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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지역 성결구령활동 거점지이며 확산지
김천복음전도관(김천성결교회)
임흥근 목사 / 주의양성결교회
1. 김천복음전도관 설립 배경과 과정
가. 설립 배경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전폭적인 후원과 지원으로 이 땅에 설립되고 정착되며 확산되었다. 김상준과 정빈이 1907년 5월 30일 경성 염동에 첫 복음전도관의 문을 열고 성결구령활동을 시작하였다. 매일 저녁 노방전도를 통하여 진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순복음(사중복음)을 강력하게 전파하였다. 단 두 사람의 활동이었으나 당시 한국기독교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매일 밤 황토현에서의 노방전도는 독특하였고 그 후 저녁 전도집회는 감동과 열정적인 영혼구령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주일 오후(당시 교인들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성령체험을 갈망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실시)에 드려지는 성별회는 성령에 의한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는 특별한 집회의 열기와 규모가 커지면서 신불신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설립당시 한국성결교회는 오직 전도와 성결구령집회를 하였을 뿐인데 비난과 조롱 그리고 수모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당시 일간지인 대한매일신보는 사설을 통하여 한국성결교회를 공개적으로 비난(일본에서 건너왔으며 현재 전개하고 있는 한국기독교계의 학원선교와 의료선교를 매도하는 복음전도관)하였지만 김상준과 정빈은 물론 이 후 합류한 이장하 까지 당시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결집과 의식 강화 그리고 지적 충족을 제공해 주는 공개적인 창구역할을 하던 황성기독교 청년회가 주관하는 전도집회와 복음회 강사로 초청받았다. 강연회 연사는 지명도가 높은 당대 최고의 실력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한국성결교회 초기 전도인들이 이 청년회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 한 단체에 속한 인물들을 종교강연회와 복음사경회 강사로 연하여 청하였다는 것은 이미 성결교회 교역자들의 실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준하였기에 강사 섭외가 가능했고 전도인들은 청년회원들에게 성결을 강하게 외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성결교회는 건전하고 순수한 기독교 복음전도단체이며 영성을 물론 실력 있는 이들에 의해 운용되는 곳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한편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는 일본 동경성서학원은 김상준과 정빈 이후로도 년년히 한국인을 수양생으로 받아 들여 전도인으로 양성하였다. 이렇게 전도인으로 양성하여 졸업을 하면 귀국하여 한국성결운동에 의한 전도활동의 일원으로 활동하도록 지도하였다. 이외 같이 필요한 인적자원인 훈련된 전도인들을 지속적으로 보냄으로 한국성결교회의 확산이 촉진되었다.
동경성서학원 수양생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이들의 이름은 김상준 정빈 이장하 박기반 최홍은 강태온 김석준 김두엽 안동원 이명직이다. 그리고 이명헌은 상기인들의 후배로 입학하여 전도인 양성 과정을 2년 마쳤을 때 경성복음전도관이 설립되자 귀국하여 경성성서학원에 편입생으로 1년을 지내고 1912년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경성성서학원은 1911년 3월에 무교동복음전도관에서 개원하였다. 그리고 입학생을 모집하여 전도인을 양성하던 1912년 죽첨정(현 아현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교사를 이전하였다. 신축 건물로 학원을 이전하고 한 달 만에 제1회로 이명헌이 졸업한 것이다. 당시 경성성서학원 최초 모집생들은 아직 수양생 과정을 밝고 있었다. 그 처음 모집되어 수양생 과정 중에 있던 한 전도인이 박제원이었다.
2. 설립 과정
한국 최초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 총리와 부총리가 김상준과 정빈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경성에 직접 와서 복음전도관으로 사용할 건물을 세내어 줌으로 1907년 5월 30일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복음전도관(예배당)인 진남포와 세 번째인 개성송도 복음전도관도 동양선교회의 후원으로 설립되고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이들이 그곳에 각각 파송 받아 성결구령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1년 동경성서학원과 동일한 방식으로 운용되는 전도인 양성 훈련기관인 경성성서학원이 개원되어 학생들을 모집하고 전도인을 양성하였다. 졸업하면 미신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도록 지역에 파송 하였다. 그리고 재정적인 지원을 함으로 그곳에 복음전도관을 설립하였다.
