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교정의 이곳 저곳에 있는 모든 수목들이 짙은 초록의 옷으로 치장하고 다가올 따가운 광선과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는 듯 오늘따라 짙푸르다.
구름한 점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녹색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하늘도 점점 높아만 가고 있다.
벌써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조석으로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일기 시작한걸 보니 곧 가을이 기다리고 있나보다.
얇은 여름 자켓을 입었는데도 그리 덥지 않다.
이런 와중에 이렇듯 하늘도 둥글고 온갖 초목들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옹기종기 그저 캠퍼스가 평화롭고 고요하기만 하다.
신록으로 우거진 대학 캠퍼스가 개학과 더불어 활기가 넘쳐난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걸어가는 그 기분은 걷지 않아 본 사람은 못 느끼는 정복감이랄까 하여튼 뭐 그런 기분이다.
일찍 출근하니 우선 반기는 건 부지런한 새들이요, 이 학교가 생길때부터 자라고 있는 우람한 거목뿐이다.
요즘은 청소하신 분들도 멋내느라 팔토시와 얼굴도 못 알아 보게되는 모자를 쓰고 일하기 때문에 인사를 나누기는 커녕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
어쩌다가 응대를 한다해도 얼굴만 보이고 눈구멍은 가려진 채 사무적인 인사로 그친다.
길옆으로 심어져 있는 온갖 수목과 초본 식물을 보며 오는 데 내 눈에 좀 거슬리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내가 발을 내디디고 있는 바닥의 네모난 벽돌과 작은키나무 사이로 설치된 벤취와 인도와 차도를 구분짓는 경계석이 그렇고 특히 멀리 보이는 건물의 구조 형태가 모두 한결같이 직선의 집합이란 거다.
얼른 눈 가까이서 동공을 정지시킨 것이 있었으니 주변의 시설물들이 온통 직선이란 것이다.
물론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그 선이 이어져 곡선이 되고 면이된다는 수학적인 이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말이다.
사무실에 오면 또 어떤가!
출입구인 사무실 문이 직사각형지 하루중 가장 많이 신세를 지고 있는 책상과 컴퓨터 모니터 그리고 키보드까지 직선이다.
심지어는 보드랍고 부드러운 화장지가 들어있는 티슈의 박스조차 사각이다.
오늘의 날짜를 안내하는 카렌다와 월중행사의 일정을 적는 월중 행사표 보드도 직사각형이다. 가끔 밖을 내다보는 창문도 사각형이요,
이 창문에서 내려다 본 주차장 역시 굵은 선을 경계로 하여 정확한 사각형이 또렷이 보인다. 어쩌다가 옥상에 가서 교내의 건물을 볼 때가 있다.
갑자기 답답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짐을 느낀다.
마치 내가 일정한 룰이 정해지고 그 룰에 따라 일률적으로 싸우게 끔 운명지워진 사각의 링에 들어와 있는 이 현실이 참 안타까워서 그랬을까!
마치 권투 선수가 이 사각의 링안에서 싸울 수 밖에 없는 그 운명처럼 슬픈 생각이 든다.
내가 방금 타고온 버스도 자세히 보면 곡선이지만 상식적으로 버스하면 사각형아닌가!
사무실안의 각종 문서류나 참고 화일을 넣어 놓는 서류함이나 문서함 역시 사각형이다.
심지어는 농촌의 곡선의 아름다운 극치를 보여준 논빼미조차도 직선화 된지 오래다.
세월이 갈수록 이 직선의 형태는 점점 늘어가고 있어 곡선이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한국의 전통가옥을 대표하는 곡선의 미도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거형태도 아파트문화가 정착한 이래 어딜가나 아파트 숲으로 우거져?
아름다운 산하를 볼 수 조차 없는 현실이다.
심지어는 하늘을 찌르는 고층아파트 건축으로 주민들의 일조량 등 피해소송이 늘어가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난감하다.
문만 열면 아침해가 방안까지 비추고 창문만 열면 뒷동산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공기를 마시던 때가 불과 몇 십 년전의 일에 불과한 데 아이러니한 세상의 변화다.
가까운 산에 가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성냥곽처럼 네모 반듯한 고층 아파트.
직선은 획일적이요 일회성이다.
색에 비유하면 직선은 차가운 색이요 곡선은 따뜻한 포용과 감쌈의 색이다.
성질에 비유하면 직선은 직설적이고 나와 남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냉담하고 냉정한 반면 곡선은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곡선의 아름다움은 뭐니뭐니해도 여유와 여백의 미다.
가장 대표되는 것이 경주 포석정이다. 이 포석정이 직선이라면 술잔이 금방 도착하여 생각하는 여유를 갖기전에 이미 술에 취했겠지만, 곡선의 물결을 따라 천천히 도착하는 술잔을 기다리면서 짧지만 그래도 생각의 여유를 가지지 않했을까.
직선은 우리 경제 빠른 발전의 근간이 된 '빨리빨리'와 연관된다.
직선으로 가야 빨리 가게된다. 곡선은 어딘가 모르게 더디게 보인다.
시골의 논두렁길도 반듯하게 길이 나 있어야 달음박질을 쳐도 곧장 가지 꾸불꾸불하면 있으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당연하다.
정확히 따지면 몇 초 몇 분의 차이도 아닌데 말이다.
무엇이고 한 걸음에 가야하고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는 우회해서는 안된다.
우회한다는 말은 바로 비~잉 돌아간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보통 상대방의 말이 핵심을 벗어나면 말을 돌리지 말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라 하신다.
