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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술
언덕으로 올라가 거기 대장간을 지어라
안성균 ask0508@ice.go.kr
산마을고등학교 교장, 삶을 위한 교사대학 이사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 “언덕으로 올라가, 거기 대장간을 지 어라” 시인 울라브 H. 하우게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이다.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에서 그는 스스로 옳다고 외치려는 이를 말리며 차라리 언덕에 대장간을 짓자 고 말한다. 거기 대장간에서 ‘풀무를 만들고, 쇠를 달구고, 망치질을 하며 노래하는 소리를 우리가 들을 것’이라 고, ‘듣고,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것’이 라고 읊조린다. 그는 평생 울빅이라는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달력 사진으로 수록될 법한 대자연 속에 묻혀 대장간과 과수원(정원)을 가꾸는 일로 여생을 보내며 영성 충만한 시를 썼다. 언덕 꼭대기에서 우뚝 서서 독불장군처럼 자신의 정당성과 존재감을 머리와 말로 과시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손과 몸을 동원하여 땀 흘리며 삶과 맞서 보라는 시인의 주문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멀리 한국의 시인 김광규의 〈대장간의 유혹〉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대장간의 유혹
김광규
풀무질로 이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이글거리는 불길 앞에 메질과 담금질로 하나씩 만들어 낸 호미 같은 질박한 인간은 최첨단 거대 기술 대량 생산 체제 아래 속성으로 규격 재배된 헐렁하고 나약한 인간과는 분명 다르지 않을까?
미래 교육에서 요구되는, 대안교육의 강점이기도 한 학생 개별 맞춤형 교육방식은 대장간에서의 작업과 매우 흡사하다. 무엇보다 연단의 과정을 철저히 거치지 않은 쇠붙이는 쓸모가 떨어진다. 고된 풀무질, 메질, 담금질, 불림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단련된 인격체는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품성을 지닐 것이 틀림없다. 문득 학교가 곧 대장간의 원리와 흐름처럼 움직이는 상상을 해 본다.
산마을에서는 왜 대장간 수업을 할까?
전통 기술은 우리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켜 온 가장 근원이 깊은 인류 고대의 지식과 생활상의 필요를 해결하면서 지구의 지표 위에 이루어진 모든 문화적 전경과 환경을 관리하고 창조해 온 토착 기술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통 지식과 기술들은 적은 에너지와 자원을 사용하면서 발전할 수 있게 하는 해결책이자 환경 변화와 위기, 재앙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다기능의 대안이다. 환경 파괴와 전 지구적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전통 지식과 기술은 자원을 고갈시키지 않으면서 그 잠재성을 확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환경과 관계를 만들어 가 야 할지 알려 주고 있다.
- <UN 전통지식세계은행 설립 취지문>중 에서
현대인들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만들고 생각하고 꾸미고, 그리고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강조하건대 그것이 인간이며,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공장에 맡겨 그로부터 제조된 물건으로 생활을 때우고, 기기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만으로 일생을 보내서는 안 된다. 소중한 인간성에 기초해 생활에 필요한 기물을 만드는 공예는 비단 전문가나 기업만의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물건이 아무리 졸렬해도 무엇인가를 직접 만들다 보면 일반인들도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창조적 의욕과 보다 더 잘 만들겠다는 향상심이 반드시 생겨날 것이다.
