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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4일 일요일 백두대간 26 회차 윤지미산
자유인 산악회
윤지미산 : 백두대간 26회차 : 개머리재 – 지기재 – 신의터재 – 윤지미산 – 화령
산행거리 : 약 20 km 산행시간 : 약 7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401982
거리 20.6 km
소요 시간 7h 23m 19s
이동 시간 6h 41m 54s
휴식 시간 41m 25s
평균 속도 3.1 km/h
최고점 551 m
총 획득고도 508 m
난이도 쉬움
백두대간 (白頭大幹) 26 – 윤지미산
양산박
뜻도 없고 조망도 없는 그저
너른 들판에 솟아난 산봉우리
어찌 그 이름 난해하고나
윤집걸중 (允執乞中)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다 안다는 말이라지만
역시 그 뜻을 헤아릴 수 없고나
옛날에는 소머리산이라 불렀다는데
오히려 그 이름 더욱 친근타
이 참에 나도 소머리산이라 불러 보려네
산행 들머리인 개머리재에서 추발에 앞서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아직 2월이지만 유난히 따뜻했던 겨울의 흔적마저 말끔하게 지워져 버리고 경칩을 한 주 앞둔 대간길에는 벌써 봄냄새가 코를 간지른다. 겨우내 입고 다니던 내복도 벗어 던지고 두 겹 옷 속에서 작은 움짐임에도 땀이 배어 나온다. 상주 팔음산 포도밭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이 말끔하게 가지치기를 마치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한다. 여차 하면 봄꽃이 땅을 밀고 고개를 내밀 듯 계절은 이제 되돌릴 수 없을 만치 봄의 문턱을 넘어서 버렸다.
거진 한 달만에 나서는 대간길이다. 회원들 모두 한 살씩 더 자셨는데도 겉으로 보는 모습은 작년과 다름없다. 9시 30분 쯤 지난 번 백학산 구간 날머리였던 개머리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김천 황악산과 눌의산을 지나 추풍령에서부터 낮게 엎드린 대간길이 속리산에서 다시 고개를 들기 전 제일 낮게 펼쳐진 구릉지대다. 농로와 임도를 빗겨가며 나무숲사이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마치 동네 뒷산처럼 친근하다.
포도밭 - 전지작업을 마친 포도덩굴
이 지역을 중화지구라고 부른다. 저 옛날 백제와 신라가 지배권을 차지하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 왜구들은 이곳을 지나 한양으로 넘어가려 하고 의병들은 그런 왜구를 막으려고 목숨걸고 싸우던 곳이다. 낮은 고개가 만만해 보이지만 엄연한 백두대간이다. 빼앗기 쉬워 보이지만 목숨걸고 지켜야 했던 중원이다. 1950년 한국전쟁때는 북에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맞서 낙동강 아래로 밀리지 않으려는 국군이 목숨 바쳐 사수한 중원지대이다.
중화지구의 대간길은 낮게 이어지면서 오솔길처럼 포근하다.
이 곳 대간길에 굴피나무가 많이 보인다.
물박달나무
대간길은 가끔 경작지와 마을을 넘나든다
지기재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分水嶺)이다.
그 피비린내 나던 중화지구 대간길에는 그 옛날의 흔적이 돌비석에 새겨져 있다. 신의터재가 그렇고 화령이 또 그렇다. 지금은 잠시 얻은 평화의 시대, 우리 대간꾼들은 저 먼 옛날 아비규환속의 절규소리도, 가까이 귀청을 찟어 버릴 듯한 총탄소리도 까맣게 잊었다. 낮은 산 상주를 지나는 대간길에는 조용한 봄의 교향곡이 울리고 있었다.
지기재 (250 m)
9시 30분 개머리재를 떠난 지 두 시간만인 10 시 30분 지기재에 닿는다. 901번 지방도로가 대간길을 가로지른다. 고도는 해발 250 미터, 주변에는 포도농장과 인삼밭이다. 옛날 이 고개에 산적이 많이 출몰하여 적기재(賊起峙)라 부르던 것이 차츰 변하여 지기재가 되었다지만 지금은 백두대간 이정표가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그저 밋밋한 도로일 뿐, 이 곳이 고개라는, 그것도 험악한 산적이 들끓던 고개였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런 산나그네의 마음을 알아 차린 듯 커다란 팻말에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임을 표시해 놓았다.
