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이이 유적>
파주는 가볼만한 곳이 참 많다. 자연경관도 수려하고 문화재도 많다. 거기다 북한과 붙어있어 정치적 함의마저 남다르다. 그중에서도 이율곡의 여러 유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더 큰 재산같다. 출판단지는 문화적 귀납체 같은 느낌이다.
우리나라 지폐는 네 종류다. 각각 이황, 이이, 세종대왕,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다. 한 집안에 두 사람이 나라를 대표하는 지폐에 들어가 나라의 얼굴이 되었다. 나라의 얼굴 그 현장을 더듬어 본다.
1.얼개
유적 및 문화재, 관련시설 : 자운서원, 사당, 가족묘, 자운서원묘정비, 이이선생 신도비, 이이 신사임당 동상, 율곡기념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입장료 : 1,000원
방문일 : 2021.6.2.수
2. 소개
1) 역사적 변천
사적 제525호. 경기도 파주의 율곡은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의 본가가 있는 곳이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6세 때 본가가 있는 율곡으로 왔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3세부터 29세까지 9번의 과거에서 9번 장원급제를 하였다. 어머니 문상(問喪)기간과 금강산에서 수도한 4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곳에서 학문을 닦았고 관직을 마친 후에도 돌아와 49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거주하였다.
자운서원은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 31년이 되는 1615년(광해군 7)에 세워졌다. 1650년(효종 1)에 국가로부터 ‘자운(紫雲)’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1713년(숙종 39)에는 이이의 후학인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함께 추향(追享)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폐쇄되어 묘정비(廟庭碑: 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비)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들의 기금과 국가지원으로 사당과 강당, 동재, 서재, 협문, 내삼문, 외삼문 등을 갖추게 되었다.
2)내용
파주 이이 유적에는 자운서원(紫雲書院), 이이와 그의 가족묘,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이이선생신도비(李珥先生新道碑), 율곡기념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자운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로, 외삼문인 자운문(紫雲門), 협문(夾門), 동재인 입지재(立志齋), 서재인 수양재(修養齋), 강당인 강인당(講仁堂) 등 교육 공간을 전면에 배치하고, 그 뒤로 삼문(三門)으로 경계를 나눈 후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인 문성사(文成祠)를 배치하였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매년 봄·가을에 제향하고 있다.
2012년에 자운서원 위치 고증을 위한 표본시굴조사 중 문성사 축대 전면에서 창건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대석과 ‘강희이십(칠)년(康熙二十(七)年)’이라는 명문(銘文)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명문의 연호로 보아 1681년(숙종 7)에서 168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자운서원의 위치와 조성시기를 고증할 수 있다.
자운서원의 사당 앞 삼문 왼쪽에 있는 자운서원묘정비는 이이의 덕행을 추모하고 자운서원의 건립 내력을 기록한 화강암 비석으로, 1683년(숙종 9)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김수증(金壽增)이 예서체로 썼다.
자운서원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을 때, 오른쪽 산기슭으로 여현문(如見門)이 보인다.이 문 안쪽, 자운산으로도 불리는 사방산(해발 227m)의 남쪽 자락에 이이묘와 신사임당묘를 비롯한 13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중심 묘역의 가장 높은 곳에는 이이와 부인 곡산노씨의 묘, 그 아래로 이이의 맏형 이선(李璿)과 그의 부인 곽씨의 합장묘가 있다. 그 아래로 이이의 부모인 이원수(李元秀)와 신사임당(申師任堂)의 합장묘가 있고 가장 아래쪽에는 이이의 맏아들 이경림(李景臨)의 묘가 있다.
이이묘는 부인 곡산노씨묘와 위·아래로 인접해 있다. 봉분 정면에 상석이 있고 오른쪽에 묘비가 있으며, 그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이이의 부모 묘소에도 중앙에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로 키 작은 문인석이 자리하고 있다. 가족 묘소는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 평범한 묘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이선생신도비는 높이 223㎝, 폭 109㎝, 두께 39㎝ 크기로, 유적지 입구에서 가까운 왼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1631년(인조 9) 4월에 세워진 대리석 비석으로 앞뒷면에 이이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글씨는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율곡기념관은 1986년 건립된 팔각정형태의 건물이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이 관련 자료의 전시공간과 체험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약 10㎞ 떨어진 곳에는 이이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제자들과 함께 시와 학문을 논했다고 하는 화석정(花石亭,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이 있다.