- 이데카와 나오키, 정희균 옮김(2002), <인간 부흥의 공예>, 학고재
상대적으로 여학생들은 아기자기한 소품을 주로 만든다. 2019년 서울 적정기술 한마당 행사 때 산마을고 대장간 철 공예 체험 부스에서 선보인 세월호 철제 리본은 졸업한 어느 여학생의 작품을 응용해 만든 것이다. 부족한 철공 기술과 예술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해마다 삶을 위한 교사대학과 함께 철 공예 워크숍을 진행하다. 금속 조각가인 이근세, 정효경, 이주연 작가의 도움을 받았다. 학년 말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드는 구리 공예 수업을 기획하기도 했다. 철을 다루는 일은 갓난아기를 다루 는 일과 비슷하다. 초반 교육과정에 서 철을 길게 늘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철이 타 버 리거나, 식은 상태에서 정신 놓고 두드리다간 쉬 끊어지기도 한다. 철은 종류에 따라 단조➌ 적정 온도가 다르고 발하는 색도 차이가 있다. 분홍빛을 발하는 시점에서의 망치질 타이밍 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적당한 힘 조절은 필수이다. 그토록 강한 철이 부 드러운 엿가락 상태에서 망치질에 따라 갖가지 형상으로 바뀌는 모습은 사뭇 인상적이다. 간혹 노자의 도덕경에 실린 ‘강하고 거친 것은 제명에 살지 못하니 장차 이를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겠다(强梁者 不得其死 吾將以爲敎 父)’라는 구절을 상기한다. 이 메시지는 불 앞에 설 때, 변화와 겸손의 마음가짐을 일깨운다. 담금질과 단조의 반복 작업을 통해 쇠는 강인해진다. 담금질은 변태점에 도달할 만큼의 열이 가해져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임계치까지 자신을 단련하 고, 결정적 자극을 통해 질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게 된다. 여기에 쇠의 성질을 한층 단단하고 질기게 가미하는 기술이 풀림이다. 통상 급냉하는 담금질과는 달리 낮은 온도로 재가열한 후 서서히 식히는 이 기법은 시간 관계상 생략하기 일쑤이나, 여러 번 반복하면 강도는 2배, 경도는 4~5배 까지 증가된다. 금방 식어 버리는 철의 속성상 1,000℃ 이상의 고온 상태 에서 휘몰아치듯 단조해야 하는 시간 싸움의 급박함을 조화롭게 채워 준다.
차 한잔의 여유라고 비유할 수 있다. 우리네 삶의 곳곳에서도 가끔씩 풀림의 시간은 필요하다. 화덕에서 불연소가 일어나면 화력을 떨어뜨리고 숨구멍을 막는 일명 쇠똥clinker이 화덕에 남는다. 가능한 한 완전 연소가 되도록 불과 화덕 관리에 임하고, 특히 산소를 알맞게 잘 공급하는 일이 중요하다. 앙금 없이 몽땅 불사르는 자체의 열정과 시의적절한 외부의 개입이 완성도 높은 작품을 탄생시키듯, 교육의 장면에서도 이 이치는 동일하다. 한편 대장 작업 외에도 철을 갈거나 모양을 내기 위해 일상적으로 전동 공구를 다룬다. 그라인더, 절단기, 연마기, 용접기 등은 방심하면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지기에 늘 노심초사한다. 살짝 화상을 입는 작은 사고는 틈틈이 있었지만, 운이 좋아서인지 큰 사고는 없었다. 가장 위험한 공구는 그라인더인데, 실제 올해 한 친구가 작품을 다 듬다가 손톱이 잘려 나가는 일이 발생 했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주 는 사례가 되기는 했지만 자칫하면 손가락이 잘릴 뻔했다. 놀람과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고가 두렵다고 학생들에게 작업을 금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평소 안전 수칙을 밥 먹듯이 주지시킬 수밖에 없다.
➌ 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필요한 형체로 만드는 일.
산마을고 대장간 안전 수칙
첫째, 눈에 튀는 불똥을 막는 보안경 착용하기
둘째, 달구어진 쇳덩이가 떨어지면 발을 데니 작업화 신기
셋째, 불똥이 튀니 가급적 긴 바지와 긴팔 옷 입기
넷째, 연마 절단 작업 시 발생하는 매연은 호흡기에 손상을 입히므로 미세 먼지용 마스크 쓰기
다섯째, 전동 공구는 지도 교사 동행 시에만 사용하기
생활기술교육은 삶을 위한 교육
흔히 기술을 기능에 한정해 말하곤 한다. 이러한 선입견은 ‘산업 역군’을 양성하던 근대 교육 체제의 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교육 현장에는 실용적인 기능을 넘어 총체적인 삶의 기술로서의 예술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는 익히 예술(art)이 기술(technique, technology)임을 알고 있으나, 어쩌면 애써 외면하며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원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문명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며 지혜(sophia)와 기술(techne)을 같이 사용했음에도 품격이 다른 양 층위를 나누기도 한다. 탄성을 자아내는 ‘생활의 달인’ 들의 기교를 보면서 그들의 솜씨와 열정이 여느 예술가의 경지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교육은 삶과 멀어진 대표적인 분야 중 하나다. 삶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대학을 위한 교육, 취직을 위한 교육, 자본을 위한 교육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교육을 예술이라 이르던 슈타이너의 읊조림은 이 땅에선 공염불에 불과하다. 의식주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헛똑똑이로 자라나는, 머리만 비대해진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손발을 움직여 몸과 정신의 균형을 회복하도록 돕고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 내는 것이 학교의 기술교육과 예술교육의 핵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성화고에서 학생들에게 안내하는 기능사 시험은 취직은 고사하고 입시용 사다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이름도 해괴한 입시 미술·입시 음악·입시 체육을 준비하는 제자들의 삶은 척박해져만 간다. 이를 지켜보는 교사의 아픔은 실상을 어찌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기인한다. 