가. 박제원 수양생(현 신학생)
박제원은 고향 청주에서 상경하여 연동장로교회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노방전도와 성별회를 알게 되어 참석하였다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자 교적을 복음전도관으로 옮기고 1911년 3월에 개원한 경성성서학원에 4월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전도인으로 양성 받고 있던 1912년 7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강경까지, 강경에서 배를 타고 부여 규암에 내려갔다. 그곳에서 열심 전도하던 박제원을 본 김성기 씨가 자신의 집에 있는 사랑방을 제공하여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 부여 규암복음전도관(현 규암성결교회)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방학이 마치자 귀원하여 수양생 과정을 마치고 1913년 10월 12일 킬부르느 감독이 통역 이장하와 김상준 그리고 박제원 전도사를 대동하고 규암에 내려갔다. 이는 규암복음전도관 교역자 파송식과 부임환영예배을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부임교역자가 된 박제원 전도사는 주임 교역자인 김상준 목사를 도와 규암복음전도관이 성결의 정체성을 그대로 전달받으며 구령활동을 통하여 안정적이며 확실하게 지역에 정착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김상준 목사가 떠나자 제2대 담임교역자로 되어 약 1년 동안 부여지역 성결구령운동의 거점지가 되도록 힘썼다. 박 전도사가 규암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정착케 한 후 김천 개척을 명받고 파송 받아 김천복음전도관을 설립하여 활발하게 성결구령활동을 전개함으로 경상도 지역 첫 복음전도관이 되었고 경상도 지역 성결운동의 거점지가 되었다. 박제원 전도사는 김천복음전도관을 개척 설립하였으며 1915년 경주와 1918년 부산과 동래복음전도관을 설립함으로 경상도 지역 성결운동 개척자이며 확산 공로자가 되었다.
나.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약사(이후 약사)
교단에서 김천복음전도관 설립에 관하여 설립된 지 15년 후에 약사를 통하여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 약사는 설립 초기에 관한 소중한 자료이다. 물론 이 자료보다 앞선 년대 기록들이 있으나 설립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사역에 관한 기록들이다. 그러므로 이 약사에 기술된 설립기에 관한 내용은 가치 있는 최초 기록이며 아래와 같다.
1914년 8월에 박제원을 주임으로 김준규를 부임으로 파송하여 개척에 착수하였는데 처음에 초가 4간을 사서 8월부터 예배를 시작하니 그때에 경성으로부터 이주하는 교우 두 가정이 있었고 또 구도자와 합하여 7,8인이 예배에 출석되었다. 1915년이래로 교인이 점점 왕성하여 가매 장소가 협착하여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음으로 시장 한복판에 새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송곡리와 미전리에 지교회도 설립하였으며 1920년에 교회를 현재 남산정으로 옮기었다. 김천교회는 신유로 인하여 큰 부흥을 받았나니 교우 중 김의용 자발적으로 자기 집에서
백일동안 새벽마다 기도하는 중에 굳센 신앙을 얻는 동시에 신유의 은혜를 받아 그 친척 중에 내 종병으로 수년을 두고 상하로 고름이 남으로 의약으로는 다시 치료할 여망이 없이 자리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고통 하는 것을 김의용이 한번 기도하자 즉석에 그 병이 나은 일과 또는 그 부친이 소의 뿔에 받쳐서 사지를 부동하고 명재경각(命在頃刻)이다가 역시 기도함으로 곧 낫게 된 사실이 나타나 모든 신자들은 이것을 보고 감동이 되어 100일 동안이나 교회에서 기도회를 열고 새벽기도를 하는 중에 신유의 권능을 입은 자가 10여인이요 신자의 수효는 백 여명에 이르게 되었다(이하 생략).
