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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4제23회신곡문학상대상/문학강연/나의 인생 나의 문학
현상(現象)의 수필, 형상(形象)의 수필
- 나의 인생 나의 문학 -
최원현
1. 나의 삶, 문학, 수필
‘삶’이라고 컴퓨터의 자판을 빨리 누르다 보면 자꾸‘사람’으로 찍혀지곤 한다. 그러는 것에 짜증이 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삶’에 대한 답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삶=사람’이라는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처럼 삶의 모습은 곧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사람을 보면 그의 삶이 보이고, 삶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이는 것 아니던가. 문여기인(文如其人)‘글(수필)이 곧 사람’이라는 뷔퐁의 말에 이를 대입하면‘삶=사람=글(수필)’이 된다.
그렇다면 나 그리고 나의 삶과 문학은 어떤가.
문학이란‘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작품’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 내게 문학은 갖지(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들이 표현되거나 그것들을 채우고자 하는 바람이거나 그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돌 달에 아버지를, 세 살 때 어머니를 잃어버렸다.‘잃어버렸다’는 것 또한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내게서 없어지거나 떠나버렸다는 것이니 곧 상실의 아픔이요 안타까움이다.
아프다는 것은 병이 들었다는 것이니 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병은 치료가 다 되어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은 치료가 안 되는 것 같다. 옅어지거나 희미해지지 않는 특성까지 있다. 해서인지 나의 이러한 상실병도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깊어지고 짙어지고 강해져서 깊은 흉터의 상처가 되었고 그것은 살아가는 동안 시도 때도 없이 가슴 속에서 통증을 유발하곤 했다. 그런데 그 통증이 나로 하여금 문학을 찾게 했다. 처음엔 시였다가 나중엔 수필이 되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니 해야 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건사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생기자 아내도, 자식이 생기자 자식까지 건사할 범위도 넓어졌다. 힘에 겨웠지만 힘겹다고 말할 곳도 상대도 없이 먹고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했다. 그런데 사람이 먹고사는 것에만 매어 산다면 사는 의미가 무엇인가 회의가 왔다. 해서 잠시 신에 대한 학문도 공부해 봤다. 그러나 그런 과정도 가슴의 통증을 무마하거나 차가운 가슴이 따뜻해지게는 못 했다. 거기다가 무언지도 모르는 내 안의 답답한 것들을 어떻게든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의무처럼 일어났다. 그래야만 나도 조금은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나를 묶고 있는 것들에서의 벗어남과 내가 지고 있는 짐의 무게도 조금은 줄어들 것 같았다.
그러한 때에 신문에 난 광고가 눈에 띄었다. 문예진흥원에서 덕수궁 석조전에 문화예술강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반가웠다. 혹 그것이 나를 조금이라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음이 변할까 봐 바로 신청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시와 수필강의가 있다 했다. 시는 성춘복 시인이, 수필은 경희대 서정범 교수님이 강의를 했다. 난 시(詩)에 더 마음을 두고 첫 강의를 들었지만 수필 강의 첫 시간에 서교수님이 글을 한 편씩 써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나는 <봉숭아>란 글 한 편을 써서 제출했다. 그런데 다음 시간 서 교수님께서 그 글을 다시 주시며 다른 사람들도 듣게 읽어보라 하셨다. 그러더니 <봉숭아>란 제목을 <발뒤꿈치>로 바꾸고《한국수필》이란 잡지에 초회 추천작으로 하겠다고 했다. 난 그렇게 1987년《한국수필》에 초회 추천을 받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조경희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책방 나들이>란 수필로 추천 완료를 받으면서 시인이 아니라 수필가가 되어버렸다. 난 그로부터 30년 넘게 수필을 쓰고 있다. 내 이름으로 낸 책만도 이십여 권이다. 그 속에 나의 삶과 문학이 들어있다. 결국 내 수필은 내 삶이었다. 내 삶은 곧 수필이었다.
