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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하늘의 중심[天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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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저절로 그러함을 진리 내지는 이치라고 한다.(自然曰道) 진리(道)는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이 하나의 본성일 뿐이요, 사람의 생명 활동을 주재主宰하는 하나의 으뜸 된 신(元神)일 뿐이다. 본성과 명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빛(天光)에 의지하여 있는데, 하늘의 빛도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의 두 눈에 의지하여 있다.
옛날부터 선인仙人이나 진인眞人이라는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서로 가르쳐 전하였는데, 하나를 가르쳐 전하면 하나를 체험을 통하여 얻곤 하였던 것이다. 가장 높은 스승이신 태상로군太上老君께서 세상에 몸을 나투신 뒤로 동화제군東華帝君이 전하여 받고, 다시 차례대로 여조에게 내려와서 다시 차례대로 전하여져서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이라는 두 큰 맥으로 이어졌다.
이에 이르러 사람의 태어나기 이전 상태를 온전히 보존하라고 가르치는 전진교全眞의 가르침이 극도로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큰 세력을 떨친다는 것은 그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일 뿐, 오히려 그 마음에서 마음으로 남모르게 전해지던 가르침과 깨달음은 날로 희미해져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내면의 세계에 남은 것이라곤 없을 정도로 끊어졌다.
사람들은 분수를 모르고 잘난 체만 하는 풍조가 극도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극도에 다다르면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이치인지라, 동진東晉 때의 허진군許眞君의 가르침을 따라서 맑고 밝음을 굳게 지키는 정명교淨明敎가 자비로움을 베풀어 사람들을 널리 건지기 위하여, 문자만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떠나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주고자 하는 뜻을 특별히 세우고, 높은 소질을 타고난 사람들을 맞이하여 이끌어 주게 되었다.
이를 듣는 사람은 천겁이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만난 것이요, 이를 전하여 받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한때에 진리의 모임(法會)을 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허진군의 애쓰심을 우러러 보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사회생활에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잘 지키고,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서서 확실한 뿌리를 내린 훌륭한 사람이 된 뒤에야 태어나기 이전의 참다운 세계(眞)를 닦고 본성(性)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외람되게도 스스로 사람들을 건지는 스승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먼저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라는 말의 뜻을 밝혀 낸 뒤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태을太乙이란 이보다 더 이상의 위는 없다는 말이다. 단丹을 가르치는 법들은 모두 유위有爲한 것들을 빌어서 무위無爲함에 이르고 있는 것들이지, 유위有爲을 단번에 뛰어넘고 무위無爲로 곧바로 들어가는 내용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전하고 있는 종요로운 뜻은 본성을 닦고 불리는 일과 그 효과를 곧 바로 드러내 놓고 있어서 첫째가는 가르침에 속하고 둘째가는 가르침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묘하다(妙)"라고 한다.
금화金華란 말은 곧 빛을 말한다. 빛에는 색이 없으므로 황금 꽃(金華)으로 상징을 삼았는데, 그 꽃(金華)이라는 글자의 뜻 가운데에는 보통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하나의 빛이라는 뜻도 들어 있으니, 다름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위없고 참된 기氣라는 것이다. 입약경入藥經에 이르길 “내면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물을 고향으로 하는 납은 그 맛이 한가지이다.”라고 하였다.
“水鄕鉛 只一味”라고 말할 때의 납(鉛)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그 납이라는 것은 물을 상징하는 감괘坎卦의 두 음효陰爻 가운데에 있는 양효陽爻에 해당한다. 빛을 되돌려 비추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스르는 법(逆法)을 써서 하늘의 중심(天心)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 쏟아 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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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에서는 전진교全眞의 가르침이 극도로 큰 세력을 떨치게 된 탓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많아졌을지언정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던 깨달음은 날로 희미해져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내면의 세계에 남은 것이 없을 정도로 끊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허진군의 가르침을 따라 맑고 밝음을 지키던 정명교가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고자 하는 뜻을 세우고 이끌던 도리를 베풀고자 태을금화종지를 설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먼저 태을太乙이란 이보다 더 이상의 위는 없다는 말이며, 종래에 가르치는 법들이 모두 유위를 통해 무위에 이르고자 하는 것들뿐이며 유위를 단번에 뛰어넘어 무위로 곧바로 들어가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태을금화종지가 전하고 있는 종요로운 뜻은 본성을 닦고 불리는 일과 그 효과를 곧 바로 드러내고 있어서 첫째가는 가르침에 속하기 때문에 "묘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금화金華란 말은 곧 빛을 말하며 황금 꽃으로 상징을 삼았다고 하였다. 황금 꽃의 빛이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위없고 참된 기氣라는 것이다. 입약경入藥經에서 그 빛에 대해 이르길 “내면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물을 고향으로 하는 납은 그 맛이 한가지이다.”라고 하였다.