설 립 일 : 1914년 8월 설 립 인 : 박제원 전도사와 김준규 전도사
첫예배장소 : 4간짜리 초가집 첫예배참석 : 7~8인
예배당 건축: 1915년
그러므로 김천복음전도관은 1914년 8월 주임 박제원 전도사와 부임 짐준규 전도사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그때 4간 초가집에서 7~8명이 모여 예배드림으로 지역 성결구령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는 두 전도인들에 의해 김천복음전도관이 시작되었으며 이미 본부로부터 건물을 매입 혹은 월세로 얻어 예배를 드렸다. 그렇다면 두 전도인은 8월 이전에 김천에 내려와 전도관으로 사용하기에 적당한 건물을 얻었으며 전도를 시작함으로 7~8명이 구원받음으로 설립된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신유의 은혜가 임하여 정착과 전도에 큰 유익이 있었다.
2. 김천복음전도관 성결구령활동
가. 성결구령 사역
1) 설립일 및 초대 담임교역자 박제원 전도사
박제원 전도사는 충북 출신으로 경성에 올라가 1911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고 1913년 졸업하였다. 1912년 수양생 때 충남 부여 규암에 내려가 전도하여 규암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졸업하자 김상준 전도사와 함께 규암복음전도관에 부임하여 사역활동하고 1914년 김천복음전도관을 개척 설립하였다.
1915년 주임 박제원 전도사는 부임교역자인 김준규 전도사와 함께 옥외집회를 자주 실시하였다. 이는 미신자들을 대상으로 오직 전도에 일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듣든지 아니든지 나아가 노방전도를 하였다. 그러한 구령열정으로 헌신한 전도사의 설교를 들은 100여 명 중에 6명이 신자가 되어 출석하였다. 또 담배 피우던 16세 소년이 회심하여 온 가족이 교회에 나왔다. 서울과 평양에서 온 20명의 청년 깡패들이 주정부리고 못된 짓을 하다가 김천복음전도관에 오니 박 전도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두 전도인은 소년소녀 복음화에 관심을 두고 활동한 결과 짧은 기간에 9~11세 소년소녀가 40여명이 모이고 이들의 전도로 그들의 부모들 중 여러 명이 주께 인도되었다. 주일 오전 9시 정규예배 외에 목요일 오후 특별 어린이집회를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쳤다. 여기에는 절름발이 거지와 고아들도 상당수 있어 예수를 영접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박 전도사는 한 청년이 조상숭배문제로 상담하자 특별기도를 하며 응답을 받고 신앙으로 결단하기도 하였다(성결교회사 p204~210 참조). 이처럼 박제원 전도사는 청소년 사역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그는 청소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그들을 전도하고자 직접 찾아 나섰고 또 성경을 가르치고 말씀으로 양육하였다. 그리하여 청소년 사역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남을 만큼 활발하게 활동한 그 시대 보기 드문 청소년 전문 사역자였다.
