판)
[동천교(洞天橋)] 이름의 유래는 하늘동네, 신성한 곳, 신선이 사는 곳의 의미를 가진 이곳 회룡동천(回龍洞天)에서 비롯되었다. 낙동강 강가에 강물이 급류를 이루면서 오랜 세월 속에 만들어 놓은 모래둔지에 잘 자란 대나무숲, 옛부터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이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선비들이 모여 살았던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여 만든 동천교. 이미 금천교를 건너면서 사악한 마음을 버리고 오셨다면 하늘에 있는 동네, 즉 신선과 선녀가 사는 신성한 이곳으로 접어드는 동천교 다리입니다. (안내판)
[죽림쉼터]는 논산영락(論山永樂) 이래로 모산재성(母山齋城) 에 의하여 토성(土城) 안의 모진고지(土止)에 해당되어 삼국시대부터 이용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남지읍의 지명 유래는 낙동강의 물길이 이곳을 돌아 흐르며 형성된 자연지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예부터 대나무가 울창하여 ‘죽림(竹林)’이라 불렸으며, 대숲 사이로 난 길은 주민들과 나그네들이 쉬어 가던 쉼터 역할을 해왔다. 또한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연 치유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60여 년 전 식재된 대나무 숲으로 현재까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이후 정비 사업을 통해 산책로와 쉼터가 조성되어 주민과 방문객들이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2015년 「남지읍 생태경관림 조성사업」이 시행되면서 주변 환경이 정비되었고, 2018년에는 노후 시설을 개선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안내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