언제까지 그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한단 말인가! 제자들에게 유럽의 몇몇 국가는 입시 교육을 따로 받지 않아도 대학에 들어가는 데 지장이 없으며, 대신 인문학적 소양과 상상력을 헤아린다며 유학을 귀띔하는 교사의 심정은 쓸하다. 김구는 신랄하게 지적했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 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 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교육이다.’ 예술·기술교육은 개별적으로는 삶의 의미와 방향을, 사회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얼굴을 닮은 대안 사회로의 진화를 견인하는 철학의 기초와 방향타 구실을 해야 온전해지지 않을까? 나는 삶의 기술과 관련하여 최근 널리 쓰이는 적정기술이나 적당기술, 혹은 전환기술이라는 용어 대신 ‘생활기술’ 이란 개념을 굳이 사용해오고 있다. 누구에게나 생활하는 데 필요한 기술로 삶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슈마허는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 민중 스스로 제어 가능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값싸고 노동 집약적인 적정기술이 있다면 첨단 기술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삶의 주체가 되어 자급자족을 위한 생활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 하는 단순 소비자로서, 먹고 즐길 줄 만 아는 돼지와 같은 존재 — 돼지에 겐 미안한 표현이다 — 로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현대인에겐 생뚱 맞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기계 문명과 자본의 탁류로 말미암아 사라져 버린 인간 본래의, 만들고 창조하고 표현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는 경 험은 누구에게나, 청소년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뜨개질을 하는 학생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물레에서 실을 잣는 할머니의 손짓에서 우러나는 고요함, 빵 굽는 엄마의 안온한 뒷모습, 땅을 파서 씨를 뿌리는 농부의 그을린 얼굴, 나무를 다듬는 목수의 진중한 손놀림, 용접 불꽃과 화덕 열기에 비오듯 흐르는 철수의 땀방울은 묘한 감동을 선사한다. 부지런히 손발을 놀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작은 평화를 맛본다. 삶을 위한 기술이란 그런 평온함을 동반하는 마력을 지녔다. ‘손은 마음의 자궁’이란 말도 있다. 신체 부위 로서의 손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몸을 사용했을 때 만끽할 수 있 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평온한 세계로, 정신 못 차리게 빠른 속도를 거부하며 내 손으로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착한 기술의 세계로, 함께 빠져들어가 보자.
삶의 가치를 몸으로 배우는 삶의 기술
‘아이들로 하여금 들일을 하게 하고, 음식을 만들게 하고, 맛보고, 소화시킴으로써 마침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비노바 바베의 신교육운동(나이탈림)의 결론은 지극히 명쾌하다. 이제 공장의 자동 제어 시스템 속에 갇혀 버린 기술이, 돈을 좇는 공허한 시선이, 인터넷 가상 세계를 방황하는 혼이 다시 사람들의 손과 발로 돌아와야 할 때다.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들 사이에 불평등을 조장하는 높은 기술(하이테크)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일궈 냄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등이 이뤄지도록 도와주는 낮은 기술 (로우테크)이 절실하다. 이러한 의미에 서 생활기술이야말로 삶의 가치를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깨닫게 하는 삶의 기술이다. 실재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대신 컴퓨터 앞에서 허구 조작에 전념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노동을 상실한 좀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술의 의미는 넓다. 의식주 자립을 도모하는 역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공존을 위한 대화와 토론 기술, 자연과 벗할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을 도야하는 분야까지, 나아가 우주를 향한 인류의 최첨단 기술도 모두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바탕에 무엇이 깔려 있느냐다. 앞서 말한 철학과 가치의 문제가 결여된 문명화는 인간성의 상실과 기술 만능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다분하다. 이러한 문명화는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완전함과 품위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 단절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우리 인류는 점점 더 의존적이 되면서 유아기로 퇴보하고 있다는 존 저잔의 비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의존적인 병약한 유아로부터 자립적인 건강한 성인이 되는 길로 나서는 성스러운 순례자가 점차 늘어나길 기대한다. 장자는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를 부리는 자가 있고, 기계를 부리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의 마음이 생기고, 가슴속에 기계의 마음이 생기면 정신과 성품이 안정되지 못하고, 정신과 성품이 불안정하면 도가 깃들 곳이 없다(有機械者 必有機事 有機事 者 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 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羞而不爲也).’ 며 기계의 마음機心➍을 극도로 꺼려 했다.
