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직업’과 ‘SKY캐슬’ 차이 나는 해피엔딩 / 강유정
비극이 좋다. 어린 시절에도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좋아진다. 이야기를 읽고, 볼 때엔 기대감이라는 게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파국을 예상하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땐 만사형통을 기대하는 게 그렇다.
독자들은 전문가의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똑똑해서, 아무 결말이나 다 반기지 않는다. 예상되는 결말이란 개연성과 통한다. 이야기 소비자는 그럴듯한 결말을 기대한다. 독자와 관객은 이미 그럴듯한 결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다만, 그 기다림의 끝을 긴장하며 지켜보는 것일 뿐이다.
2월1일 종영한 드라마 <SKY캐슬>의 마지막 회에 비난이 쏟아진 이유도 여기 있다. <SKY캐슬>은 주요 인물의 죽음으로 이 드라마의 방향성을 예고했다. ‘만만치 않은 비극이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속물주의에 직격탄을 날리며 사실주의의 주먹을 날렸다는 점에서도 기대감이 커졌다. <SKY캐슬>은 현실을 만만히 넘기거나 덮어주지 않고 한 꺼풀 밑의 더러운 욕망과 복잡한 관계를 모두 드러내놓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시시한 화해나 성긴 봉합은 없으리라는 선언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론은 그저 그런 봉합이자 화해였다. 도망간 것이다. <SKY캐슬>의 마지막 회는 실소가 나오리만치 우스꽝스럽다. 마지막 회만 보자면 인간은 한 번의 선택으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존재이다. 아니 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그렇다. 한순간 선택으로 잘못된 길에서 옳은 길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단숨에 돌아선다. 자동차 핸들을 꺾어 유턴을 하듯 너무 쉽게 인생의 방향이 전환된다. 어째서인지 기회의 신들은 실제의 인생에선 엄혹하기만 한데 <SKY캐슬> 마지막 회에서는 관대하기만 할까?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자. 우리는 고작 저녁 식탁에 올릴 된장찌개를 끓일 때조차도, 잘못 넣은 양념을 회복하지 못한다. 된장 대신 고추장을 넣어버렸다면 그건 다시 된장찌개로 되돌릴 수 없다. 지나친 예이긴 하지만 잘못된 예는 아니다. 인생은 한 곳으로만 흐른다. 선택은 가혹해서 돌이킬 수 없다. 그게 어떤 결말을 가져오든 우리는 짊어질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가리켜 비참한 결말의 극이 아닌 ‘진지한 드라마’라고 규정했다. 선택과 그것의 결과를 다룬 희곡이 비극이라 불린 이유는, 다름 아니라 운명을 다뤘기 때문이다. 진지함은 인생의 불가역성에 대한 다른 호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는 비극이어야만 할까? 아니다. 이 글의 첫 문단에 썼듯이 이야기에는 어떤 방향성이 있다. 마치, 우리가 <극한직업>을 보며 모두다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극한직업>은 애당초 해피엔딩을 염두에 둔 코미디다. <극한직업>을 볼 때 관객은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기대한다. 그건 유치한 기대가 아니라 이야기의 습성에 대한 학습된 기대감이다. 그렇게 끝나는 것이 그럴듯한 것이다.
<극한직업>은 코미디로서 현실을 희화화하기로 관객에게 이미 제안한 작품이다. 코미디이기 때문에 우연한 선택이 전부 다 행운으로 풀린다. 잠복하기 위해 다 무너져 가는 치킨집을 인수했는데, 자꾸 손님이 든다. 손님이 오길래 직접 닭을 튀기고 요리했는데, 너무들 좋아한다. <극한직업>이 웃음을 끄는 요인은 이 의외성이다. 오라는 범죄자들은 오지 않고 자꾸 손님만 오고 돈까지 벌린다. 일상에서는 좋을 일이지만 마약반이다 보니 웃지만은 못한다. 와중에 급기야 범죄집단이 덩굴째 손아귀에 잡힌다. 거듭된 우연이 행운을 가져오니, 선택은 곧 해피엔딩의 열쇠가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SKY캐슬>과 <극한직업>이 동시대, 같은 시간대의 흥행작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비극만 원하거나 코미디만 원하는 게 아니다. 두 개의 분리된 감각과 분별력으로 다른 이야기에선 다른 현실의 면모를 보고 찾는다. 돈과 욕망, 모자관계의 집착 속에서는 스릴러와 다를 바 없는, 우리 주변의 욕망을 발견한다. 사실이기 때문에 더욱 열광했고, 들여다보면 과장도 아니라고들 인정했다. 그러므로 결말도 이 삶의 잔혹성에 준하는 것이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극한직업>에서는 삶의 의외성을 보고 싶어 한다. 현실이 뒤틀려도 좋다. 여기서 보여주는 현실은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범죄 현장과 다르지 않다. 임도 보고 뽕도 딴다. 조금 거리를 두고, 웃어 보자, 스스로를 격려하는 마음처럼, 웃음은 그렇게 유통된다. <극한직업>에 눈물, 신파, 심각한 뒷배경이 없는 게 매력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극한직업>이 경로를 벗어나지 않고 잘 도착해 성과를 얻었다면 <SKY캐슬>은 예상경로를 한참 벗어나 잘못된 곳에 도착했다. 여객기 탑승자들이 기대한 착륙지와 달리 예고도 없이 엉뚱한 곳에 불시착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유는 하나다. 이야기 스스로 하게 될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개인이 하고 싶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작가가 작품보다 커서는 안된다고. 밀란 쿤데라는 작품을 이용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나 하는 경우를 꾸짖는다. 교훈은 읽는 자가 능동적으로 끌어내는 것이지 작가에게 전달받는 게 아니다. 모든 서사, 이야기가 그렇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품들은 작품을 설교나 훈계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만다. 훌륭한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출발선에서 예측된다. 이야기가 흘러 갈 길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게 곧 훌륭한 이야기꾼의 일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입력 : 2019.02.14 20:41:01 수정 : 2019.02.14 20: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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