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벽 선사께서 주신 말씀
홀연히 죽음이 닥치면 너는 무엇으로 맞서고자 하느냐. 평상시에 공부로써 힘을 얻어 놓아야 급할 때 노고勞苦를 덜 수 있다. 목마르기를 기다려 샘을 파는 따위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라. 죽음이 박두하여서는 이미 손발이 미칠 수 없으니 앞길이 막막하여 어지럽기만 할 것이다. 가히 딱하고 딱한 일 아니냐.
황벽 선사께서 남기신 말씀이다. 황벽희운黃檗希運 또는 단제선사斷際禪師로 불리기도 한다. 서기850년 환갑쯤에 입적하기까지 많은 제자양성과 불도 포교에 현저한 업적을 남긴 선사로 유명하다. 당시 당 나라의 선사로 알려진 임제(?~867)는 황벽선사의 제자로 중국 임제종의 개조開祖이기도 하다.
마음, 정신, 고뇌, 방황 그리고 죽음. 우리는 거리낌 없이 내뱉는 단어들이다. 마음과 정신은 육체나 물질과는 상대적인 말이다. 마음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으로 구별하고 절대적 가치는 인욕보다 천리에 있다고 푼다. 인과론에서의 고뇌는 즐거움의 찌꺼기이며 죽음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이러한 이치를 익히고 나면 방황할 일이 없다.
어찌 아차 하는 사이 영국의 문호 조지 버나드 쇼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며 묘비를 미리 써 두어야 할지 모른다. 우선 마음을 알려면 영혼靈魂에 대한 심오한 고찰이 필요하다. 마음과 영혼은 최소공배수와 최대공약수가 같다. 차이가 있다면 마음은 영혼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움직이는 유기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영혼이 유아독존 하는 것도 아니다. 영혼 또한 마음이라는 유기체가 흐르도록 도랑을 제공한다. 영혼이라는 계곡에 마음이라는 물이 흐른다.
마음과 영혼이 육신과 동거할 동안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정신영역에서 움직인다. 정신영역을 초월하거나 못 미치면 귀신이 된다. 마음이 각覺을 생生하여 영혼에 시동을 걸면 영혼은 마음과 혼연일체가 되어 뇌腦라고 하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세계로 전이轉移된다, 때로는 선천적 본능에 의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지휘를 받는다. 마음이야말로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잠재의식과 결부된다.
생각은 마음에 기인하고 마음은 영혼에 기인한다. 그렇듯 생각과 마음과 영혼은 순간순간 역할과 처지가 변화무쌍하기에 무명無明에 사로잡힌 우리는 마음이 무엇인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영혼과 마음 사이에 무의식이라는 완충지대가 존재한다. 학자에 따라 반사 신경과 무의식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엄밀히 무의식은 잠재의식이다. 잠재의식은 공간이 무한하여 의식으로는 그 영역을 짐작하지 못한다. 수련은 잠재의식에 내재된 영혼을 의식세계로 이송하는 작업이다.
마음을 앞세운다 해도 잠재의식과의 접촉을 위해서는 일정한 수련이 필요하다. 잠재의식이 앞장서면 영혼과 대면하기는 그다지 힘들지 않다. 그래서 무명을 밝혀 지혜를 갖추라고 황벽선사는 권유하는 것이다. 무명은 전문용어라서 이해가 쉽지 않다. 밝음이 없다 또는 어둡다는 차원이 아니라 명明은 곧 지혜智慧이니 무명은 지혜의 부재다. 비슷한 생리현상 으로 인슐린과 포도당의 관계를 알면 이해가 쉽다. 그 결과 미토콘드리아에서 출현되는 에너지가 각覺에 해당된다.
평소 남이 쓴 기특한 글귀나 한배 잔뜩 외우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산수山水를 배경삼아 시상詩想을 떠올려 시나 읊조리는 것 또한 공부가 아니다. 문자 나부랭이에 취미를 붙여 글쓰기를 즐거움으로 삼지 마라. 오락 잡기나 익히면서 세속인과 더불어 미워하고 시기하는데 빠져 평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얼마나 딱한 노릇이겠느냐.
권하노니 건강할 때 부지런히 정진하라. 늙기를 기다려 무슨 즐거움이 더 있을까 보냐. 젊은 시절은 오래 머물지 않아 달리는 천리마와 같다. 사람의 목숨은 무상하여 산 위에서 내리붓는 물보다도 빨리 마감하나니. 정신이 초롱초롱할 때 이 일을 분명히 판단해 두라. 이 일은 풀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데도 대장부가 어찌 그리도 비굴하고 패기가 없느냐.
모름지기 밤이나, 낮이나, 가나, 서나, 앉으나, 누우나 끊임없이 맹렬히 정신을 차려 지켜갈 일이로다. 옷 칠을 한 듯 캄캄한 통나무 속에 갇힌 마음의 무명을 철저히 사라지게 하라. 그러지 않으면 임종을 당하여 정녕 고뇌하고 방황하고 어지러울 것이다. 만사는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지만 마음에 맛이 있는 것도, 향이 있는 것도, 당연히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생명을 얻었으면 버릴 준비를 하라.
시 짓기를 오락잡기로 보았으니 헛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수행뿐이다. 황벽선사의 가르침은 무릎을 꿇고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구걸행각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목숨 걸고 따져보는 참선을 말한다. 그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격려까지 하신다. 선사禪師들은 이러한 과정을 수행이라는 한 마디로 일축한다.
이리하여 날이 가고 해가 가서 공부가 경지를 이루도록 하라. 그리하여 홀연히 마음 빛이 밝아지면 진리의 깃털을 깨달으리라. 어느 날 깨달음이 빛을 발하면 무명이 사라져서 스스로 환희로운 경지를 체험하게 되리라. 알고 보면 달마가 서쪽에서 왔다는 것도, 세존이 지은 염화미소도 바람 없는데 파도를 일으킨 한바탕 허물이니라.
불교 수행은 간경 수행, 주력 수행, 참선 수행, 염불 수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참선을 으뜸으로 삼는 것이 선종이다. 선의 수행을 위해서는 목숨을 돌보지 않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일대 용맹심을 일으켜 물에 뛰어들 수 있고 불에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선은 보통 용기로서는 안 된다.
황벽선사의 가르침에서 삶이 확대되어 클로즈업된다. 죽음이 그다지 중대한 단락斷落이 아님을 깨닫는다. 고와 락, 부와 빈, 높고 낮음, 길고 짧음, 있음과 없음, 나아가 삶과 죽음에 대한 긍정적 용맹이 자신감으로 자리 잡는다. 더 살게 해 달라 애원하지 않아도 되는 든든한 버팀목에 기대어 오늘을 살며 내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