2. 내 수필의 주제들
내 수필들은 내 안에서 흘러넘친 정서와 감성의 산물이다. 깊은 곳에서 퍼 올린 샘물이라기보다는 흘러넘친 물이었다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해서 깊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물맛이 다른 건 아니다. 깊이에서 길어 올린 시원함은 덜할 수 있지만 오히려 더 나다운 맛이 느껴지는 샘물일 수 있다. 그런 내 글들을 깊은 애정으로 보아주신 여러 평론가들은 그것을 그리움, 기독교적인 사랑, 추억의 냄새, 소리, 숨결, 소외되기 쉬운 것에 대한 애정들로 예쁘게 보아주셨다. 거기다 내 글들에서 낯익은 어머니 할머니 이모 등이 내 수필의 주제를 그리움으로 몰아간 것으로 보아주셨다. 해서 내 생각보다는 그분들이 보아준 내 수필의 주제들, 그 일부를 소개함으로 내 수필의 주제를 살펴본다.
최원현의 수필 세계를 집약해 말하면 우리 일상에서 체득한 이야기들을 작가의 세심한 시각에서 세련된 미학적 문장으로 재현하는데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의 수필들은 두루 균형 있는 무게의 주제성을 간직하면서 넓은 독자의 공감대를 자극할 수 있는 진지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윤병로 <일상에서 체득한 세련된 미적 문장> 중
솔바람 나는 지난날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지내고 보면 모든 게 아쉬운 것처럼 그는 지난날의 달빛 어린 추억을 기독교 정신의 사랑 속에 승화시켜 능란한 문장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조용히 얹어놓은 데 있다. 그의 정신은 아직도 서구 정신에 물들어 있지 않은 우리의 정서에도 잘 맞지 않나 생각된다.
정주환 <평범한 삶 속 이상성의 수용> 중
최원현의 수필 세계는 기독교 신앙인의 따스한 인정주의가 촘촘하게 스며있는 보통사람들의 보통적인 가치관으로 삶을 보듬어내는 서정성에 기초하고 있다. 수필집 전체를 관류하는 신앙적인 고백과 이에 뒤얽힌 현실적인 삶의 미묘한 갈등과 참사람 됨을 향한 향기 만들기 작업이 그의 창작 정신이다.
임헌영 <중후한 정통 수필 문학으로의 회귀> 중
수필가 최원현의 수필에 다가가면 그가 창조한 추억의 공간 속에 켜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게 된다. 그리움과 사랑과 고독의 불꽃, 그리고 거기서 풍겨 나오는 향훈을 호흡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창조한 진실한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목소리이고 영혼 깊은 곳으로 저며 오는 그리움의 숨소리이다. 동시에 오랜 기다림과 외로움 속에서 잊지 못하는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바람 소리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환상에 빠져들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서익환 <추억의 공간 속에 켜진 불꽃, 그 향훈> 중
수필작가 최원현은 자신의 수필을 그리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 그리움은 시간상에서 주로 과거에 의지하며 그 대상이 여럿일 수 있으나 그의 수필 속에서는 추억의 냄새, 소리, 숨결로 형상화되고 있다. 구체적 상관물은 화자로 하여금 추억을 반추하게 하는 매체이지만, 주로 어머니로 나타나고 있다.
한상렬 <수필문학을 위한 참회록> 중
최원현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에 대한 작가 나름의 배려로, 소외되기 쉬운 것에 대한 애정이며 작가의 따뜻한 마음 나눔을 엿보게 한다. 윤재천 <작품 속에 서린 내면의 향기> 중
그의 그리움은 할머니, 향수, 어머니로 점철되고 있다. 그중 평자로서 본 그의 ‘그리움’은 어머니에게 향한 마음이 가장 절실하게 배어 나온다. 침묵 속에 말이 있고 말 속에 침묵이 존재한다고 하듯, 어머니를 향한 그의 그리움은 언어로 자주 표상하지 않기에 더 진한 그리움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다.
