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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 마 17:1-13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골치 덩이로 전락하고 마는데, 그 요인의 첫째는 진실성의 상실이요, 둘째는 신뢰의 상실입니다.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여 힘이 없으면 사회를 이끌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끌려 다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이런 인정 심리는 어린 시절 부모의 인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2살 무렵부터는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해 주는가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아이는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조차도, 한 발짝 떼고, 또는 깡충 한번 뛰고 난 다음, 엄마의 얼굴을 돌아봅니다. “나 잘하지?”라고 인정해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때, 아이의 자신감은 사라집니다. 극단적으로는 부정적 성격 형성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불안감으로 연결됩니다. 충분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내면의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또한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패턴을 ‘파에톤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파에톤 콤플렉스라는 용어의 유래는, 그리스 로마 신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은, 헬리오스가 인간과 바람을 피어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파에톤이 친구랑 대화를 하던 중에, 친구가 족보 자랑을 하고 나서자, 자신은 태양신인 헬리오스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가, 허풍쟁이로 놀림을 받습니다. 파에톤은 기가 꺾였는데, 태양의 신 헬리오스는 슬퍼하는 아들 파에톤을 달래기 위해, 무슨 소원이든지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파에톤은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온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아버지의 태양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헬리오스는 차마 약속을 어길 수 없어, 아들에게 태양마차의 고삐를 넘겨주지만, 마차의 말들은 파에톤의 미숙한 통제로 인해, 당황하여 마구 날뛰게 됩니다. 결국 마차는 하늘로 무섭게 돌진하게 되고, 강과 바다, 농작물이 모두 말라죽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에 놀란 제우스는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할 수 없이 파에톤을 향해 번개를 던지게 되고, 결국 파에톤은 태양 마차에서 떨어져 죽게 됩니다.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무리한 행동을 한 파에톤에서 따 온 것이 ‘파에톤 콤플렉스’입니다.
대인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욕구가 강합니다. 따라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 할지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런데 대인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의 능력이나 외모 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감이 부족하고 위축되기 쉽습니다. 만일 자신감이 부족하더라도,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더라도, 자신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불안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곧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면서, 실제로 자신이 가진 외모나 능력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대인공포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대인기피증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동생과 함께 드린 제사에서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린 동생은 인정을 받았지만,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자신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게 너무 상처가 되었고, 자기 마음 관리를 못한 그는 결국 동생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동생이 없으면, 자기가 인정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죽은 자기 동생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절망감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지만, 끝까지 인정받지 못한 가인의 상처는, 결국 대인기피증으로 나타났습니다. 창 4:13-14절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그가 얼마나 대인기피증이 심한지를, 그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1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서 열두 명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열두 명을 선택하시기 위해, 주님은 많은 고민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눅 6:12-13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열두 명에 뽑힌 것 자체가 주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 중에, 열두 제자가 된 것만 해도 어디입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세 명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들은 예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결정적일 때, 이 셋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본문의 변모를 위한 높은 산에 올라갈 때뿐만 아니라,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러 가실 때와,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였습니다. 보기에 따라, 얼마든지 예수님이 편애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 세 사람을 그 정도로 인정하셨을까요? 분명한 것은 나이 때문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가장 연장자일 것 같은데, 요한은 가장 연소자일 것입니다. 당연히 직업 때문도 아닙니다. 제자를 부르는데 직업이 고려되었다면, 마태는 애초 부르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의 직업은 욕을 바가지로 먹는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이 다 어부 출신인데, 당시 어부도 선망의 직업은 아니었던 게 분명합니다. 인정받은 것은 그들의 헌신도였습니다. 그들의 열정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열두 사람은 누가 크냐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홉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세 사람을 편애한다고, 불만을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세 사람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헌신도에 있어, 열정에 있어, 자신들과 확연히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아홉 사람도 세 사람을 예수님의 핵심 제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리처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칠십인 제자처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처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세 제자 곧 핵심제자처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핵심제자는 더 많이 헌신해야 합니다. 시간이고 물질이고 더 헌신해야 합니다. 주의 일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니 몸은 더 고달프고 힘은 더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행복입니다. 주님께 인정을 받아서입니다. 구원은 차별이 없이 동일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그러나 인정받는 것은 동일하지 않고 차별이 있습니다. 헌신한 대로 받습니다. 자신이 쏟은 열정만큼 인정을 받습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필요에 의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별 다른 일 없으면 나오고, 바쁜 일 있으면 안 나옵니다. 예배가 우선순위에서 집안의 대소사 다음으로 밀립니다. 예배만큼은 꼭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도 예배는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예배 빠지고 어디 가면 하나님한테 혼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기본이고 직분과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맡겨진 직분과 사역에 기쁨으로 충성합니다. 개인사나 집안일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무슨 일이 있으면 열일을 제쳐두고 달려옵니다. 항존직 직분자는 그쯤은 돼야 한다고 봅니다. 누가 교회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주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겠습니까?
