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한국 감리교회 설립과 첫 신도들
-1885년8월17일, "제1회 한국선교회"의 첫 연례보고서를
중심으로-
노 종 해(CM리서치)
*아펜젤러 선교사가 그린 "한국 선교부 부지"(1885.8.17.편지)-우측:아펜젤러, 좌측:스크랜튼
한국선교사 일행은 1885년 2월 27일에
일본에 도착하였고, 4월5일에는 아펜젤러 부부가 인천에 도착하여 입경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인 불안정 때문에 폴크공사(Mr.
Foulk)의 권고로 아펜젤러 부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어 공부와 선교계획을 수립 준비하였다.
아펜젤러가 일본에
도착하기 전 에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튼(Dr, Rev Wm B. Scranton) 박사가 5월3일 서울에 도착하여 정동에 주택과 대지를 구입하고
나머지 선교사일행이 정착하여 선교사업 하도록 준비했으며, 1885년6월에는 모두 도착하였다.
스크랜튼 박사는 1885년5월
헤론의료선교사의 도착과 함께 독자적인 서민을 위한 선교병원을 자신의 집에서 6월 말부터 시작하였으며, 1885년7월29일 아펜젤러는 정동에
주택과 대지를 구입하고 자신의 집, 한 방을 “지성소”(Sanctuary)로 구별하여 성소인 “예배실”(Chapel)로 복음선교를 준비하였다.(참조: The Korea Methodist 1권1호, 1904)
1885년8월17일에는 “제1회 한국선교회“가 아펜젤러를 회장으로 모였는데, 이 때 첫 선교보고서가 작성되었다.
또한 해외
여선교회(W.F.M.C)의 파송을 받은 스크랜튼 여사(M.F. Scranton)도 여선교회사업을 위한 선교기지를 매입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여,
1885년10월23알에는 19채의 한옥과 대지 6,200여 평을 매입하여 한국선교부는 힘찬 복음선교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여기서는 1885년의 첫 연례보고서와 1885년 말경 여선교회의 스크랜튼(M.F. Scranton)의 여선교회연례
보고서에 나타난 최초 주일 집회와 한국교인들의 형성을 살펴보려 한다.
1. 제1회 한국선교회(1885년
8월 17일)
*한국 감리교회 선교부 서쪽방향(1885년)
18885년8월17일 제1회 한국선교회 연례보고서(Annual
Report)에서 아펜젤러는 한국인 두 학생을 받은 보고를 하고 있다. 즉, 의사가 되기 원하는 한국인 두 사람이 스크랜튼(Dr, Wm.B.
Scranton)을 찾아왔었는데, 스크랜튼은 이들이 의학서적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여, 스크랜튼의 병원에 머물면서
아펜젤러에게 영어 가르침 받도록 의뢰하였다. 이 일이 1885년8월3일이며, 두 학생은 이겸나, 고영필 이였다.(아펜젤러
일기)
아펜젤러는 이어서 이 두학생 이외에 최초로 등록된 세명의 한국인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즉,
“사업(선교)은 우리가 착수하기보다도 더 빠르게 개시되었다. 스크랜튼 박사는 이미 개인적으로 돌보는 환자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집에서
시약소와 병원을 분비하며 더 광범위하게 적응하며 확장하려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선교에 충당된 것은 적당한 때에 선교부에
속하기를 원하는 일본에 있는 세명의 한국인을 끌어들인 것이다. 먼 땅에서 우리 선교사들의 파송받은 분야에 등록하여 기록할 수 있게된 것을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우리는 또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에 함께하심을 느끼며, 그들의 앞길이 열려짐을 느낀다. 우리는 그들이
백성들에게서부터 부당한 선입견에서 벗어나게 될 줄 믿으며, 크게 유익하도록 이끌 분임을 믿는다. 교회는 그들과 그들의 일을 위해 열심히, 계속
기도로 우리와 함께 하나 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감리교회에 등록된 첫 세명의 한국인에 대한 보고를 볼 수
있다. 이들은 당시 개화파의 일원으로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는 지도자급 인사들이며 학식과 교양을 구비한 분임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는 인족구국의 과제에 문을 열어 받아들이며 적극 보호하고 기도해 주어 사회정의를 향해 뻗어나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2. 아펜젤러의 복음 전도와 교육선교
아펜젤러는 이러한 익명의 세 한국인 이외에도 9월7일에는 이종운, 오인탁을 받아 영어가르치는 교육선교에 착수하고 있으며, “나는 이들이 예수님
전도도구로 만들기를 주님께 기도 드린다.”고 하여 교육선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아펜젤러 일기)
스크랜튼
박사는 “아펜젤러 목사에 대한 회상”(Reminiscences of the H.G. Appenzeller)“이란 글에서 아펜젤러는 건강하고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있으며, 누구와도 교제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람으로서 무엇보다도 설교하며 전도하기를 좋아했다고
회상하였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태평양의 선상에서도 “1885년2월15일 주일을 맞아 출17:6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소망의 용기를 주는 설교”를 했으며, “그는 설교 본문을 선택하는데도 적극적이며 위로의 약속과 안정을 주는 말씀을 택한다“고 하였다. 또한
2월17일 요꼬하마에 도착하여서도 그는 선교사 일행을 그의 선실 방으로 안내해 ”안전한 여행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앞으로도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회상하였다.
