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길 : 반월산성길 (경흥대로를 조망하며 걷는길)
경흥길 5길은 반월산성길이다. 창성산 정상에 자리한 반월산성은 백제가 맨 처음 성을 쌓고 신라, 고구려가 차지한데 이어 오늘날에는 철조망에 가로 막혀 갈 수 없는 철원의 궁예 도성을 방어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산성이다.
한때는 후삼국의 가장 강성한 국가였던 태봉국을 창건하고 중원을 토벌고자 했던 웅대한 뜻을 지녔지만 민심을 잃어 왕건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미복으로 갈아 입고 산골로 달아나다 허기가 심해 보리 이삭을 몰래 훔쳐 먹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비운의 임금 궁예의 한을 반월 산성에서 느껴 볼 수 있을까 ?
경기옛길 안내서에는 “반월산성은 경흥대로와 수직으로 놓여 있어 대로를 따라 이동하는 적의 경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리적인 강점이 있습니다. 반월산성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경흥대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경흥대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화 유적입니다.
특히 창성문화공원, 포천향교, 구읍리 석불임상등과 둘레길로 연결되어 살아 있는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라고 소개 하고 있다. 두발로 역사의 향기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걷기 문화가 아니던가 ? 설레이는 마음으로 반월성길을 걸어간다.
포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보도를 따라 구 한내 사거리에 이르니 오늘의 종착지인 신북면 행정복지 센타 10.3km를 알리는 표지판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오른쪽 방향으로 진행하라고 손짖한다.
한내천이 흐르는 한내교를 건너니 가야할 창성산이 우뚝 머리를 내밀었다. 가만 있어도 땀이 나는 여름에 창성산을 바라보며 걸어가 공원 정문에 이르는데 15분이 채 걸리 않은 짧은 거리였지만 땀이 몸에 배인다.
여름이라 덥겠지! 라고 출발 시점에는 대수롭지 않은 더위로 여기지만 종착지까지 그대로 지켜낼 수 있을까 ? 스스로를 채찍하며 공원 안으로 진입하니 충혼탑과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언제가 그랬던 것처럼 순국 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고 소녀상을 바라다 본다. 지은 죄를 참회한다고 용서가 될 수 있을까 ? 그러나 참회를 하지 않으면 그 죄는 세세생생 용서 받지 못할 죄로 역사에 그 오명을 남길 것이다.
“ 역사를 잊은자에게 내일은 없다” 고 적힌 문구를 가슴에 새기고 산성에 오르는데 구한말의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에 대한 일화를 들려준다. 면암 선생은 단발령을 반대하면서 “이 목을 자를 수는 있으나 이 머리는 자를 수 없다” 고 꾸짖으며 굽힐 수 없는 선비로서의 지조를 만세에 드날리었다.”
반월성을 오르면서 헐떡이는 그 가뿐 숨을 면암 선생에 대한 기개에 집중하니 오르막도 평지가 되었다. 포천 탄생 600년 타임 캡술탑을 지나며 야자 매트 길이 흙길로 바뀌었다.
무성한 나무들로 그늘을 이루고 새소리 정답게 들려와 잠시 흘린 땀을 씻어 준다. 다소 가파른 오르막을 타고 성내에 들어서니 산상의 평원에 벌개미취 꽃들이 밭을 이루었다. 아름다웠다.
저 꽃처럼 나도 남들에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비춰질 수있을까 ? 비유할 곳에 비유하여야지 아무리 생각이 자유라고 하지만 되지도 하지 않을 이야기를 가끔은 자신을 반추하여 비유하고 있으니 언제 제 정신을 차릴까?
벌개미취 꽃으로 장식한 성내를 걸어가는데 꽃밭 건너편에 4개의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삼국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산성을 복원된 내용이다. 산성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有備無患 정신의 극치를 보여 주는 자랑스런 문화재로 남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서민들의 울분과 고통이 베여 있어 산성에 오를때면 항시 가슴이 먹먹함을 느낀다.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지에 이르렀다. 전운이 사라진 산성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어 조망하기 참으로 좋은 장소엿지만 미세먼지로 인한 흐린 날씨속에 조망을 즐길 수없었다. 그러나 정면으로 마주하고 솟아있는 천주산은 채석장으로 깍여지고 파헤치어 흉물스러웠다.
성길을 따라 진행하는데 힘차게 뻗어나간 한북정맥의 산줄기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운악산과 수원산은 群鷄一鶴으로 솟았고 이름 모를 산들이 서로서로 어깨를 마주하며 뻗어내린 힘찬 기세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진행하다 가는 길을 이탈 하였다.
되돌아가 건물지에 이르니 표지기가 펄럭인다. 경흥길은 건물지에서 우측으로하산하는 길이었다. 남쪽 성곽의 길을 따라 내려서니 300년된 보호수가 있고 남문, 동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세워진 지점에서 경흥길은 군내 면사무소 방향으로 내려서며 반월성과 헤어졌다.
흙길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변한게 아쉬웠지만 포천 향교로 향하면서 또다시 숲길로 진입하였다. 청성산 둘레길을 따라 걸어가 포천향교에 이르렀다. 향교는 고려, 조선시대의 국립 교육기관이었기에 반드시 찾아 보아야 할 곳이었자만 굳게 문이 닫혀있어 방문을 할 수없었다.
한때는 우리 나라를 가리켜 동방 예의 지국임을 일컬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 도의가 상실되었다. 옛 전통의 좋은 점은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삶의 지표라면 향교는 오늘날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으로 되살아 나야 한다.