2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간 세 제자는, 특별한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습니다. 그분의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습니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을 봤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장면을 확인했습니다. 오병이어를 통해 5천명을 먹이는 것에 동참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심지어 물 위를 걷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건 보통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보통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너무 편하게 그 일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기적이라며 흥분하는데, 정작 자신은 ‘그 거 뭐 별 거 아닌데’ 하는 식이었습니다. 처음에 뭣 모르고 따랐는데, 따르면 따를수록 뭔가 특별한 분임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빌립보 가이사랴로 소풍을 가게 됐습니다. 그곳은 푸른 숲 맑은 물이 있는, 소풍을 가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곳은 판 신을 비롯한 우상이 가득한 곳이요, 황제 가이사의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갔을 때 예수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역사에 길이 남을 명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고백으로 베드로는 예수님한테 극찬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예고에, 제자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분위기를 바꾸시려고 그랬는지,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셨고, 이 번 높은 산에서의 변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자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세 제자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3절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그런데 더 놀라운 광경이 세 제자 앞에 펼쳐졌습니다. 자기들의 눈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가 누군가요? 모세가 언제적 사람입니까? 우리에게도 까마득하지만, 세 제자에게도 까마득한 조상님입니다. 아브라함과 더불어 전설적인 존재 아닙니까? 구약성경의 5권을 율법서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모세오경이라고 합니다. 모세 오경은 더 줄여서 오경, 또는 모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인 것입니다. 무슨 논쟁이 있다가도, 모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면 끝입니다. 그 조상들을 통해 말로만 듣던 모세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누군가요? 엘리야가 언제적 사람입니까? 모세보다야 후배지만, B.C 9세기 사람이니까 까마득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의 레전드입니다. 그는 가장 악한 왕 아합에 의해, 모든 선지자들이 잡히고 도망하고 그럴 때도 독야청청했던 사람입니다.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 무려 850:1로 영적 전쟁을 치러 승리했던 사람입니다. 그 엘리야가 자기들 눈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율법의 대표자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자 엘리야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아 있고, 예수님이 얘기를 주도하셨습니다. 대화의 주제를 들어보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눅 9:31절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이 황홀한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따르던 예수님이, 그 정도 분인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여쭈었습니다.
4절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역시 베드로다운 발상입니다. 보면 계산이 빠져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점은 계산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주님께 모세에게 엘리야에게 각각 하나씩 주고 나면, 자기는 어떻게 할 건가요? 지금 그곳이 들판이 아닙니다. 높은 산 중입니다. 들판이라도 이슬 때문에 초막이 없으면 안 되는데, 하물며 높은 산인데 초막없이는 하룻밤도 보내기 힘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거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지나치게 계산적일 때가 있습니다. 전적으로 믿음으로 하지 못하고, 계산기를 두드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걱정하지 마라. 순종하면 내가 책임지마. 아무렴 내가 너 굶어 죽이겠니?”라고 해도, 마중물을 펌프에 붓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우리의 계산법으로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계산법도 그럴까요? 오병이어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는 걸, 어떻게 계산할 수 있습니까? 씨앗 한 알을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습니까? 눅 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굳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 더하기 하나를 둘로 계산하면, 하나님도 그렇게 계산적으로 나오실 수 있습니다. 계산적인 사람도 예수를 머리로는 믿을 수 있어도, 자기를 던져서 헌신하는 것은 잘 못합니다.
요 6:5-7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들 중에서도 빌립은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빌립이 계산을 똑 부러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립더러 계산 잘했다고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도 계산이라면 빌립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요 12:4-5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향유를 보고, 그게 얼마짜리인지 계산해 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계산에 능하다고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믿음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은 사람은 있지만, 계산으로 예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인정받고 싶다면, 삶의 방식을 달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계산적으로 살아온 삶의 방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이 결정하시게 해야 합니다. 물질 사용의 우선순위를 하늘에 쌓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 사용과 돈 사용에 대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시간을 얼마나 내느냐가 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이 내 믿음의 실제입니다.