대간길은 너무 낮게 엎드린 나머지 산인지 들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듯 인삼 밭을 지나고 과수원을 빗겨간다. 가끔씩 마을로 내려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달리고 벌거벗은 붉은 황톳길을 걷는다. 태산준령을 꿈꾸고 왔던 대간꾼들은 이런 낯선 풍경에 당황해 한다. 아직 겨울 흔적이 묻어 있는 질퍽거리는 산길을 걸으면서 한 번만이라도 시원한 조망이 터주기를 바라지만 조밀하게 자라는 참나무 숲에서는 앙상한 가지사이로 푸른 하늘만 올려다 보인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그리고 왼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을 거쳐 서해로 빠진다는 백두대간의 개념만 머릿속에 담아둔 채 앞사람의 자취가 산모퉁이로 사라지기 전에 따라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무념무상 그저 걷고 또 걷는다. 지기재를 떠나 마을로 잠시 내려섰던 대간길은 다시 작은 숲속으로 이어지고 능선에 닿자 처음으로 조망이 트인다. 다른 산에는 그 흔하디 흔한 바위들이 이번 구간에는 찾아 보기 힘든데 모처럼 널찍한 바위가 등짝을 내보이고 있어 잠시 굽이치는 산줄기를 보여준다.
복사꽃이 피는 3월에 이 길을 걸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잠시 대간길을 벗어나 마을 농로를 지나고 다시 속살을 드러내는 황톳길로 올라선다.
이번 구간에는 유난히 무덤이 많이 보인다.
대간길 구간에서 단 한 번 트인 조망
호젓한 산길을 걸어
12시 임박하여 신의터재에 도착한다.
신의터재 ( 280 m )
산이 낮고 마을에서 가까운 때문인지 이번 산행구간에는 다른 곳에 비해 무덤이 많이 보인다. 태어날 때부터 산을 가까이 하면서 인생의 우여곡절을 산과 함께 보내다가 죽어서도 산에 묻힌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명당자리를 찾아 묘를 썼으나 시류의 변화를 반영하는 듯 무덤의 양상도 많이 다르다. 이미 후손들의 발길이 끊긴지 수 십년은 된 듯 희미하게 봉분의 흔적은 남아 있으나 그 위에 자라난 나무들이 무성한 무덤도 있고, 비석과 묘지석을 잘 갖추고 관리도 잘 된 무덤, 잔디가 자라지 않아 가는잎그늘사초로 대신한 무덤 그리고 요즘 유행하듯이 가족 납골당에 모셔간 듯 이장한 자리에 나무를 심어 놓은 곳도 많이 보인다. 과연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장례문화가 바뀌게 될 지 자못 궁금해진다.
신의터재 백두대간 표지석
점심삼매경에 빠진 대원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의사 김준신 유적비
지기재를 출발한 지 1 시간 반 그리고 들머리인 개머리재에서 두 시간 반만에 이번 산행구간의 중간 지점인 신의터재에 도착했다. 미리 도착한 선두팀은 벌써 ‘신의터정’ 주변에 자리를 잡고 점심 삼매경이다. 시간이 정오가 되었으니 배가 조금 고파오던 터라 우리도 자리를 잡자 마자 삼매경에 빠져든다.
이름도 난해한 ‘신의터재’의 내역은 이러하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렀다 한다. 형제의 난으로 왕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이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악몽에 시달린 나머지 속리산 법주사에서 불공을 드린 후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면서 새로 은혜를 입었다는 의미로 그가 지나갔던 고개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이후 임진왜란 때 이 곳 상주목에 속하는 화동면 판곡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청도 김씨 문중의 절곡(節谷) 김준신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이후 그의 행실을 높이 사 신의티 또는 신의터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그러한 충절의 의미를 퇴색시키기 위해 이 고개가 속한 마을 이름인 어산리의 이름을 따 어산재라고 고쳐불렀으며 근래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시민의 뜻을 모아 정부에 탄원하여 원래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내력이다. 참 복잡한 사연을 품고 있는 고개다.
백두대간을 연결하는 이 고갯마루에는 의사 김준신의 신의(信義)를 기리는 유적비와 산악회에서 세운 비석과 지자체에서 만들어 놓은 백두대간 표시석과 정자 등이 가득 차 있다. 원래의 이름에서 자꾸만 더 멋진 의미를 담아 내려고 애쓰다 보니 오히려 억지스러운 느낌을 주는 듯하다.