납은 물을 고향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얼음이 물과는 성질은 다르지만 물을 근본으로 한다는 비유와 같은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그러므로 마음은 황금의 빛을 고향으로 하며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즉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를 이룰 수 없고 부처를 떠난 마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일승의 경전들은 하나같이 이러한 말들을 전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음에도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부처를 이루고자 마음을 항복받기 위해 마음과 투쟁하면서 무수한 삶을 전전하고 있지만 부처를 이룬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도교의 중심사상인 태을금화종지가 전하는 깊은 뜻을 찬찬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인간은 아주 오래 전부터 명상을 개발하였다.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게 되면 텅 빈 침묵의 깊은 나락에 빠져들면 일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진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은 단지 순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올가즘을 느끼게 된다. 성행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희열을 명상 중에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명상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를 하거나 운동을 하면서도 경험할 수 있는데,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된 사람은 이제 다른 것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명상 중에 희열을 통해 인간은 마음이 가라앉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나머지 삶을 좌우하게 된다. 그것은 하룻밤 꿈에 불과한 경험이 아니다. 그것을 경험하기 전과 후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에 거듭 새롭게 태어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태초부터 존재하던 빛이며 그 빛에 의해 자신의 몸이 빨려 들어가고 언제 어디서든 늘 그 빛과 함께 존재하게 된다. 만일 인간이 이런 상태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명상이나 종교적 가르침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며 가슴에 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마치 죽음이 있기 때문에 꿈이 꿈으로만 끝날 수 없었다. 꿈을 깨고 나면 꿈속의 일이란 헛된 망상이며 허망한 일에 불과한 것처럼 삶도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으로만 끝날 수 없는 것이다.
혹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간은 생각하게 된다. 무엇 하나 삶에서 매달려보아도 마음은 이내 식상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상의 희열을 맛본 사람들은 자신과 달리 마음의 동요를 전혀 겪지 않음을 발견하였고 자신도 그들과 같은 마음 상태를 이루고자 염원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마음을 정복하여 가라앉은 마음을 이루고자 해도 마음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의 말씀을 받아들어야 우리도 그 상태로 근접할 수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내 마음이면서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묘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인가, ‘태을종지’에서는 마음을 빛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원신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치한 곳에 대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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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중심은 해와 달의 가운데에 있는데, 황정경黃庭經에서는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집 가운데의 사방 한 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이 힘차게 살아나오고 있는 참된 기(眞氣)를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집이란 얼굴을 말하는 것이니, 얼굴 위에 있고 사방이 한 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이란 바로 하늘의 중심(天心)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사방 한 치 정도 되는 가운데에는 약초들이 빽빽하게 널려 자라고 있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평탄한 공간이 높다랗게 걸려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라든가, 옥황상제께서 사시는 하늘나라 서울에 세워진 단청 입힌 궁궐이 보기에도 기묘한 모습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나아가서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신령한 신(神)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다.
유가에서는 허중虛中이라 하고, 불가에서는 영대靈臺라하고, 도가에서는 조토祖土. 황정黃庭. 현관玄關. 선천규先天竅.라고 한다. 어떻든 하늘의 중심은 마치 사람이 사는 집과 같은 곳으로 비유하면, 빛이 그곳의 주인어른이다. 그러므로 빛이 한번 그곳으로 되돌아 비치게 되면, 온몸에 두루 퍼져 있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던 기氣가 모두 위로 올라오게 된다.