말까지도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국민이 되어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쩌라고 하시겠지만, 무슨 이야기냐면 직선만이 대수가 아니고 대안이 아니라는 걸 강조한 것이다.
작금의 세태를 보면 옛날보다 강력사건이 갈수록 더 는다고 한다.
곡선이 많았던 그 시대를 아나로그라 치고 온통 직선으로 얼룩진 지금의 시대를 디지털시대라고 부른다면 일장일단은 있겠지만 정신적인 풍요를 누린 건 바로 아나로그 시대였다.
디지털 시대의 대표격인 편리함과 빠름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만 보면 지금이 천국으로 생각되겠지만, 물질의 풍요속에 우리들의 정신적인 가치는 상대적으로 잃었다라고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당시에는 큰 강력사건이 가뭄에 콩나듯 뜸했다.
지금은 하루가 멀다하고 세상을 뒤집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들어 투신자살을 보자 한강 다리위에서 주로 사회저명인사 등이 투신을 한다.
직선의 대표 구조인 다리위에서 자살이 행해지는 이유는 바로 접근성이 쉽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다리를 보라. 몇 미터 높이를 자랑하는 잘빠진 교각아래 큰 강물이 흐르고 있으니 보기도 좋고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
세상사람의 관심도 일거에 받을 수 있으니 죽어도 이름을 알리고 죽으니 좋지 않은가!
옛날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왜 이들은 이 잘빠진 다리위를 자살 장소로 택했을까.
그 이유는 이미 위에서 두 가지로 설명 드렸다. 이게 바로 세상의 아이러니다.
아나로그시대를 대변하는 초가지붕과 굴뚝의 연기.
동네 누구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면 아! 오늘 할아버지 기일이구나! 담방 알아챈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다.
정확히 맞춘 것이다. 틀림없이 아무개 할아버지 기일이 맞다.
그래도 아나로그 시대는 이웃간의 정이 가득했다.
돈이고 뭣이고 다 필요없었다.
돈독한 정이 있었기에 이웃간 다정하게 오순도순 잘 살아온 것이다.
마을 어귀를 따라 쭉 쌓아논 돌담길 얼마나 정겹고 친근하게 보이는가
비록 그 돌담길을 휘돌아 가자면 조금은 더디고 멀지만 그래도 자연석으로 일정한 규칙없이 자유자재로 쌓은 돌담길 멋스럽고 옛스럽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쌓은 것 같지만 온갖 세월의 풍상을 다 겪어 왔어도 끄덕없이 우리 곁을 지켜왔다. 이게 바로 곡선의 매력인 것이다.
세찬 바람을 맞아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본 것은 바로 직선으로 쌓은 브렄 담장이지 구불구불한 돌담이 아니다. 시골의 돌담이 무너진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좀더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브렄담장은 바람이 새어나갈 구멍이 없다.
상식적으로 시멘트 담장이 더 튼튼하니 끄덕없을 것으로 생각하나 장마철이나 태풍이 올라오면 대부분 브렄담이나 시멘트 담장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접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담을 보라 담을 쌓은 돌과 돌사이에 바람이 빠져 나가도록 작은 구멍들이 있다.
이 구멍새로 아침햇살이 새어 나오곤 했었다.
이 각박한 동시대를 살면서 문득 그때 그시절의 여유로운 선들이 그립다.
사방을 둘러봐도 직선과 사선들이 거미줄 처럼 엉켜있어 늘 불안하고 나 자신이 자꾸 위축되고 왜소해진 기분이다.
도시는 늘 긴장의 연속이지만, 잠시 도시를 떠나 산속을 거닐면 긴장이 완화되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게 된 것이다.
산을 찾게된 이유도 대부분 삶의 버거운 짐을 덜고 스트레스 받아 무거운 어깨를 가볍게 하기 위해 주말마다 산에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산에는 직선이란 게 없다.
산에서 직선을 좋아하고 즐기다간 언제 추락하여 죽을 지 모른다.
직선은 바로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한다.
산세에 따라 만들어진 곡선의 꼬부랑길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산에서의 직선은 외롭고 괴롭지만, 곡선의 길을 가면 반갑고 다정하며 행복하다.
하늘을 찌를듯한 우람한 나무도 직선처럼 곧게 보이지만 유연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땅부터 하늘까지 곡선이 연결이요, 위에서 곡선은 포용하고 감싼다고 햇듯 자연의 곡선은 모든 것을 수용한다. 곡선은 수용의 대가이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건물 뒤로 보이는 곡선으로 그어진 하늘의 경계선이 보이기 때문이다.
직선은 공격적이라고 잠깐 언급했는데,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늘상 부딪히는 사람들을 보면 직선만큼이나 더 냉담하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직선의 문화에 익숙하고 길들여 있어 이런 것들이 생활화 세속화 돼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자아의 정립을 세우기도 전 빨리 빨리 진행되는 이 시대의 조류에 동참해야하는 슬픈 현실이 때문이다.
비약해서 말하면 주말에 도시탈출을 하기 위해 너도나도 동시에 주말을 기다린지도 모른다.
나는 주말을 기다린다. 땅과 더불어 더 있고 싶어서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컴퓨터와의 씨름에서 벗어나 곡선의 숨결이 기다리는 자연의 광장으로 가고 싶어서다.
첫댓글 지기님! 안녕하시죠^^
한참 생각에 잠기다 갑니다
저는 어찌되었건 아직도 유년시절을 이웃간 정이 돈독한 아나로그시대에 살았기 때문인지 아나로그 향수에 가끔 젖어들때가 있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