3)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경세가인 이이 관련 유적을 대표하는 곳으로, 그를 배향한 자운서원과 그의 가족묘역이 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한 인물에서 비롯된 문화유산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공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3. 둘러보기
율곡 이이 신도비. 율곡 선생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신사임당과 이율곡 동상
율곡기념관
재실
가족묘 입구 여견문
맨 아래쪽에 이이의 맏아들 경림의 묘가 있다.
다음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와의 합장묘가 있다.
이이의 맏형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가족묘
율곡 이이의 묘. 위에 부인 곡산노씨 묘가 있다.
율곡 이이의 묘. 뒤에 있는 묘소는 부인 곡산 노씨 묘가 있다.
자운서원 입구
자운문
자운서원묘정비
이이 사당 문성사
사당 내부
자운서원 맨 뒤쪽의 이이 사당 문성사
신사임당 묘
4. 돌아본 후
나라의 얼굴치고는 좀 초라하다. 서원도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가 근년에 복원되었다. 퇴계의 도산서원이 화려하게 그대로 남은 것과 대비해보면 율곡의 흔적이 많이 초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손도 제자도 두드러지게 활동하는 모습이 그다지 알려진 바 없는 거 같다. 퇴계가 영남학파의 맹주로 엄청난 위세를 보이는 것과 대비된다.
그래도 강릉에 율곡연구원이 있고, 율곡학진흥원 건립을 추진하고있다. 퇴계학의 국학진흥원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율곡 연구가 탄력을 받을 거 같다.
이이의 기호학과 퇴계의 영남학이 비교 연구와 함께 관련된 역사문화적인 파장이 국제학의 시각에서 좀 더 광범위하게 해명되기 바란다. 화석화된 사료 고증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서 갖는 현재적 의미를 알고 싶다.
이황의 사단칠정론과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동기론과 결과론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황(李滉)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올바른 마음과 그렇지 못한 마음은 소종래가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이(李珥)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대안으로 삼고, 올바른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 결과를 보고 판정해야 한다고 해서 이황과 전혀 다른 논의를 폈다.
이이(李珥)는 사단과 칠정에서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용어를 바꾸어, 동기론에서 결과론으로 나갔다. 좋은 마음인 도심과 좋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인 인심은 둘 다 기 기(氣)에서 나왔고, 마음이 도의를 위하면 도심이고, 입이나 몸을 위하면 인심이라고 했다. 어느 쪽인가는 결과를 보고 판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이는 이황의 이원론적 주리론과는 다른 이원론적 주기론을 정립했다. 당시 용어로는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이치를 분명하게 하려고 했다. 이것이 다시 ‘이통’을 중요시하는 쪽과 ‘기국’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나뉘면서 인물성(人物性) 동이(同異) 논쟁, 일명 호락논쟁으로 이어졌다.
정리하면 이황은 이원론적 주리론을, 이이는 이원론적 주기론을 정립했다. 이이의 논리는 다시 인물성 동이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원론과 별도인 기일원론은 자생 철학이었다. 기일원론은 이규보에서 발화하여 김시습, 서경덕, 임성주, 홍대용, 박지원을 거쳐 최한기에서 정점을 이룬다. 기일원론은 중국철학 수준을 넘어서서 자생적으로 이룩한, 근대로 나아가는 사상이다. 중세 보편적인 사고인 이기이원론보다 한발 앞선 근대적인 철학이다.
선조 8년 5월 서경덕을 우의정에 추증(追贈)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벌어졌을 때, 이이가 말했다.
“이 사람의 공부는 진실로 학자들이 본받을 바는 아 닙니다. 서경덕의 학문이 횡거(橫渠)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저서(著書)가 성현의 뜻과 꼭 들어맞는다는 것은 신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이른바 학자라는 사람들 은 성현의 설을 모방하여 말할 뿐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경덕은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나아가 자득(自得)한 묘리(妙理)가 많으니 문자(文字)만 익히고 말로만 한 학문이 아닙니다.”(조선왕조실록)
이이는 기일원론을 말하는 서경덕의 학문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자득지학인 것을 높이 사서 이처럼 옹호하였다. 이이의 옹호발언에 힘입어 서경덕은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중국과 다른 우리 철학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철학사 정리는 조동일 이론 참조) 이이의 안목과 역량이 이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를 더 많이 거슬러 이황에 너무 경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지식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이이는 더 많이 연구되고 알려져야 한다. 기일원론은 민중의 저력을 보여주는 구비철학과 쉽게 만난다. 멀고 고답적이고 난해한 철학이 아니라, 친근하고 용이한 철학적 언술로 편하게 율곡 철학을 풀어내면 좋겠다. 화석정의 전승에서 읽어내는 구비철학은 이기철학사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가.
#파주가볼만한곳 #율곡이이 #이이유적 #자운서원 #신사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