이는 마치 성인이 임금으로 되어서 서울을 정하고 지극한 법칙을 세우면, 그를 따르기 위하여 보물과 비단을 들고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수없이 많게 되는 것과 같고, 한 집의 주인이 깔끔하고 밝으면 그에 따른 사람들이 저절로 시키는 일을 잘 받들고 맡은 일을 잘 처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저 빛을 돌리는 일(回光)만을 하면 될 뿐이니 이것이 위없이 묘한 비결이다. 빛이라는 것은 쉽게 움직이는 것이어서 한곳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가 어려운데, 이것을 되돌려 비추어 오랜 기간이 지나면 이 빛이 모여서 엉기게 된다. 이 빛이 엉겨 모인 것은 곧 저절로 그러하고(自然) 진리 자체로 된 몸(法身)이라는 것이며, 아홉 하늘(九天) 위에 신(神)이 엉겨 모이게 된 것이다.
심인경心印經에서 이른바, “뜻을 고요히 하여 하늘님이 있는 곳을 지키노라면, 진리의 태아(道胎)가 그곳으로 날아올라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종요로운 뜻을 행하여 가기 위해서는 힘들여 찾거나 한발 한발 밀어 올리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잡됨이 없이 하늘님이 있는 이곳(上丹田미간,정수리)에다가 생각을 못 박아 두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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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빛이란 내 몸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니 집에 비유하면 가장 어르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약초가 빽빽하다는 것은 눈썹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다른 숨겨진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가리키고 있는 곳은 눈썹의 중간이며 양 미간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곳을 제 3의 눈이라 하여 지금도 이곳에 연지를 찍고 다닌다. 아마도 제 3의 눈이 열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염원을 표현한 것이리라.
제 3의 눈이 열리면 정수리 두정에 위치한 숨골에서 꽃이 피는데 그것을 인간의 궁극적인 완성이라고 표현한다. 삼천년 만에 한번 씩 피어난다는 우담바라는 세속적인 의미의 꽃이 아니라 정수리 두정의 숨골에서 꽃이 피는 것을 상징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 3의 눈으로 한 번 빛이 되돌아 비치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던 기氣가 모두 위로 올라오게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마치 성인이 임금이 되면 수많은 곳에서 온갖 보물과 비단을 들고 그를 따르기 위해 모여드는 것과 같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저 빛을 돌리는 일(回光)만을 하면 될 뿐이니 이것이 위없이 묘한 비결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되돌려 비추기를 오랜 기간이 지나면 이 빛이 모여서 엉기게 되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의미이며, 다만 황금의 빛이 상단전에 자리 잡는 것도 또한 저절로 그렇게 되면서 부터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불교 경전에는 황금빛이 머무는 위치라든가 인도에서 논하는 일곱 챠크라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다. 다만 능엄경에서는 출태도라 하여 인간이 궁극적 완성에 이르는 길에는 정수리 두정을 뚫고 숨골이 열린다고 하였다. 그것을 관정이라 하여 임금이 태자에게 정수리에 물을 부어줌으로써 태자의 지위를 인정하는 의식을 치루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여인이 출산을 하는 것에 대해서 언제 어떻게 되는 과정을 일일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행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때를 맞춰 자연스럽게 출산이 가능한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금의 빛이 거주하고 움직이는 것들은 스스로 운행하기 때문에 불교 경전은 거기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방해하는 요소만 제거하면 될 뿐이다. 그러나 중국의 도교는 그것에 대해 상세히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것의 확실한 존재를 알림으로써 사람들이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 구도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막연히 뜬 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허망하지만 황금의 빛은 허망하지 않은 실체로서의 존재임을 부각시키려는 뜻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빛이 엉겨 모인 것은 곧 저절로 그러할 뿐이며 진리 자체로 된 법신이라는 것이며, 아홉 하늘(九天) 위에 신(神)이 엉겨 모인 것이라 하였다. 그것은 단지 “뜻을 고요히 하여 하늘님이 있는 곳을 지키노라면, 진리의 태아가 그곳으로 날아올라 가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들여 찾거나 한발 한발 밀어 올리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잡됨이 없이 하늘님이 있는 이곳(上丹田미간,정수리)에다가 생각을 못 박아 두면 될 뿐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그뿐이지만 이 일은 한 생에 걸쳐 끝나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이런 글을 접하고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생에도 꾸준히 그 길을 걸어왔기에 가능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유위적인 노력을 통해 지금껏 그 길을 걸어왔다면 지금부터는 무위를 통해 결실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황금빛을 얻고 구하기 위해 힘들여 찾으려 하거나 한 발 한 발 밀어 올리면서 그곳을 향하고자 하면 언제까지나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나라는 아상이 황금의 빛을 손아귀에 쥐려고 하는 까닭이다.
