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고해성사
추석 명절
치매요양원에서 나들이 나온 팔순의 어머니
소풍날 아이처럼 신명났다
송편 같은 보름달이 얼굴에 환하다
고장난 엘피판 같은 어머니의 기억
한물 간 손자의 근황을
묻고 또 물으신다
이 밤이 지나면
다시 떠나야 할 유배의 먼 길 눈치채신 걸까
갑자기, 섬뜩한 험담과 욕설을 퍼부어 대신다
서슬 푸른 칼날이 팔방으로 날아와 꽂힌다
폭풍의 어머니,
자객의 어머니,
독설의 칼끝에 아내가 난자당한다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고 가지가 부러진다
폭풍이 지나간 들녘은
다시 고요해진다
마법 같은 어머니의 변신!
미안하다 애비야
용서해 다오, 부디 용서해 다오
늙어, 죽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몹쓸 죄가 되는구나
어머니의 고해성사는
맑고 맑아서
내 가슴을 뚫고, 억만 길 어둠을 뚫고
멀리 하늘까지 가 닿는다
참방참방 젖은 별들이 발등으로 떨어진다
심장이 울컥 박자를 놓친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어머니
다 아파서 그런 걸요
졸지에 사제가 된 아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녀를 용서한다
.
.
.
.
그녀에게,
용서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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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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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통속에서 배우다2 <첫사랑>
첫사랑은 무조건 아프다
잘 살고 있으면… 배가 아프고
못 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고
같이 살자고 하면… 머리가 아프다!
고속도로 휴게소
환장할 아랫배를 틀어쥐고 끙끙대다가
공중 화장실 벽에 적힌 낙서를 읽는다
히야~, 명언이다
웃음꽃이 팝콘처럼 터진다
그렇군, 첫사랑이란 어차피 아플 수밖에 없는 것!
끄응, 진땀을 쏟으며
내 안 깊숙이 똬리 틀고 있던
지독한 뱀 한 마리를 밖으로 몰아낸다
순간, 거짓말처럼 통증의 먹구름이 걷힌다
세상이 환해진다
정말이지 이제 아프지 않다
은미야, 잘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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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후레자식
고향집에서 더는 홀로 살지 못하게 된 여든셋,
치매 앓는 노모를
집 가까운 요양원으로 보낸다
시설도 좋고, 친구들도 많고
거기가 외려 어머니 치료에도 도움이 돼요
1년도 못가 두 손 든 아내는
빛 좋은 개살구들을 골라
여기저기 때깔 좋게 늘어놓는다, 실은
늙은이 냄새, 오줌 지린내가 역겨워서고
외며느리 병수발이 넌덜머리가 나서인데
버럭 고함을 질러보긴 하였지만,나 역시 별수 없어
끝내 어머니를 적소(適所)로 등 떠민다
애비야, 집에 가서 같이 살면 안 되나?
어머니, 이곳이 집보다 더 좋은 곳이에요!
나는 껍질도 안 깐 거짓말을 어머니에게 생으로 먹이고는
언젠가 나까지 내다버릴지 모를
두려운 가족의 품속으로 허겁지겁 돌아온다
고려장이 별 거냐
제 자식 지척에 두고 늙고 병든 것끼리 쓸리어
못죽고 사는 내 신세가 고려장이지
어머니의 정신 맑은 몇 가닥 말씀에,
폐부에 찔린 나는
병 든 개처럼 허정거리며
21세기 막된 고려인의 집으로 돌아온다
천하에 몹쓸, 후레자식이 되어
퉤퉤, 돼먹지 못한 개살구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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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올인
그녀는 내 밥이었다
이 세상의 처음에서부터
그녀는
내 것이었다, 내 먹이였다
단 한 번도 거역하지 않은 착한 밥
보시바라밀이었다
내가 철없이 세상으로 달려나가다
허방에 거꾸러져 신음할 때
나를 안고서
나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울었던 것도
그녀였다
밥이 아닐 땐 돈이었다
나의 영원한 호구, 돈주머니였다
그녀를 팔아 대학을 다녔고
그녀를 쥐어짜서 아파트를 장만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그녀를
아주_머니라 부르기도 했고
할_머니라 명명하기도 했지만
나는 내 식대로 내 멋대로
어, 머니!
오, 맥닐(money!)
호기롭게 불러 제꼈다
이제는 오래되어, 먹지 않는 밥
낡고 헤어진, 몹쓸 주머니
백발 치매의 병주머니 우리 엄마
가엾은 내 밥!
어_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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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자식
치매요양원 울 엄마
밤마다 옷 보따리를 싼다
아들집 가는 희망 하나로
기약 없는 유배의 세월 견딘다
우리 아들 오면 같이 갈라꼬예!
아내는 툭하면 말 보따리를 싼다
돈 문제, 자식 문제, 시어머니 문제, 문제, 문제, 문제......
당신은 문제투성이야
개자식, 너하곤 다신 안 살아!
안 살아!
안 살아! 라는 말이 어떨 땐 '인샬라!' 처럼 들린다
오오, 인샬라!
나를 낳아준 여자는 내가 내다 버리고
내 아이 낳아준 여자는, 나를 버리려 하는
이 부조리한 삶
개자식!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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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아버지를 바치며
땅에게 아버지를 바친다
주르륵,
한 줌 흙으로 당신을 허락한다
덥석, 덥석, 깨무는 대지의 저 붉은 아가리!
평생 땅만 파먹고 살았던 농군
고맙고 미안한 신세
이제, 당신께서 보시할 차례
나무그릇에 담긴 최후의 사내가
희망도 절망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북어포의 사내가
나의 원본(原本)인 사내가
땅의 육보 식탁에 차려진다
일렁거리는 산천
뒤돌아보니
어느새 땅의 배가 불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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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중광아, 걸레야
걸레 스님
중광아, 네가 틀렸다
인생,
'괜히 왔다 간다'고,
결국 가야 할 길, 온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넌 생의 마지막 인사를 그렇게 했다만
미안하지만,
중광아, 네가 틀렸다
올 때는 수건이었다가
갈 때는 걸레인 인생에 대해
너는 못마땅했겠지만
그 걸레에 대해, 걸레가 된 생에 대해, 나는 경의를 표하나니
저기, 시장 한 구석 서릿발 그득 엉겨 붙은 저 할머니
늦가을
금세, 툭,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목숨을 매달고
푸성귀 몇 무더기로 소신공양하는 생(生)을 보아라
어미아비 다 버리고 간 어린것 지키기 위해
온종일,
시장 바닥에 껌처럼 붙어 있는
저 위대한 걸레를 보아라,
반가부처를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