남홍숙 <수필의 무늬로 나타낸 그리움의 이미지> 중
수필이 세상 읽기라고 한다면, 그 읽기 방법은 외골수의 한 방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러 각도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포용력이 필요하다. 세계를 보는 시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상의 양 끝에만 고정되지 않고 무수한 중간 항에까지 미칠 수 있어야 전체를 균형 있게 포착할 수 있다. 이것이 <그냥>이라는 작품의 주제다. 신재기 <수필의 깊이와 넓이> 중
<햇빛 마시기>는 사랑과 체온을‘내 안으로 햇빛 들여보내기다. 바깥세상을 안 세상으로 들여보내기다. 생각의 전환이다. 마실 수 있는 것의 영역 확대다. 새롭게 보기다.’라고 최원현은 정의 내렸다. 자신 안에 자리하고 있던 ‘아름답지 못하거나 바르지 못한 생각과 마음들’이 속으로 들여보내진 햇빛으로 하여 씻기고 닦이고 다듬어지는 소리로 들을 수 있는 순간, 한 편의 수필은 몸에서 모자란 부분인 결핍을 채워 주게 된다.
이명진 <결핍을 채워주는 삶의 활력소>
그가 30년 가까이 걸어온 문학의 정체를 압축한 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움”이다. 그는 그리움이라는 사랑병을 혹독하게 앓았다. 그렇다 하여 수필에 대한 그의 사랑병은 요란스럽거나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냥 “도란도란 들릴락 말락 둘이서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소중하여 가슴과 가슴으로 따스하고 끈끈하게 이어지는 정의 물줄기”(「모습 그대로」에서)가 되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이야기이다. 딱딱한 교훈적 담론보다는 유연한 문체로 이루어지는 스토리텔링조의 수필이 자신의 삶에 맞는 문체임을 자각한 작가가 최원현이다.
박양근 <최원현의 그리움: 그 문학적 화소와 변용의 미학> 중
인간이 기억을 만들듯, 기억은 망각을 만든다. 망각은 기억이라는 글씨를 쓸수 있는 빈 종이이자 쓴 것을 읽을 수 있게 해 주는 빈공간이다. 이 세상에 오직 빛만 있다면, 우리는 어둠의 의미를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망각의 세월 속에서도 기억이 선택되는 것은 그것이 내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최원현의 〈종소리〉에서 이모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기억의 종소리는 우리들이 망각해서는 안 될 삶을 위한 깊은 사랑의 충고이며 안내자의 목소리이다. 허상문 <레테의 강을 바라보며-기억과 망각의 글쓰기> 중
최원현의〈종소리〉는 요즘은 듣기 어려운 ‘종소리’를 통해서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내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끈”인 이모의 죽음을 모티브로 해서 쓴 수필이다. 이모의 죽음을 종소리의 여운으로 살린 수필이다. 그러나 ‘종소리’는 이모뿐만 아니라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혈육까지 연결 시켜 주는 매개체이다. 유한근 <비평 망에 걸리는 수필은> 중
나는 하찮아 보이는 것들의 소중함, 헌 것이나 낡은 것이 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큰 것보다는 작은 것, 잘 보이는 것보다 가려져 쉽게 보여지지 않는 것들에 더 애정을 갖는다. 또한 자칫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들에 더 신경을 쓰고 눈여겨봐 지지 않을 수 있는 것들에 함께 있음을 인식시켜 주고 싶어 한다. 하니 큰 슬픔보다 작은 감동거리에 곧잘 눈물을 흘리고 마는 나는 소외된 것, 무시된 것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길 바란다. 그것들이 마치 옛날의 나였고 지금의 나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수필쓰기에선 가버린 것, 잃어버린 것들에 더 마음을 주게 되는 것 같다.
3. 내가 쓰고 싶은 수필
나의 수필은 어떤 글쓰기인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쓰는가.
사르트르는 시는 춤이요, 산문은 걸음걸이라면서 문학은 인간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참여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수필도 참여문학이 가능할까. 우린 수필을 자신도 잘 감당 못 하면서 감성이나 자극하는 서정적인 글 정도로만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름다운 언어로 꾸며진 문장만으로도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정작 좋은 글,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일까.
한때는 시의 시대였다. 그러다가 소설의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21세기는 수필의 시대라고 말한다. 한데 대형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 수필 코너를 보면 수필가들의 수필집은 없고, 연애인, 시인, 여행가, 방송작가 등의 책들이다.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수필에 대한 정의와 일반 대중 및 독자가 받아들이고 있는 수필에는 온도 차이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느 것이 잘못된 것인가. 수필을 쓴다는 우리인가, 아니면 독자인가. 만일 독자가 잘못 알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며 또 어떻게 그들의 인식을 바꿀 것인가. 만일 우리가 수필의 사전적 정의에만 억눌려 독자의 성향이나 요구를 무시한 글을 쓰고 있다면 어찌하여야 하는가.
