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⑬ :
정이철 목사 ‘저절로 성화론’은 ‘다른 복음(이단 지방교회 성화론)’이 아닌가? ③
사계四季 (2018.02.19 23:28)
정이철 <박영돈 교수처럼 성화를 강조해 나오는 것이 성화일까?>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35
※) 본문에서 <저절로 성화론 ①>로 적습니다.
정이철 <율법, 십자가, 성령은 하나의 목적 같은 방향으로 역사한다.>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65
※) 본문에서 <저절로 성화론 ②>로 적습니다.
다음은 ‘박영선 {성화} 조주석 엮음 (서울: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 2013)’ 171쪽~172쪽에서 옮기는 강설입니다.
성화는 내가 가야 하는 길
이는 결단코 내가 가는 싸움이 아닙니다. ‘나’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싸움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직면하는 모든 사건을 대항해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싸우시게 하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성화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제 나는 물러나 앉아 있고 그리스도를 나 대신 내보내는 것’ 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성화를) 신비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봐라. 비행기는 비행기 힘으로 가는 거지, 우리가 뭘 해도 소용없다. 거기서 펄펄 뛸 것이 없이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빠져 있습니다. 성화 문제를 비행기로 비유한 대목에서 믿음이 등장해야 하는 부분이 딱 하나 있습니다. 믿음은 분명히 비행기를 날게 하는 동력은 아닙니다. 그럼 믿음은 어디서 등장합니까? ‘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지점입니다. 모든 성화의 싸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펼쳐놓은 계획과 의도와 약속을 에베소서 1장에서 3장으로 펼쳐 놓으셨습니다.
···(중략)···
‘저는 지금 잠깐 카바레에 들를 일이 있습니다만, 주여 영광을 나타내소서.’1) 이렇게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나 따로 주님 따로 있는데 영광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내가 하나님 자녀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확인케 하시는 방법은 내 인생뿐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하나님 편이며, 하나님께 무릎 꿇은 자이며, 하나님께 항복하고 있는 자라는 것을 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 싸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약도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63빌딩이 눈앞에 보입니다. 63빌딩 그 옆에는 원효대교가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 뒤에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 (확증편향에 따른 허수아비 논법 거짓 증거로 “박영돈은 마귀가 공들여 키워 한국 교회에 박아둔 굵직한 빨대” 같은) 나쁜 말은 입에도 올리지도 말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 끝까지 다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약도에는 설명이 돼 있지만 그 끝이 눈에 안 보이는 법입니다. 약도를 보며 하나씩 직접 찾아가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갈 때마다 내가 올바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걸음씩 하나님 앞으로 다가갈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향기와 평안, 위로와 의미와 보람을 점점 강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교리와 체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리는 약도이며, 체험은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다는 확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구원의 감격이나 성령의 은사는 그것 자체로 성화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는 것도 성화는 아닙니다. 이는 성화를 더 촉진하고 우리가 걷는 길의 영광을 보여줘 우리를 자극하는 것들입니다. 그것 자체가 내 걸음을 대신 걸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런 설명을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옆으로 가고 있으면 와서 바른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어느 누구도 대신 가 주지 않고 하나님도 절대로 우리 대신 걸어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를 악물고 기어가든 굴러가든 내가 가야만 인정받습니다. 내가 가지 않는 것을 꾸중하며 때리실지언정 한 순간도 업어 주시지는 않습니다. 내가 가야 합니다. 내가 일어나, 무서워서 가든지 항복해서 가든지 기뻐서 가든지 상급 때문에 가든지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성화입니다. 체험으로가 아닙니다. 체험은 우리를 자극할 뿐입니다. 이론으로가 아닙니다. 이론은 우리를 방향 잡게 하며 우리가 가는 길을 상상하게 만들 뿐입니다.
기도하며 가만히 있어도(성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빌어도) 저절로 반드시 성화론자 정이철 목사 “(올챙이가 영양분이 있는 물속에 있으면 올챙이는 자동으로 반드시 개구리가 된다. 이와 같이 중생자의 영양분인) 온전한 말씀 선포와 정상적인 예배와 기도가 있으면 자동으로 성령이 역사하셔서 성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빌어도 성화는 반드시 나타나게 돼 있다.”2)는 듣보잡 반론을 염려해 노파심으로 지면을 더 낭비했습니다. 제목이 아닌 본문 안 굵은 글씨는 제가 굵은 글씨로 썼습니다. 배경색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철원 교수님 언약론은 하이퍼 칼빈주의자 헤르만 훅스마 언약론과 닮았는데, 지면을 낭비해 놓고 보니, 극단(하이퍼 칼빈주의) 신비주의자 정이철 목사 “박영선 성화론은 알미니안 이단 사상이다.”는 듣보잡 정죄가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지면을 더 낭비해야겠습니다.
‘1970, 80년대 한국 교회 목사님들 가운데 많은 분이 세대주의 워치만 니 신학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또한 ‘워치만 니 책들이 한국 교회에 널리 퍼지게 된 데는 고故 박윤선 목사님 추천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ㅡ 자신의 이단성은 모르는 듣보잡 정이철 목사는 이 사실만 가지고도 “박윤선은 이단 지방교회가 한국 교회에 파견한 마귀의 스파이다.”며 듣보잡 정죄를 하겠지요.ㅡ
저 역시 고교 2학년 때 그 당시 나온 워치만 니 책 거의 모두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고교 3학년 때 개혁 교회 교리서들이나 개혁 신학자들 여러 책을 읽으면서 워치만 니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2011년 봄에 {양무리 마을}에 가입한 뒤였습니다. {양무리 마을}에서 ‘워치만 니 지방 교회’라는 용어를 알게 됐습니다. 또한 지방 교회가 이단으로 정죄 받았음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예장 백석 라마드 목사님께서 개혁 신학을 공부하기 전 워치만 니 책 거의 모두를 탐독해 워치만 니 신학이나 지방교회 교리에 밝으심’도 알게 됐습니다.