향교는 더 이상 옛 유물로 박물관에 보관되어질 수는 없다. 어느 지방을 가나 대부분 향교의 외삼문은 잠겨있는데 이것은 문화재로서 보호에만 급급한 행위로 향교의 본래의 목적인 교육기관으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물론 에전과 지금의 교육방식이 다르지만 溫故知新을 할 수 없는 것일까, 향교의 문이 잠겨있다면 도의는 어떻게 진작시킬 수가 있을 것인가 ?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배낭을 내렸다. 오늘도 변함없이 단호박 세쪽, 두유 1병. 찐계란 2개, 복숭아, 토마토, 수박이 점심의 메뉴이다. 쌀밥을 싸오지 않은 것은 아내의 따뜻한 배려로 인해 따뜻한 밥만을 먹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관아, 향교등 관청이 있었던 포천의 행정 중심지에서 군청이 현재의 포천시로 옮겨지고 이곳은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의 조그만 시골 지역으로 쇠퇴한 사유가 궁금하였다..
경부선을 타고 가다보면 철도역이 개설되고 새롭게 번창한 도시를 볼 수있다. 평택, 금촌, 문산, 일산은 경의선 철도가 놓이고 부터 급격히 발전되었고 파주, 진위, 벽제는 행정 중심지에서 한적한 도시로 전락되었다.
일제는 경부선, 경의선을 개설하면서 우리의 관아가 있었던 지역으로 철도역을 개설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은 작은 마을에 철도역을 개설하여 도시가 시골이 되고 시골이 도시가 되게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포천은 철도역이 없어 다른 이유가 분명있을 텐데 .....의구심만 가득안고 구읍리 석불입상에 이르렀다. 화강암의 석불 입상은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이라고 하였는데 얼굴어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 있었다.
아마도 자식을 염원하는 바램에서 얼굴의 이곳저곳을 떼어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많은 상처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서서 오가는 사람들의 경배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어떻게 헤아릴 수가있겠는가 ?
언제 끝날지 모르던 청성산 둘레길에서 약수터 앞 삼거리에 이르니 신북 행정복지센타 5.5km를 알린다. 둘레길과 헤어져 좌측으로 진행하였다. 아쉬웠다. 둘레길을 다 마치고 걸어도 좋으련만 둘레길과 정들자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지 않을 수없기에 아쉬움을 달래며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또다시 걸어간다. 반월성 둘레길과 헤어지며 흙길에서 마을길인 아스팔트의 길을 따라 도로인 반월성로에 이르렀다.
아무리 ‘ 여름이라 더운 것은 필연’이라고 하지만 한낮의 땡볕 더위속에 아스팔트 길은 고난의 행군이다. 경흥길을 걷는다는 자부심으로 억누르며 골말교를 지나 바로 좌측으로 방향으로 바꾸며 포천천을 따라 간다.
이곳에서 신북 행정복지센타까지 4.4km이다. 천변길이 되어 자동차의 운행도 한산하여 걸어가는데 장애물이 되지 않아 다행이었고 비록 직사광선이 내리 쬐일지라도 가랑산, 원수봉의 산등성이가 힘차게 뻗어 힘을 돋구워 주었다.
어디서 솟았는지 힘이 났다. 때마침 바람도 불어오고 물소리도 들린다. 포천천이 졸졸 흐흐고 있다. 걸으면서 지친 듯 할때면 걷는 사람 모두에게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43번 국도에 이르렀다.
포천. 세종 고속도로의 굴다리를 지나 좌측으로 방향을 바꾼다. 외길의 한적한 논길같은 길을 따라 43번 국도상의 구 신북대교앞 교차로에 이르렀다. 이곳에 K, mart가 있다.
이곳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43번 국도의 로견을 50m정도 진행하여 좌측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행정복지 센타 2.5km를 알리는 이정표가 부착되어 있다. 경흥길은 경흥대로의 원형 노선은 43번 국도를 걸어갈 수없기에 포천천으로 우회토록하여 걸어갈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천 현대 자동차 공업사에 이르러 또다시 43번 국도길로 진행하지 않고 포천천을 이용하여 진행토록 길을 유도하는데 표지기를 발견하고도 진행 방향을 찾는데 다소 유의를 하여야 했다.
표지기를 따라 로견으로 진행하는데 전봇대에 표지기가 부착되어 있지만 가는 길이 없다. 하는 수없이 전봇대에 부착된 표지기 방향데로 업무중인 공업사 마당을 지나가니 그 끝에 포천천 둑방길이 있었다.
한적한 길을 따라 서로 사랑하자는 예사랑 교히를 지나 또다시 43번 국도에 이르니 자동차 통행이 많은 번잡한 도로가에 오늘의 종착지인 신북면 행정복지 센타가 있었다.
걍흥길은 경흥대로인 직선길인 43국도를 인근의 산길과 물길로 우회하여 걸어가도록 조성하여 편하게 걸어갈 수있는 길인데 직선인 도로로 가는길을 속칭 뺑뺑이 돌리고 있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교통의 발달로 없어지고 파괴된 길, 그리고 자동차 통행이 많은 도로를 위험을 감수하며 걸어갈 수는 없다. 과거의 길을 현대의 문명에 맞게 자연 친화적인 길로 새롭게 정비하여 조성하는 것은 시대의 요구가 아닐까 ?
● 일자 : 2022년 8월5일 금요일 맑음
● 동행 : 나홀로
● 행선지
- 11시00분 : 포천시외버스 터미널
- 11시15분 : 청성 역사공원
- 11시55분 : 장대지
- 12시25분 : 포천 향교
- 12시30분 : 점심
- 13시50분 : 포천, 세종 고속도로 굴다리
- 14시50분 : 신북행정복지센타
● 총거리 및 소요시간
- 거리 : 10.4km
- 시간 : 3시간 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