언젠가 차마고도 소금 계곡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다랑논처럼 양쪽 계곡에 빼곡한 염전들에서 소금이 익어가고 있었다. 소금 우물에서 길어온 소금물을 소금밭에 부어 햇볕에 증발시키는 과정들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거기서 피어나던 소금꽃, 소금물에서 수분을 다 빼내니 생겨난 하얀 소금의 결정(結晶)들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우리나라 서해안 염전에 간 적이 있다. 염전 가득 채워진 바닷물이 햇볕에 증발하여 생기던 하얀 결정체, 햇살이 좋고 바람도 좋아야 최고의 소금이 생산된다. 햇살에 빛나던 소금들, 그 소금은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게 피어난 꽃이었다.
그때 내 수필이 그런 소금 꽃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것도, 소망한다고 이뤄지는 것도 아닌 것이 수필 쓰기가 아닐까 싶다. 적당한 햇볕과 바람은 하늘이 도와줘야 하는 것이요 거기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정성의 갈무리가 있어야만 한다. 삶이라는 바닷물이 염전으로 갇히고 거기 햇볕과 바람이 시간을 더하면 다 소금이 되는 것 같지만 그게 어찌 쉽겠는가. 물을 물 한 방울 없게 하는 작업의 결실 아닌가. 윤오영 선생은 이런 소금 꽃과 같은 걸로 곶감에서 피어나는 시설(柹雪)을 들었다. 결국 소금 꽃이나 시설(柹雪) 같은 품(品)과 격(格)이 독자 편에서 보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것이요, 먹어보면 기대 이상의 맛도 있는 그런 수필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 이때의 맛은 재미일까, 의미일까. 어떻든 그런 해학미, 의미의 형상화, 좋은 구성, 그래서 읽으면 공감대가 이뤄지고 나아가 감동 내지 감격까지 할 수 있는 그런 감칠맛 나는 수필을 독자는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쓰고 싶은 수필보다 독자가 좋아할 만한 수필에 의도적으로 무게 중심을 가져갈 수도 있다. 한데 여기서 또 하나의 갈등이 생긴다. 내가 쓰고 싶어 쓴 글에 독자가 공감하는 것이 옳은가, 독자의 취향에 맞춘 글쓰기로 좋아하는 독자의 모습에 내가 만족해야 하는가.
작가라면 누구나 많은 독자의 사랑과 칭찬을 받기 원한다. ‘만일 누군가 여러분이 쓴 글이나 책을 집어 들고 처음 한두 문장 정도만 쓱 읽어보고는 “ 그래서 뭐?” 라고 하면서 더 이상 읽으려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다.’ 작가에게 이러한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 아닌가. 그래서 독자에게 사랑받는 글쓰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뿐인가. 시대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미국 시애틀의 아마존 본사 매장인 ‘아마존 고’에서는 물건을 마음대로 골라 갖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데 계산이 자동으로 되기 때문이란다. QR(Quick Response.빠른 응답)코드가 그걸 다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줄을 서서 기다리며 계산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간단히 앱 하나 설치로 대신케 한 것인데 소비자의 수요를 충족시켜 주려는 이런 부단한 노력이 작가에게도 먼 이야기가 아닐 것 같다. 독자도 작가에게 QR코드를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시대에 맞는 글을 써야 하는가.