무지개산 (441.4 m)
점심을 먹고 나니 몸이 무겁다. 신의터재까지 계속 완만한 내리막이던 산길이 서서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래도 다른 대간길에 비하면 가벼운 산책길이다. 능선길에 부는 바람이 한 달 전만 해도 차가와 몸을 움추리게 했었는데 이제는 봄기운에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산에서 제일 먼저 봄소식을 전해주는 생강나무도 꽃봉오리를 맘껏 부풀린 채 언제든 터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추풍령을 지나면서 낮으막한 산에 자라는 노간주나무가 자주 보인다. 키도 사람 서너 배는 됨직하고 어른 팔뚝보다 더 굵은 것이 수령도 꽤 많아 보인다. 이미 고목이 된 것도 있고 그 곁에서 새로 움트는 것도 있다. 빽빽하게 자라는 참나무 사이에서 어렵게 잡은 터를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산을 오르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윤지미산이 어렴풋이 보인다. 거리상으로 굉장히 멀어 보이는 산도 마냥 걷다 보면 어느새 발밑에 놓여지곤 한다. 이것도 분명 등산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마력이리라. 얼마쯤 걸어가자 무지개산으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백두대간에서는 벗어 났지만 주변에서는 그나마 높은 산으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는 산이다. 왕복 400 미터 남짓한 곳에 있어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산이다. 특히 무지개산이라는 그 이름이 환상을 불러 일으키지만 막상 무지개산에는 여느산봉울와 마찬가지로 잡목이 우거진 볼 품없는 산이다. 이 산 아래 계곡에 있는 폭포 이름을 따서 산이름을 지었다 한다.
늦게 도착하여 늦게 점심을 먹고 또 그 만큼 늦게 줄발하는 별동대
길가에 크고 작은 노간주나무가 많이 보인다. 나무와 열매를 약재로 쓰고 옛날 소의 코뚜레를 만들기도 했던 나무다.
나무 무성한 숲길을 걸어
무지개산 삼거리에 배낭을 내려두고
무지개도 없는 무지개산에 다녀온다. 이 산 아래 계곡에 있는 폭포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윤지미산 (538 m)
지명(地名)은 점입가경 점점 더 난해해지고 신비스러운 지명에 비해 덧없이 볼품없는 상황이라 마음만 혼란하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해진다. 무지개산 삼거리를 지나 산길은 제법 킾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작은 내리막 이후에는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 이어진다. 가파르지 않더라도 산행거리가 길면 힘들기 마련이다. 대원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쉬는 횟수가 많아진다.
왼쪽으로 나무사이로 판곡저수지가 눈에 들어오고 갑자기 오르막 경사가 급해진다. 그리고 안부에 올라서서 조금 걸어가니 마침내 이번 산행의 대표산인 윤지미산이 나타난다. 윤지미 – 어느 산행기를 읽어봐도 이렇다 할 만큼 설명이 없다. 영화배우 김지미 씨를 연상시키는 이 이상한 이름의 유래를 찾아 보니 궁색한 설명뿐이다. 중국의 고전(古典)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윤집걸중(允執乞中)에서 따온 이름이라는데 그 뜻을 보면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어떤 이는 상주시청에 직접 전화를 걸어 ‘윤지미’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보았으나 아는 이가 없더라고 썼다. 황학산을 지나 추풍령에 닿기 진에 있는 ‘눌의산’만큼이나 산이름이 난해하다.
예전에는 이 산을 소머리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대부분 짐승이름을 딴 산이름은 산 모양이 그 동물의 특정 부위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게 맞거나 그르거나 그냥 고개를 끄덕 끄덕하고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깊은 철학이 들어 있는 듯한 이 ‘윤지미산’이라는 이름은 내 머릿속에 숙제로 남겨둔다.
봄은 생강나무 가지끝에 매달려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무숲길 - 원래 하얀 눈이 쌓인 길을 상상했었는데 올 겨울은 눈이 귀해 봄의 교향곡을 들으며 걷는다.
이름도 뜻도 생소한 윤지미산 - 윤집걸중 (允執乞中)은 모든 것을 품는다 또는 모든 걸 다 안다는 뜻이라고 한다.
윤지미산 가파른 길을 내려와 올려다 본다.