2) 초대 부교역자 김준규 전도사
박제원 전도사와 함께 사역한 첫 번째 부교역자는 김준규 전도사였다. 김 전도사는 경성 출신으로 1911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하자 본 교회 부교역자로 파송 임명받고 내려와 사역하였다. 박제원과 김준규 두 전도인은 동창생이었나 통상적인 관례를 따라 나이 많은 박제원 전도사가 주임이 되었고 김 전도사는 부임 교역자로 사역하였다. 1917년까지 약 3년간 이곳에서 신실한 전도인의 삶을 살았다. 두 전도인이 이곳에 부임하기 전 경성성서학원에서 함께 하였을 뿐만 아니라 파송받은 사역의 현장에서 전도인으로의 경험을 나누며 구령 현장에서의 어려움과 기쁨을 공유한 사이가 되었다. 1914년 이곳 김천에 부임하기 전 김준규 전도사는 또 다른 동창생인 김석준 전도사와 함께 경성에서 열린 신년회를 마치고 규암으로 내려가는 김상준과 박제원 전도사에 동행하였다. 네 사람이 규암에 내려온 목적은 약 2주간의 대거전도회를 실시하고자 해서였다. 2주 동안 규암지역 복음화를 위해 전개하는 구령활동 현장을 목도하였고 실제적인 전도인의 체험사역을 하게 되었다. 매일 전도현장에서 경험한 일들은 그들을 열정적인 전도인으로 성장하게 하였다. 대거전도회란 규암복음전도관을 기점으로 하여 수 십리 주변 동리까지 직접 찾아가 축호전도 노방전도 등을 하며 또 저녁에는 구령집회를 하는 복음전도관의 집중전도방식이었다. 그 후 규암의 박제원 전도사가 김천으로 파송 받아 부임하였고 김준규 전도사는 학원에서 수양생 과정을 마치고 김천복음전도관 부임 교역자로 파송 받았다. 김준규 전도사는 부임하여 박제원 전도사와 함께 공동 전도사역을 실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6년 김 전도사는 혼자 6번의 김천시장에서 집회를 인도하였으며, 또 30명의 결심자를 얻었고 그들 중 6명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성결교회사 p210). 이처럼 김천에 저주하는 미신자들의 영혼 구령을 위하여 담대하게 노방전도를 실시하며 영혼 사랑하는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김준규 전도사의 부임과 사임 참고 기록
김준규 전도사가 활동하던 당시 조선총독부는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를 감찰하고 파악 관리하기 위해 포교규칙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이 포교규칙은 신도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유사종교로 규정하였다. 이 규칙에 의하여 기독교계 역시 포교와 관련된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허가를 받아 구령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도 총독부가 요구하는 포교관련 서류를 제출하였다. 어떤 교역자가 현재 어느 복음전도관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또 다른 복음전도관으로 언제 이동하였는가 그리고 복음전도관을 언제 설립하였는가에 관한 관련 서류를 작성하여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당시 김준규 전도사에 관한 조선총독부 포교관련 서류가 있다. 1917년 5월 11일보 조선총독부 관보 포교계출 곧 현재 복음전도관에서 구령 활동하는 기록과 1918년 1월 26일 제1640호 9면에 포교폐지 곧 사임기록이 있다. 곧, 1918년 1월 11일부로 김천교회에서 사임하였다.
조선총독부관보 기록에 의한 김천복음전도관
김준규 전도사가 대정 4년(1915년) 12월 24일부로 현재 김천복음전도관에서 사역하다고 있다는 기록이다.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면 남산정 36번지였다. 이 관보는 대정 6년 5월 11일에 발행되었다. 그런데 대정 4년(1915.12.24.)에 동양선교회 22명의 교역자들이 현재 기록된 주소지에서 포교하고 있는 중이라고 서류보고를 받아 기재하였다. 이때 박제원 전도사는 1915년 12월 21일부로 경주복음전도관으로 전임된 기록이 있다.
3) 초대 전도부인 허순성(許順成)
허순성 전도부인은 개성 출신으로 1914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고향인 개성에 파송되었고 다음해에 아현복음전도관 전도부인으로 전임되었다가 김천복음전도관 초대전도부인으로 부임하였다. 1920년까지 헌신적으로 성결구령사역하고 무교동복음전도관으로 갔다가 다시 김천복음전도관에 왔으며 1921년에는 인천복음전도관으로 전임되었다가 1922년에 세 번 김천복음전도관 전도부인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25년 의흥성결교회로 전임하기까지 헌신 사역하였다. 허 전도부인은 교회 부인들과 양육할뿐만 아니라 김천시장에서 개인전도도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이 아직 주초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일 1 : 9과 사 1 : 18 말씀으로 권하여 타락한 자들이 성결인이 되게 하였고, 한 달에 구도자가 4명이 나와 차근차근 성경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4~5리에 떨어져 있는 동네에 길쌈하는 부자집 안주인을 전도하니 성령이 역사하여 죄사함의 기쁨을 얻고 교회 출석하게 되었다. 그 부인에게 기도법과 성경을 가르치는 가운데 변화되자 핍박하던 며느리까지 예수 믿고 동반출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여인은 아픈 자녀 위해 박수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해도 효험이 없자 허 전도부인을 청하여 복음을 듣고 예수 믿었다. 그리고 매목요일 구역회를 10여리 다니며 인도하고 수요일 오후에는 부인반 집회를 하여 기도와 성경읽기를 하였다. 그리고 씨름대회에 모인 100여명에게 전도하여 몇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한편 교회로부터 10여리 밖의 여자들을 방문하여 5명에게 복음을 가르쳤고 기도회를 하여 1명의 구원자를 얻었다. 이 기도회에 참석한 한 부인의 남편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서 소리 지름으로 그 부인은 이웃 노인 집으로 몸을 피하여 밤을 지새웠다. 이때 허 전도부인이 귀가하여 남편의 매질이 있을지라도 믿음을 보이라고 권하였다. 이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온전한 성결인으로 자라가도록 신앙교육을 철저히 지도하던 전도부인이었다.