5절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베드로의 말이 있을 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당신의 기뻐하는 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정하느냐를 말씀하신 거고, 두 번째 말씀은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인정해야 하느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자가 아무리 밖에서 인정을 받아도, 막상 자기 아내한테 자식한테 인정을 받지 못하면 힘이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도, 가까운 지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도 힘이 없습니다. 세계 교회를 돌아다니며 인정을 받아도, 자기의 목회지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도 힘이 없습니다. 자기 아내만큼, 자기 자식만큼, 가까운 지인만큼, 자기 목회지만큼, 자기를 잘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보다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끝부분에 이런 슬픈 말씀이 있습니다. 마 7: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예수님을 나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여 “주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주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일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예수님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격을 언급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이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께 인정받는 기준입니다. 내 뜻대로 다 해놓고, 주의 일했다고 하고, 자기는 헌신했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뿐만 아니라,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 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아롬이와 효리가 내 자식인 것과, 그들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듯 말입니다.
바울은 일생을 통해, 주를 기쁘게 하는 자로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고후 5:9절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살전 2:4절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또한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부탁을 했습니다. 엡 5:10절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살전 4: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바울이 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강조했을까요?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나는 그 일을 하기 싫은데, 그 일을 주께서는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해야 합니다. 나는 그 일을 하고 싶은데, 주께서는 안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해야 할까요, 안 해야 할까요? 안 해야 합니다. 그 반대로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일은 일대로 하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이중으로 손해를 봅니다.
하늘에서 난 두 번째 소리도 그냥 넘기면 안 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우리가 예수님을 인정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인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부모 말 잘 듣는 것입니다. 비록 부모가 나보다 배움이 부족하고, 정보에 뒤떨어진다고 해도, 일단 부모의 말에 “예 알았습니다.”하는 것이, 부모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무시까지는 아니라도, 무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막내가 학교를 가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얼굴이 뾰로통하여 있었습니다. “너 왜 안 가고 있어?” 하니까, 자기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했는데,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큰 애는 고등학생이라 아침 일찍 학교를 간 후였고, 누구는 주방에, 누구는 화장실에, 누구는 방에 있었습니다. 아무도 막내의 “다녀오겠습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내는 가족이 자기에게 무관심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적어도 나는 말씀에 무관심하지는 않다고 할 참입니까? 그럼 얼마나 말씀을 가까이 합니까? 하루 중 말씀과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매 년 성경을 일독하여 자기 나이만큼은 하겠다는 다짐을 하기를 바랍니다.
6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구름 속에서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보통 말이 아닙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게 이상합니다.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그들은 한동안 엎드려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7-9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그때 주님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 앞에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등을 토닥이는 예수님의 손길을 느낄 때, 예수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제자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베드로지만, 마음이 아직 진정되지 않아서였는지, “모세와 엘리야는 어디 갔어요?” 묻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세 제자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제자들은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 대신,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10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제자들은 베드로가 고백한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면, 엘리야가 먼저 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아까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엘리야가, 메시야 앞서 온 엘리야가 맞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11-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사실은 이미 엘리야가 왔지만, 사람들이 못 알아봤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이 바로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칭찬이 생략되어 있지만, 이런 칭찬으로 인정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 제법인데, 이제 하산해도 되겠어.” 예수님의 인정을 받은 세 제자의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란 책에 보면 건강한 장애인들에 관한 글 한 부분이 나옵니다. ‘오체 불만족’의 주인공 오토다케,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를 쓴 레나 마리아,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장애인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들의 맑은 눈빛을 보면, 그들이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선이는 나는 하나님의 VIP라고 선언합니다. 제 눈에는 지금의 제 모습이 정말 귀엽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손이,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많이 필요한 사람이라서. 그리고 그분의 특별보호대상자라서 저는 기쁘답니다. 다시 한번 저를 바보로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에필로그에 적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그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가 나보다 좀 못해도 인정해주고, 그가 나보다 더 나아도 인정해주는, 넉넉한 마음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하셨사오니, 주인되신 주님이 우리를 주장하시며,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옵소서. 또한 복음을 전하는 증인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VIP로 인정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타인을 배려하는 믿음 / 마 17:14-27
중국 진나라 때의 고전인 “여씨춘추”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어떤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쩌다가 그의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옆집에 사는 아이가 의심이 갔습니다. 그 아이가 훔쳤다는 생각이 그에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의 얼굴표정이나 하는 몸짓을 보아서, 자기의 도끼를 훔쳐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나무꾼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자기가 잃어버린 도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꾼은 자기가 실수로 그곳에 도끼를 떨어뜨려 놓고서는, 괜히 옆집에 사는 아이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아이를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너무나도 순진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 표정이나 하는 몸짓으로 보아서,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댈 아이로는 전연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이 아이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아이를 바라보는 나무꾼의 시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쓸데없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자기가 고쳐야 할 고질적인 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무명 시인의 ‘사랑의 주어’란 제목의 시를 한편 소개하겠습니다.
