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場基里
장기리는 구 개복면 지역으로 개복면 사무소가 개복에 있었다 하며, 개복면 사무소 뿐만 아니라 개복장이 섰다고 한다.
장터는 개복의 동쪽이었는데 후에 장이 없어졌으나 장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장터 - [場基]로 쓰여 법정리 이름이 되었다 한다.
[호구총수]에도 [場基村]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장기로 불린 것은 오래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介卜]이란 면명이나 촌명은 [호구총수]에 나타나 있지 않고 있어 지금 현재의 개복은 비록 개복면이란 이름만 남겼을 뿐 너무 오지(奧地)에 위치한 관계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여 지금은 행정리 병치으로도 불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장기리 안에는 장기촌 외에도 매탄촌이 있었다.
매탄은 탄(石炭)이 묻혀 있다는 설에 따라 마을 이름으로 불린 것인데 일제시대에 석탄을 캐려고 채탄작업을 하였다 한다.
장기리 서쪽에 고속도로와 마구선 국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행정리로는 율곡과 매탄 등 2개리가 있다.
** 율곡(栗谷)
장기리의 북부 마을의 행정리 명칭이다. 밤실이 본동이다.
** 장터골(場基)
율곡의 동쪽 골짜기로 구 개복면의 터로 알려졌는데 장터골이라 불린다.
개복면 시절에 장이 섰는데 그 장터가 있었떤 곳이므로 장터골, 장기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법정리 이름으로 되었다.
** 개복(介福)
전에는 [介卜]으로 썼으나 최근에는 [介福]으로 쓴다.
개복면 시절 첫 면장은 정씨라 전해 오는데 , 30여호가 살고 있다.
** 밤실(栗谷)
밤나무가 우거진 마을이었으므로 밤실이다 하였다 한다.
동쪽에 장터골이 있으며 60여호가 산다. 낙동재(樂東齋 : 文希哲 제각)가 있다.
** 수무지 (埋炭)
뒷산에 숯(석탄)이 많이 묻혀져 있다 하여 숯묻이, 수무지 등으로 불리었다.
[埋炭]은 숯묻이의 표기로 일제시대, 동남쪽으로 떨어진 석실에서 채탄작업을 한 적이 있다.
동리 서쪽과 안쪽에 저수지가 두개 있는데 오래된 것으로 [경상도 읍지]에 나오는 것이다.
埋炭村 在縣北二十里周回九百十二尺水深二尺
薪谷村 在縣北二十里周回九百九十七尺水深三尺
위의 기록을 보아 [薪谷](신곡)으로도 쓰였는데 [薪}은 땔나무 또는 숯을 말하니 매탄이나 같은 뜻이라 하겠다.
지금은 40혀호가 살며 탁옥재(琢玉齋 : 석씨 書塾)가 있다.
** 번개들(大合工團)
밤실 앞의 들이었는데 이 들에 1980년대 말에 공단이 들어서 들판이 공장지대로 바뀌었으므로 지금은 번개들보다는 대합공단으로 불린다.
번개들이나 불리게 된 것은 이 근처 사람들이 농사(경작지)는 적고 골도 좁아 사람들이 부지런하고보니 일찍 모를 심고 일찍 거두어 들이니 일을 번개같이 한다 하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 번개들에는 늦게 심은 것도 퍼뜩퍼뜩 커서 번개같이 먹는다."
하는 말이 인근에 퍼져 있다.
** 새터 (新基)
매탄의 북동쪽에 있는 뜸으로 전에는 3,4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다 떠나고 한집 뿐이다.
[창녕현지]에 이곳의 저수지 이름이 신재(新堤 在縣北二十里周回七百九十七尺水深三尺)라 기록되어 있다.
** 너더리
5호 마구선 국도변으로 매탄 마을의 진입로 입구의 뜸이다.
고속도로 바로 아래로 지도상에는 이곳을 썩비리라 표시해 놓고 너더리는 길건너에 표시했는데 다 틀린 지점이다.
버스가 서는 곳으로 행인이 많이 모인다.
너더리는 너덜경이, 곧 돌이 많은 비탈진 곳이니, 이 곳을 썩비리라 함도 돌 많은 곳으로 연유한 것이다. 너덜이란 뜻이다.
** 봉오재
밤실 동북쪽의 산으로 왕재산의 남쪽 줄기이다.
임진란 때 의병군이 봉화를 올려 왕재산과 화왕산의 군사들과 협동작전을 벌린 곳이었다 한다.
시치재가 바로 옆에 있어 시치재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남쪽 아래 골짜기에 율곡지가 있는데 이 못은 1952년에 팠는데 그 면적은 1,000여평 된다.
**돌빼기 만댕이
돌빼기가 있는 산이라 하여 돌빼기 만댕이라 부른다.
** 살구정
천왕댕이 남쪽으로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시치로 가는 고개가 있는 산등이다. 이 산등이 상여 방틀 같다고 한다.
전에 살구나무 고목이 있어 살구정이라 하였다.
** 삼밭골 - 삼밭골은 산 바깥, 산 밖의 골짜기란 뜻이다.
** 썩비리
고속도로 진입로 남쪽의 등성이로 썩비리는 썩은 들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보통 청석이 햇빛을 보게 되면 부스러지므로 이를 말한다.
비리는 벼리,벼랑이란 뜻이다.
** 군립묘지(郡立墓地)
썩비리와 너더리 사이에 있는 묘자가 있었던 등성이로 이 땅은 면소유였는데, 6.25 동란때 전사한 본군 출신 용사들이 묻혔던 곳이다.
대부분 국군묘지로 이장하였다. 나머지 묘들도 고속도로 개통 때 도로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이장하였다.
이러한 군립묘지가 대지면 미락에도 있었다.
** 여시골 - 여시(여우)가 많았다는 데서 이르는 말이다.
** 부처골 - 이 골짜기에서 전에 부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참사골(寒泉谷)
밤실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차거운 물이 나는 참샘이 있었으므로 참샘골이라 불리었는데 참사골로 변하였다.
** 개복고개 - 개복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고암면 간적으로 가는 고개이다.
** 손판서묘(孫判書墓) - 개복 남쪽 편의 산에 있는 묘로 속칭 손판서 묘라 전한다.
** 문효자각(文孝子閣) - 매탄 서쪽, 매탄 저수지 서편에 있는 정문으로 효자 문씨의 정려각이 있는 곳이다.
** 돌방고개 - 매탄 동남쪽에서 고암면 원촌으로 가는 고개이다. 산이 돌방하다고 돌방고개라 불린다.
** 섬들 - 밤실앞의 들로 번개들에 따렸는데 물을 대기가 어려운 지대이므로 섬들이라 하였다.
장기 저수지가 있어 요즘은 용수가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