얼마 전 조간신문에서 소설가 권지예가 쓴 칼럼을 읽었다. 지방 문학 행사의 강연 후인데 작업복 차림의 나이 지긋한 농부가 자기도 책을 사서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시골서점에선 책을 구할 수 없었다며 몹시 아쉬워하더란다. 해서 주소를 물은 후 사인한 소설책 두 권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농부가 감사의 답례로 꽃 농장에서 직접 키운 색색가지 ’비단꽃향무‘ 여섯 단을 택배로 보내왔고 그 후로도 꽃 선물을 풍성하게 보내주었다고 했다. 해서 그 꽃들을 어머니와 지인들에게도 나눠주었는데 꽃을 받은 사람들이 행복해하며 보내온 카톡을 그 농부에게 보내주었더니 “농사일이 하루하루 너무 힘들지만, 제가 키운 꽃들이 어떤 주인을 만나 행복할까 늘 상상해요.” 하는 답글이 왔다고 했다. 그 답글에 권지예는 감전이 되었다고 했다. 자기가 키운 꽃이 어떤 주인을 만나 행복할까 늘 상상하는 그 농부의 마음 그게 작가의 마음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런 화훼 농부의 마음으로 작가도 글을 쓴다. 염전에서 좋은 소금을 만들려는 것이나 곶감이 잘 되어 시설(柹雪)이 앉는 것이나 향기 좋고 아름다운 꽃에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고 글을 쓰는 것이 작가다. 나 또한 그런 소금 꽃 같은 수필, 곶감에 앉은 시설(柹雪) 같은 수필을 쓰고 싶은 것이다.
4. 수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좋은 수필을 읽어보면 특징이 바로 잡힌다. 바로 첫 문장이다. 첫 문장은 다음 문장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끝까지 읽을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단초가 된다. 첫 문장은 첫 만남의 첫인상과도 같다. 그런데 그 첫 만남의 첫인상이 좋으면 관계가 잘 이뤄지는 것처럼 수필도 첫 문장이 좋으면 좋은 수필일 때가 많다. 어렵게 쓰고 쉽게 읽혀야 한다고 하지만 거의 모든 글은 독자에겐 여기의 문학이지만 작가에겐 생존의 문학이다. 특히 수필은 문학정신이 약한 문학이란 말을 듣고 있기에 더더욱 문학의 효용성을 보여주고 수필의 진가를 높게 인식시켜줘야 할 책임과 사명이 수필가에게 있다 하겠다.
수필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수필은 재미가 없다, 자기 독백 고백 같은 글이어서 공감(메아리)이 안 간다, 서사(스토리)와 묘사가 약해서라고 한다. 사실 누구나 아는, 누구나 겪는, 아무 때나 보는 것이라면 그건 일상 중 한 부분을 문자화한 것일 뿐 문학이랄 수 없다. 소소한 일상이라도 그걸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어떤 힘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문학이 된다. 곧 문학적 아름다움인데 이 아름다움은 일상적인 중에도 특별히 달리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 뭔가 다른 맛과 멋이 보이거나 느껴지는 미학이다. 그런 미학이 추구된 것, 그런 미학이 담긴 때 문학이랄 수 있다.
특히 수필은 자기 체험이라는 사실(fact)에 그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truth) 곧 사실 속 의미화 형상화를 통해 새롭게 보여진다. 문학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와 다른 것도 일상의 언어가 주는 단순한 전달력에 상상력을 품게 하는 창작력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상력 창작력의 전달이 공감과 감동으로 문학에 이르게 한다.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긴 하지만 아무나 쓰는 글은 결코 아니다. 또한 수필의 글감은 모든 것이 다 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다 글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재로서의 선택과 의미화와 함축이 필요하다. 따라서 누구나 수필을 쓸 수는 있지만 수필을 쓴다고 다 수필가는 아니다.
말린 음식의 맛은 햇볕의 맛이다. 예를 들어 햇볕에 말린 표고버섯은 비타민 D가 생표고버섯의 열 배라고 한다. 무말랭이에는 비타민 B1과 B2, 철분도 듬뿍 들어있다. 감칠맛이 응축된 말린 음식은 그 자체로 육수를 낸다. 말린 음식이 조림에 더해지는 것만으로도 훨씬 맛이 깊어지는 건 그런 이유다. (히라마쓰 요코의《어른의 맛》중에서)
말리는 것은 가공이라기보단 가치의 부여 곧 품격의 승화 작업이다. 히라마쓰 요코는 그걸 햇볕의 맛이라고 했다. 어른의 맛이라고 했다. 현상을 형상화하는 그런 맛을 내기 위해 나는 수필의 첫 문장 얘기를 먼저 하고 싶다.