혼자일 때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사랑에 빠진 뒤에는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네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내’가 중요했지만, 사랑에 빠진 뒤에는 ‘네’가 중요한 사람이 된다. 사랑에 빠지면 주어가 ‘나’에서 ‘너’로 바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사랑입니다. “사랑했다면 앞을 보고, 사랑할 거면 서로를 보고, 사랑한다면 같은 곳을 보라.” “너밖에 없어서 사랑한 게 아니라, 널 사랑하다 보니까 너밖에 없더라.” “사랑받는 여자보다 예쁜 여자는 없고, 사랑하는 남자보다 행복한 남자는 없다.”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사랑받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다.” 미국의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라.” ‘어린왕자’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생 텍쥐페리는 사랑 명언집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험을 통해 보건대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같은 방향을 볼 때 생겨난다.” 이런 사랑의 명언을 듣고도, 가슴에 아무런 뭉클함이 없다면, 마음밭이 가물어 메마른 땅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은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우리 사랑의 책이요, 우리의 하나님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해주는 책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책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이 말씀입니다. 마 22:37-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 하셨습니까?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 중의 율법, 계명 중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거였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다른 말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다른 말이 배려입니다. 우리는 배려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되,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수직적인 삶입니다. 배려는 수평적인 삶입니다. 수직과 수평이 균형 잡힐 때, 온전한 십자가의 삶이 됩니다.
지난 달에, 몇 분 목사님들과 점심을 함께 했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마을에 훌륭한 불교 신자가 있는데, 만약에 그분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면 마을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분은 새벽 예불을 하고, 오전에 불경을 공부하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잘합니다.” 새벽기도회도, 큐티도, 독한 맘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그 타인이 비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신앙 자체보다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편입니다. 굳이 문자를 쓰면, 칭의보다 성화를 강조하는 목회자입니다. 나는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교회생활은 신앙생활의 일부에 속한다고 봅니다. 교회생활 외에도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바로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정삼각형으로 이해하면 좋은데, 대신 교회생활이 위의 꼭짓점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중심의 신앙이 될 때, 하나님 중심의 신앙, 말씀 중심의 신앙을 견지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작전 중의 하나는, 하나님 중심과 말씀 중심과 교회 중심을, 어떻게든 구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보이는 교회가 아무리 불완전해도,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희망은 교회입니다. “교회 :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희망” 교회 중심의 신앙이 안 되면, 가정에서의 신앙생활은 안 됩니다. 교회 중심의 신앙이 무너지면, 직장에서의 신앙생활은 안 됩니다. 주일예배 때 말씀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을 받아도, 한 주간의 가정에서 신앙생활이 쉽지 않고, 직장에서 신앙생활이 만만하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우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차선인 경우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차선으로 여기면서, 하나님더러 자기를 우선으로 여겨달라는 것은 이기적인 처사입니다. 삼상 2:30절하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1837년 2월 5일, 한 아이가 미국 메사추세츠주 노드필드에서, 가난한 가정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열 명의 가족을 남긴 채 일찍이 죽고 말았습니다. 가족들은 한 끼를 해결하면,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열일곱 살에 보스톤의 한 구둣방에 취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구둣방의 뒤켠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던 중,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됐습니다. 그는 그 날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거리에 나가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런 삶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장 먼저, 그리고 나의 일은 나중에’ 이 소년은 나중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불을 뿜는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바로 ‘드와이트 무디’입니다. 하나님 우선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를 훗날 세계적인 전도자로 만들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삶의 순위에서 일 번에 두는 것입니다. 그게 제대로 정해져야, 다음 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없이는, 그와 같다고 말한 둘째 계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문제를 정리했으면, 그 다음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타인에 대한 배려의 문제입니다.