화령 (火嶺 320 m)
늘 그렇듯이 산행구간중 대표적인 산이 대부분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산을 지나고 나면 산행을 다 마친 기분이다. 회원들 힘들어 하던 얼굴에 금새 희색이 돌더니 어느 새 하나 둘 앞서 출발하고 몇 명 안되는 별동대원들 말고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윤지미산을 지나고는 아주 가파른 내리막길이 짧에 이어진다. 산길은 다시 밭과 과수원을 지나고 가까운 축사에서 바람에 섞여 오는 퇴비냄새가 속세가 가까워짐을 알려준다. 인삼밭 너머 마을 뒷산위로 제법 길어진 해가 걸려 있다.
윤지미산 아래 터널을 지나던 당진-영덕간 고속도로가 터널을 나와 굉음을 질러대며 내닫는다. 대간길이 아직도 중화지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우쳐준다. 대간길은 곧 작은 숲길을 지나 25번 지방도로 내려서면서 개머리재에서 화령까지 약 20 km 긴 구간이 끝났다.
화령(火嶺)이라는 고개 이름은 지금 상주시 화서면(化西面)의 옛이름인 화령현(化寧縣)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화령(化嶺)이라 불렀으나, 저 멀리 삼국시대부터 임진왜란 그리고 가까이는 한국전쟁까지 치열한 싸움이 그치지 않았던 점을 이름에 담아 불화(火)를 넣어서 붙여진 것이다. 어느 고개인들 그런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마는 이 곳 상주지역은 전력의 요충지로서 다른 데에 비해 각축전이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후 4시 50분 산행을 마치고 화령정 누각에 올라 뒷풀이를 하고 단체사진을 남기고 6시에 화령을 출발하였다.
어느 고인의 안식처인지. 노간주나무 두그루가 비석처럼 서 있고 멀리 윤지미산이 올려다 보인다.
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를 만나고
오후 5시가 좀 못되어 화령재에서 산행을 마무리한다.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화령현(化寧峴)에서 불붙는 화령재(火嶺재)로 이름마저 바뀌어진 고개에도
꽃다지 예쁜 꽃을 피우며 봄이 다가온다.
한 시간여 뒤풀이를 하고 기울어지는 해를 보면서 하루 여정을 마무리한다.
에필로그
요즘 유튜브로 꽤 의미있는 강의를 들을 수 있어 좋다. 카이스트 대학에서 뇌(腦)과학자로 유명한 김대식 교수의 강연이 무척 흥미롭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요즘 알파고 또는 제로고로 대변되는 인공지능(IA)이 큰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 추세로 가면 머지 않은 장래에 즉 2030년 내지 2050년 정도만 되면 기계가 기계를 설계해서 제조하는 로봇 만능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언어의 통번역은 물론 수학이나 과학적인 분야는 더 이상 인간의 경쟁상대가 아니고 지금 인간이 하고 있는 직업의 거의 50 %는 기계가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져 아주 극소수의 부자가 자산 전체를 다 차지하게 될 것이며 직업이 없고 재능도 없는 다수의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김대식 교수의 강의가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계에 관한 내용이 아니고 인간의 뇌에 관한 것이다. 두개골이라는 뼛속 암흑속에 갇혀 있는 1.5 kg 의 고기덩어리가 뇌라는 것인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듯이 이 고기덩어리는 실제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다만 눈과 귀, 코, 입과 피부 등 감각기관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어떤 장치를 통해 분석하고 걸러내고 저장하는 기능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 구병산이 보이는 속리산 휴게소에서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가 거리를 걸으면서 눈과 귀 등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엄청난 정보 중에서 꼭 필요한 것만 압축파일 형태로 저장하고 나중에 그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압축파일을 바탕으로 다시 해석하고 그 상황에 맞게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뇌의 특정부위(해마)는 기억력을 관장하고 또 다른 부위는 성격을 또 어떤 부위는 운동을 관장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성격은 그 사람의 고귀함이나 천박함 때문이 아니라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뇌라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보다 훨씬 더 복잡하지만 그의 이론에 따르면 개인의 자존감이나 예술적인 재능이나 기능 등은 뇌의 작용에 의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월 27일 한국에서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같은 날 베트남 하노이에서는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 한반도에 봄이 오는가?
앞으로 치매나 파킨슨씨 병 등은 뇌에 전기자극을 줌으로써 치료가 가능하게 된다는 좋은 소식이 있는 반면 인간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인간의 생각까지 조종하는 등 끔찍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첫댓글 ㅎ새싹이나 꽃망울은 아직 이른가요~
이제 곧 봄이 옵니다. 확실하게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