* 수필의 첫 문장
많은 수필을 읽으면서 수필의 첫 문장에서 받은 느낌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첫 문장은 그 글의 얼굴이요 주제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첫 만남의 첫인상처럼 문장을 읽고 싶게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끼요 광고다. 이문재 시인은 ’첫 문장에 목숨을 걸어라’라고 할 정도로 첫 문장의 중요성을 말했고,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꽃이 피었다’로 할 것인지 ‘꽃은 피었다’로 할 것인지 오랫동안 고심하다 ‘꽃이 피었다’로 했다고 한다. 첫 문장의 ‘은’과 ‘이’가 주는 방향성, 목적성이 그만큼 중요하고 컸던 것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첫 문장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된다. 이 첫 문장에서 우린 ‘실종 일주일인데 그러면 엄마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그렇게 됐을까.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다음을 읽지 않고는 궁금해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힘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소설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스토리에 약하다는 수필에선 첫 문장의 힘이 더 크게 나타난다.
내가 좋아하는 최민자의 수필 문장은 함축미가 넘친다. 문장 하나 하나가 살아서 이야기를 해대는 걸 보게 된다.
주머니 속에 무언가가 데굴거린다. 모서리가 닳은 조각달 모양의 씨앗들, 지난가을 훑어 둔 나팔 꽃씨다.
최민자의 <꽃씨>중
길은 애초 바다에서 태어났다. 뭇 생명의 발원지가 바다이듯, 길도 오래전 바다에서 올라왔다.
최민자의 <길> 중
그는 마법사다. 빈손으로 암벽을 타고 맨발로 하늘을 걷는다. 최민자의 <거미> 중
물론 작가마다 성향이 다르기에 어느 것이 더 좋다라고 말하긴 곤란하지만 내가 최민자의 수필들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장 때문이다. 신선하고 참신하고 이야기가 막 흘러나올 것 같은 문장, 그게 첫 문장일 땐 다음을 읽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첫 문장에 많은 것을 건다. 쉬운 문장, 편한 문장이면서도 펼쳐질 이야기를 암시하고 무언가가 있을 것을 보여주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이번 수상 작품집이 된《누름돌》의 표제작인 <누름돌>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앞서 세상을 사신 분들의 삶이 결코 나만 못한 분이 없다는 생각이다. (<누름돌> 2012.10월호 수필과 비평)
제목이 누름돌인데 나이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이와 누름돌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짐짓 궁금해지게 한다. 그런데 같은 제목이지만 다른 작가의 다른 글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대로 아담하고 반질반질한 항아리 속에서 노란빛이 어린 오이지를 꺼냈다.
(<누름돌>. 정성려 2018.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여기서 첫 문장에 따라 제목은 같더라도 그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또 어떤 내용으로 전개될지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요즈음 아이들 눈으로 세상 보는 연습을 한다. 손주 녀석의 눈높이에 맞춰줘야만 그들이 좋아해 주기 때문이다. 최원현의 <먼저 좋아> 2011
“아니 이 밤 중에 웬일이냐?“ ”그냥요“ ‘그냥?” 내 대답이 신통찮았는지 장인어른께서 반문을 하신다.
최원현의 <그냥> 2001
천리향도 떠나보냈다. 다행히 꽃을 좋아하는 문우에게로 갔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최원현의 <어떤 이별> 2013
할머니는 늘 왼손을 허리 뒷춤에 댄 체 오른손만 저으며 걷곤 하셨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최원현의 <고자바리> 중 2016
첫 문장만 아니고 두 번째 문장까지를 제시한 것은 첫 문장이 다음 문장을 어떻게 끌어오는지도 보여주고자 함이다. 어떻든 첫 문장에서 1차적 승부를 걸어야 한다. 수필에서의 첫 문장은 독자를 내 독자로 만들기 위한 최대의 작전 개시요, 마지막 문장은 공감의 확보 및 여운을 남김으로 완전히 내 독자로 만들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하니 그 시작인 좋은 첫 문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문장에 맞는 글의 맥락과 마무리를 위한 수많은 퇴고가 좋은 수필을 만드는 것 아닌가. 미국 해변문학제에 강사로 함께 했던 문정희 시인이 시 한 편을 100번 이상 퇴고한다고 해서 놀랐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수필 한 편을 몇 번이나 퇴고한 후 독자 앞에 내보이고 있는가.
