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43
총지휘대장 정환직(鄭煥直) 선생 ②
“큰 뜻을 발휘 못하고 벌써 백발이 되느냐. 꿈같은 임진년의 난이 또 생겼다. 일평생에 백성을 돌보는 계책이 헛되이 되고 죽음을 바치고자 한 나라를 위한 수심은 잊을 수 없다. 옛 정자에서 예전 문학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 글에 어찌 좋은 놀음을 생각할 여가가 있으랴. 내가 풍진 속에 골몰하는 것을 만류하지 말라.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고 임금을 구원한 연후에 나도 쉴 때가 있으리라.”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영천·경주 양성을 수복하는 데 큰 전공을 세운 10대조(代祖) 호수 정세아 공(公)이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영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용산동에 정자를 지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인 그 강호정사(江湖精舍)에서 정환직 선생이 친척고구들을 모아놓고 지어 읊은 시(詩)다. 1906년 정월 그믐에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군자금 조달에 착수한다. 황궁의 하사금 5만 냥을 내관 라시환(羅時煥) 편으로 전달받고, 퇴관 동료들의 모금액 2만 냥은 전(前) 참찬 허위(許蔿)로부터 받았다. 흩어진 군인들을 모아 때를 기다리도록 보호하는 한편, 청나라 사람 왕심정(王心正)으로 변장한 밀정 김사옥(金思玉)을 양식 총 5백 정과 기타 군수품을 구입하도록 上海로 파견했다. 4월 초에 정대하(丁大厦)와 이창송(李蒼松)이 상경하여 영남의 거사 경과를 보고하되, 군인 숫자는 천여 명이 되나 무기가 부족하여 당황해 한다고 전한다. 4월 중순에 모집된 군인 100명을 강원도 강릉 금광으로 보내 영남의진을 맞이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그런데 영남에서 5월23일 정용기 대장이 대구감옥에 피체(被逮)되었다는 연락이 오매, 크게 놀라 대구로 향하다가 금릉의 재종제 참판 환덕(煥悳)의 집에서 영천서 올라오는 종제 치훈(致壎)을 만나서 상세한 경위를 듣는다. 도로 상경하여 대구 사건을 판서(判書) 심상훈과 교섭하여 해결되도록 하고 8월초에 대구로 내려오니 이미 석방조치되어 있었다. 영천 고향집에 도착하여 아들 정용기 대장과 여러 장병들을 위로한 후 재거(再擧)할 것을 독촉하여 내년 5월 이전에 강릉에 도달할 것을 약속받았다. 8월 16일 영천을 떠나 영남 각지를 방문하고 9월 9일 서울에 도착하니 종로의 요지마다 일본군 파수대가 배치되고 거리에 노는 아이들은 일본말 배우는 장난질이다. 다음 날 라시환을 불러 황궁 소식을 듣고 영남 상황을 주달(奏達)하다. 동지들과 연락하여 알아보니 적들이 민간에 흩어져 있는 무기까지 탈취하고 상해로 간 왕심정은 행방이 묘연하다. 1907년 4월에 서울에 잠복하고 있는 군인들과 무기를 강릉으로 모두 이송했다. 7월 하순에 이창송 ․ 정완성 등이 상경하여 보고하기를, “우리 산남진이 각 열읍에 분대(分隊)되어 유격전을 벌이는데 그 인원수를 합산하면 수천 명이 되고 활약하는 지역은 경상도 전역이라. 매일 수삼 처 접전을 벌이는데 제일 고통은 무기가 태반 부족하고 약탄이 핍절되어 앞길을 열기 어렵다. 또 적이 유독 강원도 입구를 단속하고 있어 북진이 어려우니 강릉 부대를 경상도로 이동시켜 주소서.” 하고 간청하므로 이창송 등을 강릉으로 먼저 보내 강릉부대를 영남으로 인솔케 하였다. 그리고 서울 내 동지들과 황궁에 상황을 주지(周知)시킨 후, 심복자 수십 인을 대동하고 강릉을 거쳐 동해안으로 잠행하여 청하면 반곡리에 있는 친동생인 환봉(煥鳳)의 집에 도착하여 진중(陣中)을 탐문하고 서울 사람들을 의진에 입진시켰다. 고향집에 당도하여 장병들을 독려하고 기계방면에서 수일간 머무는 사이에 왜적이 검단리 선생의 사택과 민가 여러 채를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고는 우리 의병부대에 쫓겨났다. 운주산 안국사에서 인근지방의 문중대표들과 회합하고 기계 막곡리에 있는 처제 이눙추(李能樞)의 집에서 수일간 머물게 되었는데, 9월1일 새벽 입암전투로 본부 요인들이 대거 순절(殉節)했다는 진중 소식을 보고받아 곧바로 입암에 도착하여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