사실 황금의 빛은 잠시도 우리를 떠난 적 없고 우리도 역시 황금의 빛과 늘 함께 하면서도 그것의 존재를 감 잡을 수 없었던 것은 황금의 빛이 나와 내 것이라는 아상으로 모습을 바꿔 나타난 때문이다. 그러한 아상을 내 마음이라고 여기면서 또 다시 참마음을 찾아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린다면 머리 위에 또 머리를 얹고 다니는 사람처럼 어리석을 뿐이다.
태을종지는 말하고 있다. 다만 뜻을 고요히 하여 하늘님이 있는 곳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기만 하면, 진리의 태아가 그곳으로 날아올라가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뜻을 고요히 하는 것과 하늘님이 있는 곳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킨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야겠다는 것도 또한 뜻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에 대해 잘못 알기 때문이다. 가령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나타나면 눈을 감거나 자리를 피해야 한다. 눈에 비추임은 우리의 의지로 동작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자리를 피하거나 눈을 감는 것은 의지로써 동작이 가능하다.
뜻을 고요히 하는 것은 의지로써 동작이 가능하다. 들뜨고 산만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몸의 활동을 자제하면서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면 마음은 가라앉을 수 있다.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아 고요해진 상태라는 것은 마음이 사라졌다는 의미도 된다. 이처럼 마음은 생겨날 수도 있고 소멸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음이 멸하여 고요하고 적막함을 아는 그것은 마음이 아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이미 멸하여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마음을 먹고 상대방을 대하고 있는지 낱낱이 알고 있다. 만일 마음 외에 다른 존재가 없다면 상대방을 대하는 마음 외에는 없을 것이므로 그것을 다시 알아차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를 늘 깨어있는 상태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존재한다. 그 마음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동작하고 있다. 심지어 깊은 잠에 빠져 의식이 사라졌어도 다음날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알아차리는 그 마음이 의식을 깨우기에 가능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늘 지켜보는 마음과 항상 같이 하면서도 그 마음을 의식하지 못하므로 마음과 싸워 이겨야만 본성을 얻고 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허공 밖을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사람이 허공을 찾겠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 결국 그는 허공이 무언지를 알지 못하고 그 때문에 허공을 찾을 수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님이 있는 곳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뜻을 지니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뜻을 일으키며 들뜨고 산만한 마음으로 살았기에, 늘 그것과 함께 하며 언제나 황금의 빛은 하늘님이 있는 곳을 잃어버린 적도 없고 지키지 않은 적도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뜻을 고요히 하면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마치 맑은 하늘은 언제나 그대로지만 구름에 가려 그것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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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은 중생들이 본래 마음을 잃고 헤매므로 일곱 세계에 윤회하게 되는 이치(七趣)를 설명하는 곳에서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오직 그것만이 있는 순수한 생각은 그 자체로서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으니, 반드시 하늘 위에 나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곳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공기로 이루어진 푸르고 푸른 바깥 세계의 하늘이 아니고, “진리의 몸을 선천팔괘방위先天八卦方位 가운데 건괘乾卦에 해당하는 궁궐에 태어나게 한다."라고 말할 때의 그 건괘에 해당하는 궁궐이다. 이 상태를 오래도록 지켜 나가면, 저절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 바깥에 또다시 어떤 몸이 있게 되는 경지가 이루어진다.