5. 현상(現象)의 수필, 형상(形象)의 수필
내게는 감성은 있지만 비평적 눈은 약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수필비평은 나같이 수필을 쓰는 수필가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은 비평적 눈만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다. 자칫 수필평은 인간 비평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수필의 분위기를 알고 비평에 임해야 수필 속에 들어있는 작가를 볼 수 있다. 수필비평은 작품 속 작가의 생존 환경과 인성까지 건드릴 수 있다. 따라서 수필의 내적요소들과 분위기를 정확히 알고 수필 평을 할 수 있는 수필가인 평론가가 보다 많이 나와야 수필도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비평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수필가의 자세가 필요하다. 비평가는 최상의 고급독자다. 특히 내 글의 최고독자이다. 그 최고독자가 애정을 갖고 해주는 말을 안 듣는다면 어찌 될 것인가. 99명이 다 좋다 했지만 1명이 그렇지 않았다면 그 1명의 의견을 더 정확히 청취하고 그 부분까지도 소중히 수용해야 한다. 그 1%의 부족함이 때론 그 작품의 성패를 가르는 임계점이 될 수 있는 분명한 모자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現象)에 만족할 때가 많다. 만족한다기보다 그 다음 단계로 가는 노력을 멈출 때가 많다. 수필은 현상보다 그다음 단계인 현상의 형상화를 통해 주제를 의미화하는 그려 내기와 말하기가 되어야 한다. 설명이 아니라 묘사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보여줌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수필가는 귀로도 듣는 것만이 아니라 볼 수도 있어야 하고, 눈으로도 보는 것만이 아니라 들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의 눈, 마음의 귀가 수필가에게 특히 필요하다. 느낀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듣는 것까지를 말한다. 수필의 문학성은 내가 겪은 현상을 보이는 대로만이 아니라 더 깊고 정밀하게 형상화함으로 의미를 분명히 추구한다. 현상(現象)의 수필이 아니라 형상(形象)의 수필일 때 문학성이 확보되고 독자도 공감해 온다.
앞에서 얘기했던 나의 삶이나 내 수필의 주제들이나 첫 문장의 중요성들도 바로 이런 현상의 수필이 아닌 형상의 수필이 되어야 한다는 소망이고 나도 그리되도록 애쓰고 있다는 고백이다.
문학에 지름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3다(多)가 답이다. 많이 읽고(多讀) 많이 생각하고(多商量) 많이 쓰는 것(多作) 말고는 없다. 특히 수필은 자전성(自傳性)이 강하기에 독자가 있어 줄 때 비로소 문학이다. 시나 소설은 쓰인 그 자체만으로도 문학이랄 수 있다. 그러나 수필은 독자가 있어야 문학이다. 자칫 일기처럼 혼자 보는 글이거나 자기 독백처럼 되어버리면 안 된다. 최소한 누군가가 읽어주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일 때 문학으로의 수필이랄 수 있다.
문학의 3요소인 작품성과 재미와 감동을 갖추는데도 3다(多) 이상 없다. 한국인을 빨리빨리 민족이라고 하지만 삶도 문학도 결코 요즘 가상화폐의 일확천금 같은 ’잭팟(jackpot·대박.거액의 상금)은 있을 수 없다. 꾸준히 열심히 성실하게 내 문학을 위한 사랑과 노력을 쌓아갈 때 시나브로 문학도 독자의 사랑권에 들어갈 수 있고 내 문학의 자존감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서 하나 권한다면 유협(劉勰)이 지은《문심조룡(文心雕龍)》을 권하고 싶다. 수필가라면 꼭 읽어주었으면 싶다. 그리하여 어떻게 쓰고 또 쓰는 것만이 아닌 비평의 글쓰기도 가능하게 창작과 비평의 눈을 동시에 겸비한 수필가들이 되어서 현상을 넘은 형상의 수필 쓰기로 우리 수필의 수준을 함께 높였으면 싶다.
최원현 nulsaem@hanmail.net
1951년 전남 나주 출생.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한국문인협회·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조연현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누름돌》등 16권, 문학평론집《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 중학교《국어1》《도덕2》등에 수필 작품이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등에 수필 이론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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