어느 분이 운영하는 블러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강추위가 전국을 강타했을 때의 일입니다. 직업이 건축업자인지라, 지방 공사가 잦았던 나는 그때 경상도 함안으로 출장을 갔었습니다. 그날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차가운 날씨와 쌓인 눈 때문에, 인부들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책임지고 있던 나는 숙소에서 남아 현장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몹시 추운 날씨였지만 안을 살펴보니, 이불 몇 장과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취사도구도 준비돼 있었기에, 나는 기꺼이 하룻밤을 묵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인부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방에 들어와 보니, 보일러에 기름이 없었습니다.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밖에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상태였고, 눈송이가 더욱 굵어졌습니다. 방안에 있는 이불을 모두 끌어다 몸을 감쌌지만, 몸의 한기는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가보니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웬 소녀가 손에 들고 있던 호빵을 내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추우실 텐데 이거 드세요. 우리 아빠가 기름 가지고 오실 거예요.” 아이의 말이 끝나자, 뒤이어 기름통을 든 한 중년 남자가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내게 말했습니다. “젊은이가 이런 추위에 고생을 자처하다니 대견스럽네. 젊을 때의 고생은 인생에 있어 커다란 밑천이 될 수 있지.” 아래 동네에 사는 그 부녀는 인부들이 내려가면서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듣고는, 숙소에 기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기름을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한 따뜻한 배려에, 나는 그만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이입니다. 얼핏 들었으니 그냥 지나가도 됩니다. 그런데 그 부녀는 낯선 이에게 따뜻한 친절을 베풀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게 타인을 향한 배려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와 그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부녀가, 이 말의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만, 자기와 그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14-15절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간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이 몹쓸 간질병을 얻은 후로, 아버지의 삶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아들을 곁에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을 보면, 간질을 일으켰다하면 심했습니다. 저도 가까이서 간질로 넘어간 사람을 본 적이 있지만, 처음 본 사람은 깜짝 놀랍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깨어나면 모릅니다. 아들 하나 있는 게, 간질 발작을 했다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넘어가니, 아비로서 통 맘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밖에 가서 일을 한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근래 들어 아들의 발작 증세가 부쩍 잦아졌습니다. 아버지는 한숨만 나왔습니다. 자기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처음엔 이것저것 다해봤습니다. 용한 의사도 찾아가보고 좋다는 약도 먹여봤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점점 상태가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았기에, 누구한테 무릎 꿇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때문에 예수님께 꿇어 엎드렸습니다. 아픈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가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아픈 아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통로였습니다. 아픈 아들로 인해 지금도 고통스럽지만, 그 아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 환경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매달리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을 보지 마세요. 보면 열불 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을 보지 마세요. 보면 속에 천불 납니다.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런 것들을 통해서라도, 주의 전을 찾아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간질에 걸린 자기 아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아버지의 사정을, 예수님은 잠자코 들으셨습니다.
