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고등학교 학예부가 1953년 5월 펴낸 교지 '비봉 제7호'에는 여러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진주고등학교에 지원했던 중학교들이나.
진주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진학한 대학교 상황같은 이야기도 있고요.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몰랐던 그 시절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교련교육은 어떻게 했는지, 6.25를 어떻게 보았는지 등등 다양한 관심사항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몇몇 솔깃한^^ 내용들을 모셔와 봅니다.(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 비봉 제 7호와 8호 전문을 보시려면 -> 요기 <-
1953년 진주고 학도호국단 체제아래, 학예부가 발행했습니다.
비봉(飛鳳)이라는 글씨체가 아주 멋있군요. 획을 단순히 하면서 상승하는 분위기를 잘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쌀(!)이 아니라 보리가 있는 게 특이합니다. 어떤 연유일까요?
학도호국단 간부 등을 직선제를 했군요...그 험악한 시절에 말이죠~
4월 10일 신입생 입학식이 있고, 그 다음날 재학생 신입생 대면이 있었습니다.
특이한 방식입니다.
17일은 통일없는 정전반대 궐기 대회에 참가했고,
4월 24일은 개교기념일에 이어 25일은 북진통일 궐기대회를 했습니다.
5월 2일은 행군을 했군요.
21일은 3학년 수학여행을 했습니다. 후방에는 '일상'이 영위되던 시절입니다.
30일은 '희망음악회'라는 근사한 이름의 음악회와 함께, 간부후보생 입대장?회가 있었습니다.
6월 1일부터는 하복을 입고, 수업시작 시간이 8시?인가요?
6월 25일은 멸공통일의 날이라는 이름이었군요....
원래는 월마다 나오는 월보의 형식이었군요.
이를 염두에 두면, 부산 피난지에서 돌아온 1952년 즈음에 비봉지가 발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비봉'지 창간호가 어떠했는지, 이후 발행된 회지는 어떤 내용이 있었을지 궁금해지네요...~
속간 기념으로 진주고등학교 사친회회장 김지호와 시민병원 정수돈 원장의 광고가 실려 있습니다.
고마운 분들이었겠죠...~
대학입학시험 예입니다.
주관식이었군요. 문제가 그리 고난이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국대(國大)는 어디를 말할까요?
국공립이다 보니 선생님들이 많이 오고 가시는군요.
하단에..교련관련 선생님들이 세분이나 된다는 거....~
당시 진주고의 대학진학율을 보여줍니다.
서울대에 자그마치 43명이나 합격하는군요....음...
교사(校舍)도 제대로 없던 터에....뙤약볕아래 열심히 공부했을 모습이 연상됩니다.~
저시절 명문이라고 할만합니다.
경남 부산 전역에서 몰려들었네요....~
진주 중학교 360여명에서 겨우 160여명 합격할 정도라....
1953년 입학한 이분들은 대체로 1936년생 쯤 되려나. 지금 나이로 80세가 되겠네요....
6.25 전쟁 당시 진주는 인민군이 진주하게 되고,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말그대로 완파당합니다.
진주 시청과 남강교, 촉석루, 진주고, 진주여고 등 제법 건물다운 건물들은 모두가 잿더미가 되죠.
진주고는 ECA(이시에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대외원조기구. 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의 도움으로 조금씩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 진주의 상황을 더 읽으시려면...
한국전쟁 과정에서 진주의 시가지는 폐허로 변했다.
인민군이 진주에 들어온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진주시에 대한 대대적 폭격이 있었다.
B-29편대가 남쪽으로부터 날아와 네이팜탄과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하였고,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진주는 인민군 주둔지역이 아니라 함안의 전투지역으로 가는 통과지역이었지만,
전략요충지로서 많은 물자들을 인민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이 폭격으로 시 외곽을 제외한 시가지 전역이 불탔다.
진주시 주민들은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인근 진양군 등지로 피난하여 인명 손실은 적었지만,
그래도 새벽에 폭격을 한 경우도 있어서 수십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시청을 비롯하여 진주고 및 진주여고 등 지역의 큰 건물은 모두 미군 폭격기의 폭격을 맞아 무너졌다.
당시 영남의 제일가는 누각으로서 국보 제278호였던 촉석루가 소실되었고, 남강교도 폭파되었다.
남강교는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군 측에서 폭파했던 것이고,
촉석루는 북한군 지휘소가 설치되어 있어 9월 1일에 미군기가 소이탄을 투하하여 소각했던 것이다.
폭격된 남강교는 대동공업의 직원을 동원하여 가교를 설치하여 임시통행조치를 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주경찰서도 폭파되어서 진주경찰서 부대는 전 김준기병원을 임시청사로 사용했다.
진주시는 1950년 9월경 수복되었으나 몇 년 동안 전쟁의 잿더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전쟁과 진주 [韓國戰爭과 晋州]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첫댓글 모교...인가요? ㅎ
^^뭐...^^......전통이 오래된 학교라는 뜻은 이런 스토리가 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