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 24기 황무선
1 정신은 인간의 혼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리움으로 먹먹해진다. 눈을 뜨면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시계의 초침으로 들린다. 아침이 되었으니 일찍 일어나라는 무언의 종소리다. 아버지의 손은 거친 파도처럼 투박해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햇살 닮은 미소가 번진다.
2 “시간은 금이다.”라는 속담을 자녀들에게 주문처럼 각인시킨다. 유년 시절 학교에 다녀오면 자발적으로 숙제를 하고 복습과 예습으로 오늘의 할 일에 동그라미를 칠하며 자립심을 키운 계기가 되었다.
3 ‘맹모 삼천지교’가 옛말이 아니다. 딸의 교육을 위해서 시행할 줄이야? 집 주위에는 군부대가 성냥갑처럼 붙어 있어 신작로를 활보하는 군인들이 딸에게 해코지할까봐 파수꾼을 자처했다. 집에서 몇 정거장 지나면 눈부신 푸른 바다가 있었지만 하교 후에는 아예 외출을 금지시켜 아름다운 바다는 그림 속의 떡이었다.
4 딸을 많이 사랑한 나머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호했다. 거의 집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이웃 동네가 궁금해도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공감되는 말이다. 성인이 되어 처음 방문한 도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아버지의 넘친 사랑이 길치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5 아버지는 습관을 중요시했다. 공구를 사용한 후에는 반드시 제자리에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자식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는 법, 주위 환경을 청결하게 정리하는 것, 미리 생각하고 일의 순서를 정하는 것, 이 또한 아버지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였다.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철저한 관심이 무탈하게 살아온 뿌리라고 생각한다.
6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농사를 지으셨고 목돈이 생기면 논을 샀다. 동네 이장의 자격으로 외출할 때는 깨끗한 옷과 머리에 포마드를 진하게 발랐다. 마치 ‘로마의 휴일’의 그레고리 펙처럼 멋지고 잘생겨 보였다. 자녀들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마당 공간을 활용하여 아래채를 설계했다. 벽돌을 마당에 쌓아 놓고 시멘트를 모래와 물을 배합하여 집을 지었다. 학교가 가까워서 자취방의 수요를 예상했다. 특별한 지식이 없었지만 직접 방을 만들고 보일러 호스를 정교한 손놀림으로 방바닥에 배열하던 모습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조용히 집을 짓는 아버지를 관찰하면서 멋진 건축가라고 생각했다. “너희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편안하게 살아야 한다” 아예 노래를 부르셨다.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준 아버지가 문득 선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7 고향의 겨울은 낭만적이다. 아버지는 예술적인 손놀림으로 가오리연과 방패연을 만들어 주셨다. 가장자리에 색칠한 가오리연과 수수한 방패연이 친구가 되었다. 연을 띄운 후 실을 칭칭감던 기억의 파편들과 실이 끊겨 멀리 도망간 연이 불쌍해서 울기도 했다. 어릴 적 연날리기의 추억은 정서적인 허기를 달래주었다.
8 잠시도 쉬지 않는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장작을 쪼개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뿌지직 장작 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숯불에 달콤한 고구마를 굽는 아버지의 거친 손이 군고구마처럼 따뜻하게 느껴진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굴레 속에서 안전하게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버지의 책무였으리라. 어머니를 자주 도와주는 배려가 어린 나를 풍요롭게 만들었고 가정의 평온함이 좋았다. 내 몸은 작았지만 아름다운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면서 결혼의 환상을 꿈꾸게 되었다.
9 농번기가 끝날 즈음 남매들을 불러서 신문지를 깔아 놓고 긴 손으로 벼룩에 먹을 갈아 하얀 한지에 붓글씨 대회를 열었다. 아버지를 닮아서 모두 명필이었지만 오빠들의 실력이 뛰어나 상품으로 미리 용돈을 받았다. 자식들이 간혹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무릎을 꿇게 하고 변호사처럼 또렷한 어조로 설교하셨다. “어쩌면 도덕책에 있는 말을 복사기처럼 가동할까?” 자녀의 눈높이에 심리를 저울질하며 틈을 주는 밀당의 고수였다. 아버지의 설득력에 공감하며 마음속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10 시골에서 대학은 꿈이었지만 오빠들은 손에 쥔 미래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오빠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와 회사원이 되었다. 오빠들이 결혼할 시기에 피와 땀인 금싸라기 땅을 선뜻 처분하여 도시에 살림집을 마련해 주셨다. 자식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둘씩 도시로 훌훌 떠나보냈다.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섭섭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충분한 사랑이 값진 유산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희생정신으로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감사했다.
11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오일장에 장사하러 간 어머니를 마중가서 소달구지를 끌고 오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도로 옆에 웅덩이가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채 소와 함께 웅덩이에 빠졌다. 운전 부주의를 소에게 화풀이하는 아버지가 우스웠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12 내 손을 살포시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 아버지는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홀시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 네 분의 시누이와 다정하게 지내거라”는 당부에 울컥했다. 딸을 결혼시키는 순간까지 태산처럼 걱정을 품고 살던 내 아버지, 딸 가진 부모가 무슨 죄인지 눈물이 났다. 아버지께 누를 끼치지 않는 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13 사위가 외동이라 손자를 낳아야 하는데 손녀를 낳았다고 걱정을 붙들고 사셨다. 삶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인자하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툭툭 털어낸다. 어느 자식보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더욱더 단단해졌다. 훌륭한 아버지를 만난 것이 최고의 행운이었고 고향이 생각나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못 견디게 보고 싶다.
14 두툼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용기를 주시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자녀를 위해 나침판이 되어 준 아버지의 마음을 마주하며 행복하게 잘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15 정신은 내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삶이 가치 있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버지의 포근한 사랑 덕분이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소중한 두 손과 넉넉한 마음이 함께한다.
첫댓글 아버지의 사랑이 듬뿍 느껴집니다 자연스러운 문체로 잘 쓰셨어요 따뜻한 가족애가 부러운 글입니다^
임성림님
부족한 수필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모님의 금슬도 좋으신 것 같고 더욱이 훌륭하신 아버지를 존경까지 하시는 착한 딸이네요.
잔잔한 감동이 일어 납니다. 행복한 가정입니다.
진일 스님
항상 고맙습니다
모든 아버지께서 훌륭하시듯이
제 기억 속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계십니다.
삶 전체에 걸친 내용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이정열님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손" 이라는 과제로
한 번 더 아버지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