2013년 여름, {개혁주의 마을} ‘구약 성도들에게 임하신 성령의 내주 토론’ 때였습니다. 라마드 목사님께서는 ‘서철원 {성령론}’에서 ‘구약 성도들에게 임하신 성령의 내주를 부정하는 부분’을 읽자마자 단번에 ‘이단 지방교회 워치만 니 성령론과 같음’을 분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토론 때 지방교회 포교와 교리 수호를 위한 인터넷 사역 팀 수장 김바울 님과 하나로 님이 서철원 교수님 구약 성령론을 지지하고 나서자, 제가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일’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ㅡ확증편향이라는 들보에 가린 눈으로, 박영돈 교수님 “성령의 사역”이라는 말을 이단시함으로써 책 {성령의 사역}을 쓰신 스승 서철원 교수님을 도끼질했던 듣보잡 정이철 목사는 이 사실만 가지고도 “서철원은 이단 지방교회를 위해 마귀가 공들여 키워 한국 교회에 박아둔 굵직한 빨대”라는 듣보잡 단죄를 해야만 합니다.ㅡ
지난 2월 7일 밤이었습니다. 라마드 목사님께서 <저절로 성화론 ①, ②>를 읽으시고는 전화를 주셨습니다. “워치만 니 책 {이기는 생명} 가만히 저절로 성화론을 떠올렸어요.”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면을 더 낭비해야겠습니다. 다음은 ‘박영선 {성화}’ 167쪽~169쪽에서 옮기는 강설입니다.
성화를 오해하는 두 가지 까닭
성화란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은사나 선물이 아닙니다.
···(중략)···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약도를 그려 줄 때 언급되지 않은 게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목마를 것인가, 가는 동안에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는 약도에는 없습니다. 실제 가려면 여행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발 찾아야 하고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이전과는 달라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성화를 놓고 ‘약도를 따라 그 길을 (머릿속으로) 추적해 봤기 때문에 거기에 가 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리는 그 지점을 찾아갈 수 있는 안내서이지, 그것 자체가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수송수단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약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셔서 나를 등에 업고 가실 것이라는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전자가 너무 지성주의 경향을 띤다면, 후자는 신비주의 경향을 띱니다. 이 부분에서 대표적으로 실수한 사람이 ‘워치만 니’입니다.
워치만 니 책은 상당히 좋은 게 많습니다. 경건하고 상당한 수준을 가진 책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은혜와 약속을 폭넓게 설명합니다. 성경을 보는 영안이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오해하고 잘못 설명한 것이 성화 단계입니다. 말하자면, 성화도 은사로 받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라.’는 주장이 너무 많이 등장합니다. ‘가만히 있어라. 그러면 주께서 다 하신다.’ 아닙니다. 성화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셨고, 가라고 하시는 길을 내가 가야 하는 그런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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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여”를 굵은 글씨로 쓰고 배경색을 칠한 까닭은, 불교인들이 왕생 길로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주문 외우듯이 “주여! 주여!”나 “오, 예수님! 오, 예수님!”을 주문 외우듯이 선포하는 이단 지방교회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신인합일 길로서 “오, 예수님, 오 예수님!”을 외쳐 선포하면 십자가 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ㅡ양태론ㅡ 내 안에 오셔서 십자가 보혈로 죄의 소욕(오염)을 제거하는 성결, 아사주생我死主生을 이뤄 나와 하나가 되신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자동으로 반드시 오셔서 신인합일을 이루신다.’는 이단 지방교회 위트리스 리 극단 신비주의 임재론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온전한 말씀 선포와 정상적인 예배와 기도가 있으면 자동으로 성령이 역사하셔서 성화는 반드시 나타나게 돼 있다.”는 정이철 목사 ‘성령임재론’,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①]에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성경해석으로 양태론을 주장하기도 했던 정이철 목사 ‘성령임재론’ “기도”라는 단어에서 이단 지방교회 신인합일 ‘극단 신비주의 임재론’, ‘선포로 이루는 마법과 같은 신비주의 임재론’을 떠올린 것은 저와 라마드 목사님뿐일까요?
2) ‘정이철 <저절로 성화론 ①>’에서.
※. 섹시한 무희가 전라로 춤추는 카바레에서 “주님!”만 외치면(선포하면), “주님! 주님 보혈로 제 모든 죄를 사함을 받고 씻음을 받았습니다!”를 선포(고백)하면, ㅡ“칼빈 선생도 깨닫지 못했던 성화론”이라는 서철원 목사님 성화론대로ㅡ 죄의 욕망이 사라질까요? 마음속으로는 ‘나는 이 카바레에 가만히 있을 테니, 나 혼자 힘으로는 이 카바레에게 나갈 수 없는 나를 주님께서 건져내 주실 것이다.’ 생각하며 “주님!”만 외칠 것이 아니라, 죄의 유혹을 깨닫고 “주님!”을 외쳤으면, 죄의 욕망을 깨닫고 “그리스도 보혈로 제 모든 죄를 사함을 받고 씻음을 받았습니다!”고 선포(고백)했으면, 카바레에서 나와야 합니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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