황금꽃(金華)은 다름 아니라 금단金丹이다. 신의 밝음(神明)이 변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여러 스승들이 누구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 가운데에 들어 있는 묘한 방법의 가르침은 비록 털끝만큼도 어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마치 힘찬 미꾸라지가 손아귀를 빠져나가듯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총명해야 하고, 또한 반드시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해야 한다. 아주 총명한 사람이 아니면, 이 가르침을 행하여도 얻지를 못하고, 아주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가르침대로 지킨다고 하여도 얻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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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에서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오직 그것만이 있는 순수한 생각은 그 자체로서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으니, 반드시 하늘 위에 나게 된다.”고 말하였다. 붓다는 이르길 보고 들음에 앎이 있으면 그것이 번뇌이고, 보고 들음에 앎이 없으면 그것이 해탈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보고 들은 것에 얽매어 집착심을 내기 때문인데 그래서 보고 들은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악마의 갈고리에 걸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순수한 생각이란 보고 들음에 대해 과거를 비교하면서 좋고 나쁨을 분간하는 의도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좋은 것은 취하려 하고 나쁜 것은 떨쳐내려는 의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고자 하는 바를 얻으면 성취감을 느끼고 얻지 못하면 좌절감을 느끼므로 성취와 좌절을 오르내리는 그것이 고통인 까닭이다.
여조께서는 팔괘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데 팔괘란 건곤감이 건(乾:☰)·곤(坤:☷)·감(坎:☵)·이(離:☲)·진(震:☳)·태(兌:☱)·손(巽:☴·간(艮:☶)을 말한다. 괘(卦)는 걸어놓는다는 뜻으로 천지만물의 형상을 걸어 놓아 사람에게 보인다는 뜻이며, 그 구성은 음효(陰爻:- -)와 양효(陽爻:―)를 1대 2, 또는 2대 1 등의 비율로 셋이 되게 짝지어 이루어진다. 팔괘는 오천여년 전에 중국 최고의 제왕 복희씨(伏羲)가 천문지리를 관찰해서 만들었다고 하며, 뒤에 이 괘를 육십사괘(六十四卦)를 만들어 이로써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게 되었다.
그러나 일승법을 논함에 있어서는 어떤 견해라도 들어서면 그것이 무명인 바, 여조께서 논하는 팔괘에 대해서는 염두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본성이란 텅 빔과 공함으로 이루어졌기에 세상 만물도 역시 텅 빔과 공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한 텅 빔에 대하여 무엇을 얻고 구할 수 있겠으며, 그곳을 향해 간다 해도 텅 빔의 어디를 향해 갈 수 있겠는가,
더구나 텅 빔을 헤아려 견해를 지녀본들 아무 짝에도 쓸모없으므로 무아를 배우고 통달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텅 빔과 공함을 이야기해도 우리들 마음이란 텅 빔과 공함을 인식하려는 습성으로 길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나 허공이라 말하면 머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한다. 머리도 허공이고 들고 보려는 그것도 허공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와 같아서 실제로 일승법에는 언어로 견해 지음이 필요치 않으나, 아직 무아의 공부를 터득하지 못한 탓으로 부득불 언어로써 언어가 거추장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조는 이르길, 진리의 몸이란 땅을 의미하는 건괘乾卦에 해당하는 궁궐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상태를 오래도록 지켜 나가면’ 이라 했는데, 즉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순수한 생각을 지킨다는 것은 비교와 의도를 내려놓고 내면의 상태를 끊임없이 지켜봄을 행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지켜나가면 저절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 바깥에 또다시 어떤 몸이 있게 되는 경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몸만으로 존재한다면 구태여 들숨과 날 숨을 행하지 않아도 살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육신을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쉼 없이 숨을 쉬어야 한다. 호흡을 삼분동안만 하지 못하면 육신은 사대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그와 같아서 육신의 몸이란 단지 아바타처럼 존재하는 허상이기도 하다. 그것을 여조께서는 몸 바깥에 어떤 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우리의 참 몸은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몸은 생멸변화를 보이지 않으므로 육신의 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까닭이다. 언제든 한결같이 늘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참나라고 할 수 있으나, 매순간 생멸변화를 일으키면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은 꿈속의 거짓된 나일뿐이다. 그러한 몸을 알기 위해 일승법이 설해지는 것이며 그 몸이란 신의 밝음(神明)이 변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여조께서 신(神)이라 함은 설화에 등장하는 신의 개념이 아니라 정신을 의미한다. 우리들 마음에는 육신의 마음과 정신의 마음이 존재한다. 그것을 혼백이라고도 하며 얼과 넋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마음은 생멸심이며 육신의 감각기관들이 경험한 정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눈앞에 사물이 보이면 갖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거나 싫은 소리를 듣게 되면 반항심이 생겨나는데, 이와 같이 마음에는 하고자 하는 뜻이 달라붙어 있다.
