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1년 최자해(崔自海,1363~1421) 귀근 기록
*최자해(崔自海,초명 有孫,1363~1421) 김천에 입향한 화순인 최원지(崔元之)의 장남이다.
[려사1380] [려문1382]를 거쳐 밀양부사를 역임하였다.
1配수성인 목사 羅有琠의딸(生1녀)이며 2配파평인 중랑장 윤지례(尹之烈, 尹之禮)의딸(1383~1454, 生1남1녀)이다
묘소는 김천시 구성면 송죽동 백일대(먹배이) 간좌에 있다.
*최원지(崔元之) [려문] 중정대부(中正大夫) 종부령(宗簿令), 配解顔인 白希館의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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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380년 5월 진포에서 500여척의 군선을 잃은 왜병력이 옥천-영동-어모-공성-상주-선산-성주-사근내-인월남원의 경로로 노략질 하면서 영남 내륙이 황폐화 됨. 이후 황산에서 이성계 군에게 섬멸됨. 이때 김산 하로에 있던 부모를 모셔오기 위해 낙향하는 최자해에게 권근이 전송하면서 쓴 글이다.
送崔生員有孫 改名自海 歸覲慶尙之星山序
경상도 성산으로 근친가는 생원 최유손 ‘자해(自海)라고 개명했다“ 을 전송하는 서(序)
권근(權近 1352~1409)
上之六年庚申。予爲祭酒。掌試生員。有曰崔有孫者與其選。由是扣篋齒胄。學日進。<闕文> 其親在慶尙之星山。每一歲一往謁焉。今玆賊興。縱橫侵暴靡所不至。平民之死亡流離。竄伏顚躓。幸而免者盖寡矣。吾之身雖在學。而吾之志未嘗不在於親也。吾之捨吾親而遠學于京者。冀將有得以榮之也。然是有命焉。不可必也。當此亂離之際。吾安忍冀其不可必。而置吾親於鋒鏑之境乎。吾將歸而迎之。偕來于京。且養且學。以待吾命而爲之榮。不幾其順且美乎。卽起而辭于師。師與其友義其言壯其行。皆歌以相贈。<闕文> 又來告行于陽村。陽村曰。昔陽城之爲司業。諸生有三年不歸之養者。皆歸之。今生旣一歲一歸。又足嘉矣。况冒艱險走千里。脫其親於危地乎。雖其天質之美。<闕文> 亦由國家敎養之力也。在學之士。孝且篤學如生之比者幾何人哉。詩曰。濟濟多士。文王以寧。<闕文> 他日拔茅揚庭。移孝於忠。上以憂乎君。下以憂乎民。以濟時屯者。必自學中出矣。生其勉之。無負於親。又無負於ⓟ君可也。洪武十六年秋八月辛酉。
금상(今上,우왕) 6년 경신(1380년)에 내가 좨주(祭酒)로 있으면서 생원(生員) 시험을 맡아 보았는데, 최유손이라는 사람이 이 선발에 뽑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주자(冑子)들과 같이 있었으며 학업이 날로 진보되었다. <결문> 그 부모가 경상도 성산에 사는데, 해마다 한 번씩 가서 뵈었다.
“요사이 적(賊)이 일어나 종횡(縱橫)으로 침해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민중들이 사망하거나 이산되고 숨거나 짓밟혀, 요행히 면한 사람이 아마 적을 것이다. 나의 몸은 비록 학궁(學宮)에 있지만 나의 뜻은 일찍이 부모에게 있지 않는 때가 없다. 내가 부모를 버려 두고 멀리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은 장차 영화롭게 하여 드리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는 천명이 있는 것이어서 반드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난리 때에, 내가 어찌 차마 그 기필할 수 없는 것을 바라면서 난리통에 부모를 버려 두겠는가. 내가 장차 가서 맞이하여 모시고 서울로 와서 한편으로는 봉양하고 한편으로는 공부하면서 나의 천명을 기다려 영화롭게 하여 드리는 것이 순탄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곧 스승에게 하직하니, 스승과 벗들이 그 말을 의롭게 여기고 떠나는 것을 장하게 여겨, 모두 시를 지어 주었다. <결문>
또 나에게 와서 떠난다고 하기에 말하기를,
“옛날에 양성(陽城)이 사업(司業)으로 있을 적에, 제생(諸生) 중에 3년토록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돌려보냈었는데, 지금 생(生)은 이미 한 해에 한 번씩 귀성(歸省)하였으니 또한 족히 아름답게 여길 일인데, 하물며 곤란과 위험을 무릅쓰고 천리 길을 달려가 부모를 위태한 땅에서 빼내오는 것이겠는가. 비록 생의 천품이 아름다운 것이겠으나, <결문> 또한 국가에서 교양한 노력 때문일 것이다. 학궁(學宮)에 있는 선비들 중에 효도하고 또한 학업에 독실하기가 생과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랴.
《시경》에 이르기를 ‘제제(濟濟)한 다사(多士)들이여. 문왕(文王)이 그들 덕에 편안하다.’ 하였다. <결문> 앞으로 뽑혀서 조정에 서게 되면 효도를 충성에 옮겨, 위로는 임금의 일을 근심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일을 근심하여, 당시의 곤란을 구제할 사람이 반드시 학궁 안에서 나오게 될 것이니, 생은 힘써서 부모를 저버림이 없고 또한 임금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홍무 16년 가을 8월 신유(辛酉,1381년)
*其親在慶尙之星山 : 고려시대에 김산은 성산의 속현 이었기에 성산으로 표기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