16절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이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자, 그는 제자들을 거론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지금은 선생님이 안 계시니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않고, 자기들이 어떻게 한 번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치유 훈련을 받았고 실습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은 두고 세 제자만 데리고 어디를 갔습니다. 이번에 자신들도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9명의 제자들은 의욕적으로 달려들었지만,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어쩐지 제자들도 슬슬 예수님의 눈치를 보면서,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모습입니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잠자코 듣고 있던 예수님이 깊은 탄식을 하시며 한 마디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예수님이 언제 나무라셨습니까? 예수님이 언제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까? 믿음 없을 때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믿음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을, 단지 믿음 없는 탓으로 보셨습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 아이가 보통 간질이 아닙니다. 간질이 여간 심하긴 합니다. 더구나 귀신의 역사로서의 간질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눈에는 환경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얼마 있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 믿음 없는 제자들을 남겨두고, 다시 아버지께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주님이 우리 믿음을 보시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다들 생각해 보았겠지만,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지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실 거 같습니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탄식하실 거 같습니까? 우리의 기본 자산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그 분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 11: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럼 우리가 우선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우리는 아픈 아이의 아버지처럼 구해야 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드렸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순간 예수님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한 마디 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이 아버지는 순간 당황하여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아이 아버지의 부르짖음이 사실 우리의 부르짖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입버릇처럼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믿음을 구해야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아이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아이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18절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그 간질이 귀신 들림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간질이 귀신 들려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간질의 원인은 다양한데, 역학 연구에서는 환자의 1/3 이상이 뇌에 생긴 병리적 변화나 뇌손상의 과거 병력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본문에서는 귀신의 역사로서의 간질이었습니다. 그러니 간질을 고치기 위해서는, 간질의 원인 제공자인 귀신을 쫓아내야만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귀신이 나가자 신기하게도, 그 아이는 멀쩡해졌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19절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암만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자신들도 그 아이를 고쳐보려고, 얼마나 힘썼는지 모릅니다. 예수님한테 배운 방법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고 바라보던 아이 아버지를 실망하게 했습니다. 자기들도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며 덤볐지만 체면만 구겼습니다. 제자들은 그 부자(父子)가 돌아가고,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예수님한테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사실 세 제자도 궁금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홉 제자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들려오는 답은, 너무나 단순했고, 심지어 뻔하기까지 했습니다.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결국은 믿음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예수님이 뭐 다를 걸 보시겠습니까? 주님은 믿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 뭐 볼 거 있습니까? 우리 뭐 볼 게 있어야 다른 걸 볼 게 아닙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믿음 외에 볼 거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뭔가 보여드릴 게 없기에 믿음만 보시겠다는데,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 말고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며 하나님을 웃깁니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이건 기도입니다.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 자체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홉 제자들이 그 아이를 놓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기에 믿음이 작은 기도였기에,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제자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22-23절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예수님의 공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셨던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느 날 제자들을 놀라게 하는 말씀을 불쑥 하셨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제자들의 귀에는 죽는다는 말만 들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근심이 되겠습니까? 이전에도 주님이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그때 어떤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가 눈에 선합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후에 하셨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놀랐습니다. 베드로가 멋모르고 예수님한테 항변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봉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제자들의 눈은 베드로에게 향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며 ‘자기는 안 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 중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다들 근심만 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가버나움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4절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반 세겔 받는 자들은, 국세를 받는 세리가 아닌, 성전 유지를 위해 세를 걷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베드로한테 오더니, 조금 기분 나쁘게 물었습니다.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어떤 의도로 물었을지 감이 오긴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도 공격을 많이 받았기에, 또 귀찮고 기분 나쁜 질문이다 싶어서 일단 선수를 쳤습니다.
25절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반 세겔은 생명의 속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냥 알아서 “내신다”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둘 중에 하나를 고르게 하셨습니다.
26절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베드로는 속으로 ‘에이,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하며,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은 굳이 내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밝히셨습니다. 자신이 성전의 주인 아닙니까? 또한 자신이 생명의 주인 아닙니까? 주인이 자기 건물에서 장사하면서, 상가임대료를 내는 사람이 없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문제제기를 받고는, 그냥 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한테 말해서 회계 처리하라고 하지 않고, 좀 재미있는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27절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베드로의 옛 직업을 살리셨습니다. 낚시에 걸려 맨 먼저 올라오는 고기의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베드로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아닌 괜한 것으로, 자신이 오해받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실족하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순전히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자신이 철저히 믿음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믿음을 보시는 분이, 자신은 믿음으로 살지 않았겠습니까? 롬 14:23절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자신은 믿음으로 살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은 그토록 믿음으로 사셨지만, 동시에 타인을 배려하셨습니다. 자기 믿음 좋다고 저 만치 앞서 가면서, 뒤처진 사람들에게 “왜 빨리 못 오냐? 왜 자꾸 뒤처지냐?”고 채근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 우리가 배려해야 할 타인이 누군가요? 롬 15:1-2절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우선은 1절에 나온 대로 믿음의 식구들이고, 다음은 2절에 나온 대로 이웃입니다. 더 폭을 넓혀서,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다 배려의 대상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들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는 물론이고, 세상에서도 존중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는 믿음을, 그리고 이웃에게는 배려를 보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겨자씨 한 알만한 그 믿음만 있으면 오늘 우리 앞에 수없이 많은 그런 산들을 만나도, 세상적으로는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새힘 얻어 능히 승리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자녀지만, 이 세상의 의무도 더 잘 지키고 행함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일들을 하지 않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매일매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신나는 인생,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인생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