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부터 1932년 10월까지 공주에 충남 도청이 입지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많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충남도청이 대전에 있으나, 그 이전에는 조선왕조 시기 충청감영이 위치해 있던 지금의 공주 사대부고 자리에 있었습니다.
조선왕조 시기 공주에 있었던 충청감영은 1896년 13도제가 실시될때 충남 도청(관찰부)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경부 호남철도가 부설되고, 철도역이 입지한 천안, 조치원, 대전, 논산 등의 뜨는 해들의 도시개발이 급진전되면서 공주는 그야말로 지는 달이 되고 말았습니다.
허나 부자 삼년간다는 말이 있듯이 백제왕도이자 감영도시였던 공주의 도시세가 하루 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1920년대 중반까지 공주는 충남지역에서 가장 인구(재산가와 유력자 포함)를 많이 보유한 도시였습니다.
공주와 대전의 도시세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 무렵이었습니다. 이처럼 전세가 역전되면서 서서히 충남도청 이전 문제가 가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대전 거주 일본인들의 강력한 도청 유치운동도 총독부가 도청 이전을 결정한 중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충남 도청 이전 소문은 강제합병 초기부터 있었습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철도역 근처로 전국의 모든 도청을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재조선 일본인 거류민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별로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충남 도청 이전과 관련한 총독부의 움직임이 공주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포착되기 시작한 것은 1929년 초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소문이 돌자 공주사람들은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총독부측은 그때까지 오리발만 내밀었습니다.
물론 고급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이들, 특히 몇몇 일본인 유력자와 공주 갑부 김갑순 등은 도청 이전 예정지 부근의 땅들을 매점하는 등 개발이익을 선점하기 위한 발빠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충남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할 때 대전 중심부의 노른자위 땅은 대부분 김갑순과 3명의 일본인 지주(회사)들이 독점한 상태였습니다.
충남 도청 이전을 저지하기 위한 공주사람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시작된 것은 1930년말부터입니다. 그런데 반대운동의 중심은 조선인들이 아니라 대부분 공주 거주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얼마전 일제시기 도청이전 반대운동에 앞장선 宮本善吉씨의 아드님(日本 公州會 임원)이 공주향토문화연구회의 초청으로 공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공주 거주 일본인 유력자들은 자신들의 연줄망(학연과 지연)을 무기로 진정투쟁을 전개하여 참의원에서 총독부의 결정을 뒤집는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때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공주시민회는 조선인 일본인 유지 동수로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귀족원에서 곧바로 뒤집어졌습니다.
충남 도청의 대전 이전이 기정사실화되자 1931년 3월경 공주유지들은 돌연히 '이전 지지'를 선언하고 그때부터 도청이전의 댓가를 구걸하는 이른바 보상물 요구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래의 기사들을 찬찬히 읽어 보시면 공주사람들이 도청 이전을 반대하기 위해 어떠한 투쟁을 벌였는가를 자세히 아실수 있을 겁니다.
첫댓글 소중한 옛 자료이군요. 신문의 일자가 소화 몇년...이라고 표시된게 묘한 감정을 일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