그것을 육신의 마음이라 하지만 그 마음은 우리가 성장하고 교육받으면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갓난아기 때에는 본능만이 존재하며 육신의 마음 없이 지내다가 차츰 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반면에 정신의 마음이란 얻고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그대로 변함없이 존재하는 부동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존재하기에 갓 때어난 아기도 본능이 있고 모든 생명체에게는 그 마음이 존재하기에 생존할 수 있다. 소나 노루, 양들의 초식동물은 항상 맹수의 위협을 경계해야 하므로 새끼를 낳게 되면 몇 시간 되지 않아 새끼가 스스로 걸을 수 있다.
만일 오랜 시간동안 새끼를 돌봐야 한다면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새끼가 어미의 태를 벗어나면서부터 본능의 마음이 존재하기에 스스로 걷기 위해 몸을 추스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이 모두 본능의 마음에 의해 작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능의 마음이 존재하기에 육신의 마음도 들어설 수 있으니 마음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정신의 마음과 육신의 마음이 그것이고 혼백(魂魄)이라 할 때의 혼은 정신이고 백은 육신의 마음이다. 또한 얼과 넋이라고도 하는데 얼은 정신이며 혼이고 넋은 생멸심이며 백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육신의 마음이라 하면서 정신의 마음이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정신이 그대로 마음인 까닭이다. 그 마음은 무언가를 의지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자체로써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육신의 마음은 무언가를 의지하고 반연되어야만 나타난다. 가령 등허리에 의자등받이가 닿으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육신의 마음이다. 피부에 촉감되는 느낌을 통해 무언가 닿이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닿이고 있음을 안다는 것은 닿임이 없음도 안다는 것이다. 무언가 닿이고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하면 닿임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소리 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것은 소리 없는 쪽도 듣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정신이 늘 깨어있는 상태이므로 육신의 마음을 동작시킬 수 있다. 만일 정신이 없다면 건전지가 없는 후라쉬처럼 켜고 끌 수가 없듯이 사물이 눈앞에 있고 소리가 들려도 전혀 그것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지 못한다. 즉 정신은 생명과도 닿아있다.
이러한 정신의 마음을 여러 스승들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가르친 것이라고 하였으며 태을금화종지도 그와 같다. 그 가운데에 들어 있는 묘한 방법의 가르침은 비록 털끝만큼도 어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마치 힘찬 미꾸라지가 손아귀를 빠져나가듯 한다고 하였다.
진리나 도나 본성, 금단의 열매와 황금의 빛이라 일컫는 것은 모두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가리키는 그것도 사실은 생명으로 행해지는 바이며, 정신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지 못하면 손에 쥐기 무섭게 빠져나가는 미꾸라지처럼 우리가 알려는 그것은 거기에 없다.
여조는 이르길, 그 마음의 본질을 알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총명해야 하고, 또한 반드시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해야 한다. 아주 총명한 사람이 아니면, 이 가르침을 행하여도 얻지를 못하고, 아주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가르침대로 지킨다고 하여도 얻지를 못한다고 하였다. 무엇 때문인가, 그 마음에 대해 알려는 견해를 짓거나 거기에 도달하고자 발 한 짝만 움직여도 행하는 바가 있다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