조만간 인간이 자율성을 지닌 기술에 의해 종속되는 본말전도의 날이 올 듯 싶다. 이미 수십 년 전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에이아이(AI)〉, 〈매트릭스〉, 〈터미네이터〉, 요즘 인기인 〈아이언맨〉, 〈허(Her)〉, 〈나의 마더〉, 〈휴먼스(Humans)〉 등의 SF화나 드라마, 그리고 2016년 ‘알파고 대 이세돌’ 대결은 이를 흥미진진하게 예고하고 있다. 어쩌면 제2의 러다이트운동이 일어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인류가 생각의 주인으로서, 인공 지능이 넘보지 못할 인간만의 고유한 창조적, 비판적, 영적인 영역을 지켜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➍ ‘기심’은 ‘간교하게 속이거나 책략을 꾸미는 마음’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으로의 초대
우리는 지속 가능한 삶과 세상을 위해 인류의 지혜가 담긴 삶의 기술을 배운다.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본질적 기능이자 삶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애써 생활기술을 습득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문명의 이기에 기대어 나만 옳다고 강변하는 외롭고 피곤한 삶을 떨쳐 내고, 자본과 경쟁의 길로 매진하는 시류에 저항하는 것이다. 자연에 가까운 상호부조의 삶을 살고자 ‘언덕으로 올라가 나를 발견하고, 함께 노래 부르기’ 위함이다. 뜨거운 불 앞에서 홀로 구슬땀을 흘리며 거침없이 망치를 두드리는 대장장 이의 모습은 용맹 정진하는 수행승과 다르지 않다. 언덕 위에 지은 그림 같은 대장간에서 철과 불을 다루듯이 자신을 단련하고, 꼬부라진 호미처럼 땅을 일구며 남에게 이바지하는 질긴 생명력을 키우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불현듯 누군가의 가슴에 잠자고 있는 불꽃이 활활(活活) 타오르도록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 같은 존재가, 불장난에 심취하여 잡념 없이 메질에 골몰하는 어린아이 같은 대장장이가 되고 싶어 진다. 반세기 전 이반 일리치는 속도가 지배하는 인류 문명에 대해 공생공락(convivality)의 3가지 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시, 도서관, 자전거를 향유하는 ‘뒤늦게 생각하는 자’인 에피메테우스적인 인간의 부활을 꿈꾸며, 헤파이스토스의 기술을 배우지 못한 채 만물의 장이라는 오만으로 불과 도구를 다루다가 끝내 생태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인간을 경계한다. 밥상 위에 올라온 요리된 물고기를 먹기보다는 물고기를 요리하 는 법을 배우기를, 그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법을 배우기를, 아니 욕심 같아서는 물고기가 노니는 저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 본다. 일찍이 간디는 ‘품위 있게 생활하는 기술을 배웠을 때만 삶의 모든 은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삶의 기술은 인간의 본질을 향한 근원적인 그리움, 우주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 혼자 앞서가지 않고 인간 및 자연의 모든 벗들과 함께 진동하는 기쁨, 그리고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과 손발에 그 뿌리가 닿아 있기에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현실의 행복한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는다. ■
대장간 알쓸신잡
대장 기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교육원
문화재수리기능인 양성과정(충남 부여군)
산마을고등학교 대장간(인천 강화군) 보은대장간(충북 보은군)
꼼지락 적정기술협동조합 대장간(충남 예산군)
청년자립학교 아랑곳 내가대장간(충남 금산군)
방문을 권하는 대장간
숲속의 대장간(경기 포천시)
형제대장간(서울 은평구 수색동)
늘봄대장간(강원 횡성군)
주대장간(경북 주시)
삼화대장간(충북 충주시)
한일대장간(전북 전주시)
대원철공소(경기 용인시)
참고 사이트
뉴잉랜드철공학교 www.newenglandschoolofmetalwork.com
북미예술대장장이협회 www.abana.org
브로컨햄머대장간 www.brokenhammerforge.com
애로우헤드대장간학교 www.arrowhead-forge.com
참고 유튜브
Alec Steele
John C. Campb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