뿐만아니라 아펜젤러는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인 가옥을 구입하고는 그의 내실한 방을 정결하고 새롭게
준비하여서 “우리의 첫 한국인 지성소”(first Korean Sanctuary)로써 구별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한국인 기독교회로 연결된 첫
거룩한 교제가 이루어진 곳이다”고 지적하였다.(이상, The Korea Methodist, 1권1호. 1904)
정동교회는
바로 이러한 아펜젤러의 내실, “지성소”(Sanctuary)에서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우국지사인 익명의 세 한국인과 후에 배재학당이 된 최초
학생들로 조직되고 설립되었다.
3. 스크랜튼 가(家)의 의료선교와
여성선교
또 한편으로는 스크랜튼 박사의 병원을 통해 가장 빈천한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돌봐주는 의료선교활동을 통해 전도되었고, 스크랜튼과 아펜젤러를 돕는 종사자들과 그 가족들이 최초 교인이 되었다.
해외여선교회선교부(W.F.M.S)의 스크랜튼 여사는 여선교회 첫 보고서(1885년)에서 그녀는 아들 집에서 여성전도에 힘썼으며,
1885년10월23일에 매입한 가옥 중에서 집회하기 좋은 고을 택하여 “선교사 연합예배”(Union Church)도 모였고, 자신의 여성집회도 준비하고 있음을 보고서에서
보여 주고 있다.
1885년10월11일에는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Rev, H. Loomis) 목사도 참석한 한국선교사들의
첫 성례식도 있었다. 이를 기념하여 1895년10월9일부터 “한국개신교선교를 기초한 10주년 기념식”을 드리기도 했다.(The Korean
Repository. 1895.10.)
1885년 스크랜튼 여사의 연례보고서(Annual Report)를 보면, 8월에
스크랜튼 여사(Mrs, Scranton)는 미국 공사관과 장로교선교부가 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를 구입하고 인접대지에는 집회하기 좋은 집이
있다“고 했으며, 이때 스크래튼 여사는 그녀를 도와 종사하는 부인들을 얻었다. 10월23일에는 그 인접대지와 가옥을 매입하는 계약이
이루어졌다.
“나는 계약서에 싸인 하며 찬양했다. 해외여선교회에서도 이제 한국에서 정당하게 선교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내지선교와 학교, 시약소가 같이 일하도록 했고, 교회를 위한 건물도 세워지길 희망한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시간마다 나의
아버지께서 아무 실수 없도록 간구한다.
나는 주일(主日)을 귀하게 여기도록 배워왔다. 모든 주간의 중심으로 지켰다.“고 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첫 성찬예식을 행하였는데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Loomis)씨와 미국 마리온호(Marion)의 선장도 참석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1885년 10월 23일에는 한국감리교회의 선교부 기지와 건물들이 모두 마련되었고, 전도와 봉사와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감리교회는 1885년에 서울 정동에 선교본부를 설치하였고,
정동병원(1885.6월 말)과 학교(1885년 8월3일)를 시작으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구분치 않고 활발히 선교가 시작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선교사 연합교회(Union Church)도 모여 명실공히 한국 감리교회 뿐만아니라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이루었음도 알
수 있다.
4. 맺는말: 1885년도에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과 신앙의 기초를
놓아
첫째, 스크랜튼의 정동병원을 통한 민중과의 만남에서 최초 정동지역의 교인
구성이 이루어졌다. 가장 빈천한 사람에게 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몸소 보여주는 교회였다.
둘째는 아펜젤러의 교육을
통한 진취적이며, 의협심이 강한 청년 지도층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민족구국과 애국신앙을 형성시켰으며 민족과 사회의 신앙적인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하는 교회로 형성케 했다.
셋째는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정동에 대규모 여성선교 기지를 마련하고, 교회와 교육, 여성병원, 시약소 등 준비완료하고 있었다.(1885년10월)
네째는 선교사들의 병원과 학교, 가정에서 도우며 일하는 분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분들 중에서 한국 최초의 김창식목사도 나왔으며, 박에스더의 한국 최초 여의사도 배출되었다. 이들은 한씨, 최씨, 조씨, 강씨 등으로
이분들이 첫 인가귀도된 교인 가정이며 권서인(전도인)이 되었다.
당시 엄격한 내외하는 관습에 의해 여성집회는 스크랜튼의
집에서 모였다. 여성들도 평등하게 대하며 가르쳐서 가정과 사회의 유익한 일꾼이 되게하는 여성해방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킨 교회였고, 민족의
여성지도자들을 배출케한 교회였다.
이러한 한국감리교회의 면모와 특성이 1885년 가을에는 구체적으로 형성되었고, 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rch)
*한국 감리교회 선교부 남쪽방향(18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