나. 김천복음전도관 초기 전도활동과 교인들 그리고 침례 현황(사례)
1) 초기 전도활동
박제원 전도사와 김준규 전도사가 김천에 내려와 김천의 정황을 살피고 선교보고를 하였다. 두 전도인이 김천에서 본 것 중 하나가 역전 근방의 윤락가였다. 그 영향은 지금도 김천 평화동에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두 전도인은 이곳을 소돔과 에스겔의 마른 뼈 골짜기와 같다고 하였다. 복음을 전하자 부자들은 듣지 않았으나 가난한 이들은 기쁘게 들었다고 하였다.
또 두 전도인은 김천시장에서 장날마다 노방전도를 하였다. 이때 복음을 전해들은 이들 중 멀리서 장보러 온 이들이 있었으며 그들 중 2명은 다른 친구에게 복음을 들려주고자 하였다가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방전도를 통하여 12명의 영혼을 얻었다. 이처럼 설립 초기부터 김천교회는 전도에 집중하였고 전도로 정착하였다.
2) 초기 교인들
경성무고동복음전도관에서 신앙 생활하던 두 신자가 김천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유년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고 또 예배당 중수할 헌금을 드림으로 큰 힘이 되었다. 또 박 전도사의 열심 구령활동으로 몇 주 만에 20여명이 매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처소로 사용하는 전도사 처소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성경공부에 참석하던 한 청년의 부친이 부표관주신약전서를 찢어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그 청년은 복음전파에 그의 목숨이라도 바칠 결심을 하였다.
3) 토마스 감독 방문
토마스 초대감독이 경상도 지역 복음전도관을 순회하였다. 1918년 8월 대구를 방문하고 침례예식을 집레 하였다. 이어서 김천복음전도관을 방문하였다. 이때 사역자는 주임 강시영, 부임 전성운과 허순성 전도부인의 영접을 받았다. 수요일 저녁예배는 침례예식을 거행하였다. 김천복음전도관으로는 감독이 집례하는 침례예식을 거행함은 큰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또 침례예식은 지역의 복음전도관으로도 정착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물론 교인들의 신앙향상과 영적 성숙을 도모하는 일이다.
침례예식은 수요일 저녁 9시에 시작되었다. 농사일로 모든 교인들이 논일을 늦게까지 했기 때문이다. 낙동강을 따라 선산을 지나 김천으로 유입되어 흐르는 김천천에서 토마스 감독에 의해 침례예식이 집례되었다. 밤이 너무 어두워 호야를 켜들고 찬송을 부르며 모두 강가로 나갔다. 침례 할 만하게 웅덩이 진곳에서 8명에게 침례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전도관으로 다시 돌아와 10시에 그들과 함께 성찬예식을 하였다. 빵과 포도즙으로 거행된 예식이 11시나 되어 끝났다.
이렇듯 김천성결교회는 초기부터 성결교회의 특성과 본연의 사명인 전도에 집중하였으며 전도로 이곳에서 구원 받는 이들을 일으켜 성결한 삶을 살아가도록 그리고 영혼구령에 자신을 드려 주의 것으로 쓰임 받도록 하면서 지역 교회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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